2007년 8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 위치한 대통령궁에 한국 대통령 친인척 한 명이 도착했다. 두 인사가 방으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양 측의 경호원들은 복도에서 대기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측의 경호원은 건장한 남성 스무 명이었고, 한국 대통령 경호실에서는 여성 경호원 한 명을 파견했다. “꼬맹이네.” “얘가 왜 여기 있어?”키가 이 미터에 가까운 흑인들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국 측 경호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나 프랑스어 알아들어. 너희들 말 다 들린다.”남자들이
“호중이 말이야, 사람이 변해도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가 있나!”김천예술고 명예교장인 이신화 박사가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건네는 말이다. 이 박사는 ‘트바로티’로 유명한 가수 김호중씨가 김천예술고에 편입할 당시 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교사로 있던 서수용 김천예술고 교장과 함께 인생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준 결정적인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이 박사는 “당시는 그저 노래를 빼어나게 잘하는 학생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김호중은 한 인간으로서도 너무도 훌륭하게 성장했다”면서 “앞날이 더 기대되는 예술가”라고 말했다. 학교를 다닐 당시 김호중
“뉘집 아고(어느 집 자식이냐)?”1980년대 초반, 30반 중반의 청년들이 50~60대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청년이라는 말은 폐기된 용어나 다름없었다. 어른이 아니면 모두 애 취급이었다. “형님, 청년들도 대표 한 명 뽑읍시다. 형님이 나가보십시오.”1980년 말, ‘뉘집 아들(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듬해 2월에 선거를 통해 1개 읍면에 2명씩 선거로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주변의 청년들이 나를 찾아와 도전해보라고 했다. 당시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나를
‘행동하는 동네 아줌마’대구 남구 나선거구에 출마에 구의원에 당선된 송민선(56) 의원이 선거 기간에 내걸었던 슬로건이다. 저 짧은 표현 속에 송 의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송 의원은 25년 동안 외식업에 종사했다. 남구뿐 아니라 대구에 사는 사람들도 식당 이름을 들으면 “아, 거기!”하는 말이 즉각적으로 쏟아질 만큼 인기 맛집이다. 식당에 방문하는 이들 모두 손님이자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소중한 정보원이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다보니 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외식업중앙회 대구 남부지부장을 맡은 지
“당선되고 나니까 정치 선배들이 하나같이 ‘네가 될 줄은 몰랐다’고 그래요. 심지어 저를 군위의 후보로 추천한 분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하하!”6·1 지방선거에서 군위군 의원으로 당선된 서대식 의원(47)의 말이다. 상황을 보면 “당선된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정치 선배들의 말이 십분 납득이 된다. 선거운동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19년 동안 개인택시를 운영했다. 평소 정치를 하는 선배들과 교류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기는 했지만 큰 단체의 회장을 맡는 등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작업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개인택시로 열
“선한 영향력 끼치는 뉴스 앵커가 되고 싶어요”“중학교 때, 1년 반 만에 12센치가 컸어요.”2022 미스대구 진 박주은(22.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씨는 중학교 때 처음 “미스코리아에 나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갑자기 키가 큰 덕분이었다. 배드민턴을 시작한 뒤로 무릎에 성장통이 올 정도로 키가 쑥쑥 자라 현재 키까지 치고 올라왔다.미스코리아를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도 ‘몸’이었다. 살이 안 찌는 체질이어서 너무 말라보일까봐 걱정됐다. 남들은 덜 먹으면서 준비했는데, 박씨는 먹는 데 더 집중했다. 더불어 탄탄한 하체를
미스대구가 돌아왔다. 코로나19로 한껏 움츠렸던 미스대구가 다시 시민들을 찾아왔다. 11일 아양아트센터에서 열린 2022 미스대구 선발대회에는 500 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코로나19 이전 평균 5,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운집한 야외 무대 행사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달라진 세상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전문 MC 이도현씨와 2020 미스대구 진 이연제씨가 진행을 맡은 가운데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명의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가 함께 꾸민 미스 대구 패션쇼와 장기 자랑에 이어 T
