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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집 아고’ 소리 듣던 무소속·최연소 압도적 당선···“의성에 청년도 있심더”

198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선거 출마 금성면 ‘청년 대표’ 최연장 후보와는 25살 차이 ‘송림동우회’ 결성…씨름대회 유치 등 봉사 활동 1986년 공로 인정 받아 의성군 최연소 면장 발탁

  • 입력 2022.07.19 09:00
  • 수정 2022.07.19 10:29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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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뉘집 아고(어느 집 자식이냐)?”

1980년대 초반, 30반 중반의 청년들이 50~60대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청년이라는 말은 폐기된 용어나 다름없었다. 어른이 아니면 모두 애 취급이었다. 

“형님, 청년들도 대표 한 명 뽑읍시다. 형님이 나가보십시오.”

1980년 말, ‘뉘집 아들(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듬해 2월에 선거를 통해 1개 읍면에 2명씩 선거로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주변의 청년들이 나를 찾아와 도전해보라고 했다. 당시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세 명이었는데, 그중 최연장자는 쉰일곱으로 나와 스무 살 터울이 났다. 나는 말 그대로 ‘아(애)’였다.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 언제나 최선을 다해라.”

제일 젊은 나이에, 당시 여당(민주정의당)에서 공천을 주지 않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불리한 조건은 다 짊어진 셈이었다. 믿을 거라곤 젊은 열정과 의지밖에 없었다.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

선거에 나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뉘집 아고”하는 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저 말의 덕을 많이 봤다. 아버지가 워낙 궂은 일에 솔선수범하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 한몸 아끼지 않은 덕에 내가 아버지 성함을 고하면 대부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젊은 피’의 끓는 열정도 결정적이었다. 내가 당시 의성에서 청년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데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김신조’다. 1968년 그가 기자 회견에서 뱉은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는 말의 파장은 엄청났다. 향토예비군 조직도 그의 한마디가 던진 충격의 여러 결과 중의 하나였다. 내가 살던 의성군 금성면에는 예비군 2,000여명이 모였다.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당시 예비군은 장