“적장의 마음까지 얻은 진정한 덕장(德將).”6·1 지방선거에서 경북 울릉군수에 당선된 남한권(62) 군수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다. 보수 지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득표율 69.71%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도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리더십과 정신력은 말 그대로 ‘장군’답기 그지없었다. 단기 필마로 난공불락의 성을 점령한 무용담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무소속 출마는 절대로 안 됩니다!”첫 번째 전략은 지피지기였다.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승부를 예측한 후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 국민의 힘에서 현직 군수를 포함
“경북 군위는 전형적인 보수 지역인데다 투표율 전국 최고라서 보수당 공천받으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 아닌가?”모르고 하는 소리다. 공천이 영향은 있겠지만 승리를 담보하는 절대적 요건은 아니다. 군의원 선거를 봐도 이번 6.1 지방선거에서 군위 ‘가’와 ‘나’ 선거구 중 ‘가’ 선거구 득표율 1위가 무소속이었다. 인구 2만 남짓한 지역의 특성상 보수 강세로 거론되는지 역임에도 ‘인지도’의 영향이 정당의 색깔까지 무색하게 만든다. 첫 도전보다는 재선이, 재선보다는 3선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김진열이 누구요?”이번 6.1 지방선거
1984년, 형님이 돌아왔다. 11년만의 귀향이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 랴부랴 한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장례식 마지막 날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말이 서툰 어린 조 카를 데리고 온 형님은 아버지의 영전에 묵념한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한참이나 영정사진을 물 끄러미 응시했다. “형님, 계속 미국에 계실 겁니까.”조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졌을 즈음 형님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다면 바로 저 말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늘 형님이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처자식 버릴까?”그렇게 툭, 던지고는 하소연하
“형님, 형사들이 검사도 조사할 수 있습니까?”2006년 1월, 성서에서 주물공장을 하고 있는 고향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의례적인 인사 끝에 “아주 이상한 놈이 있다”면서 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검사도 나쁜 짓 하면 우리가 조사할 수 있지.” 그러자 반색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가짜 검사 같기도 한데, 아무튼 이놈이 아주 요상한 짓을 하고 다닙니다.” 그는 자기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는 A씨에게 일어났던 일이라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에 따르면 A씨는 채팅을 하다가 자신을 검사라고 소개한 남성을 만났다. 채팅창에 신분증까지
오강에르뎅(26, 계명대 경영대학원 회계학과 대학원)씨는 한국에 온지 5년째로 접 어들고 있지만 존댓말에 서툴다. 먼저 한국에 온 몽골인 선배에게 “존댓말 써라”고 늘 타박을 듣는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이모들 때문이다. 이모들이 “손녀 같다”면서 반말을 해도 “귀엽다”면서 너무 오냐오냐했다. 오강에르 뎅은 “이모님들 덕분에 한국생활이 힘든 줄은 몰랐다”면서 “눈물 나도록 고마운 분 들이다”고 말했다. 처음 왔을 때는 막막함 그 자체였다. 첫 한달 동안 삼시 세끼 B사 햄버거만 먹었다. 한국말에 서툰 까닭
“사람이 한번 태어났으면 저 정도 돼야지!”경북 칠곡에서 세차기 업체를 운영하는 이혜용 한성브라보 대표는 1987년 11월23일 아침에 본 풍경을 잊지 못한다. 서울시 상하수국으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병철 회장의 별세에 그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 게 듣고 알게 되었다. 그때 속으로 ‘사람이 한평생 살았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하는 생각을 했다.“그 장면이 너무도 인상 깊게 남았어요. 사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목표가 되었죠. 그런 꿈을 품은 덕분에 늘
“이거 못 해내면 우리 회사 문 닫는다.”2018년 6월 12일, 대구 달성군 논공읍에 자리 잡은 대한소결금속 생산공장에 화 재가 발생했다. 천장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공장 전체로 번졌다. 그날따라 유난 히 바람이 거셌다. 강풍에 거침없이 덩치를 키운 화마는 철제 구조물에 엉겨붙어 시 커먼 연기를 토해냈다. 화재가 시작될 즈음 김효선(49) 대한소결금속 노조위원장은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장 지붕에서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연기 를 발견 하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방대원들을 도와서 물 호스를 붙잡는 등 동분서주하며 애를 태
"안동 촌놈이다!" 김영정(55) 평화산업(주) 노조위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봄에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고향인 안동을 떠나 경북 군위로 전학을 온 날이었다. 안동에서 학교를 다닐 때처럼 책을 보자기에 싸서 둘러메고 등교를 했다. 며칠이나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나서야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갈아신고 책가방을 둘러멜 수 있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안동에서도 시내와는 거리가 먼 시골이기는 했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동네에서 어른 대접을 받았고, 군위로 나올 때도 우시장 근처에 있던 방앗간을 사서 이사를 했다. "
“협상의 기술은 모두 골목에서 배웠습니다.”노조원들에게 일곱 번이나 리더로 인정받은 김동준(56) 평화발레오 노동조합 위원 장의 고백이다. 김 위원장은 “각지에서 올라온 가족들이 뒤섞여 도시에 정착하던 그 시절은 냉랭한 도시적 삶과 시골의 정이 공존하던 시대였다”면서 “아웅다웅 다투기 도 했지만 낯선 이들과 마음을 나누며 살았던 골목 풍경이 경제구성원들이 화합해 미 래를 개척하는 모습과 무척 닮아있었단 생각이 종종 든다”고 말했다. 그가 태어난 60년대 중반은 고향을 떠나 도회로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응답하라 1988’ 속에 묘사
“휴가를 나와서 곧장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탈영이었죠.” 신상균(79) 칠곡군고엽제전우회 회장은 청룡부대 ‘일진’으로 베트남에 다녀왔다. 1965년 9월28일 베트남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으로 향한 첫 부대였고, 지원이 아닌 차출을 통해 파병 부대를 구성한 만큼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전투부대가 아닌 지원부대 소속이긴 했어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100% 보장받는 안전지역은 없었다. 전장에서 총을 쏴 본 적은 없었지만, 43년생인 신 회장에게 전쟁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부산 서면이 고향이었던 그는 피난민들이 국제시장에
“1967년 여름이었습니다.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허연 가루를 뿌렸 는데, 열흘쯤 지나니까 나무며 풀이 벌겋게 변하더군요.”고엽제였다. 베트남 전장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만환(77) 칠곡 군보훈단체협의회 회장에 따르면 본인이 근무한 최전방 방책선 인근 에도 고엽제가 살포됐다. 이듬해에는 병사들이 직접 고엽제를 뿌렸 다. 고엽제를 퍼담을 바가지가 없어서 철모에 고엽제 가루를 담아서 방책선 인근에 뿌렸다. 숲이 벌겋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하 얀 가루가 어떤 폐해를 끼칠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김 회장의 말 마따나 “아직 한
“철아, 철아, 불쌍한 철아! 일본 가서 부디 몸 성하게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돌 아와라.”아직 동이 트기도 전이었다. 열네살 소년이 혼자서 동구길을 재게 걷고 있었다. 그날 소년은 첫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을 계획 이었다. 고향의 풍경과 냄새를 가슴이 차곡차곡 개어 넣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 기고 있는데 느티나무 아래서 “석철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석철’은 소 년이 어릴 적이 쓰던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소년은 소 스라치게 놀랐다. ‘혹불할마이’. 마을 사
“우리 엄마 죽인 그놈, 제 손으로 꼭 잡겠습니다.”2012년 즈음, 젊은 경찰관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형사계에 지원을 하려 는데 꼭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형사가 되어서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 을 잡으려고 경찰에 입문한 그였다. 이야기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가 이렇 게 말했다.“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그놈 꼭 잡고 싶다. 미치도록 잡고 싶다!”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4년 초여름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휴대폰이 쨍쨍 울어댔 다. 입에서 ‘아이고’ 하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새벽 호출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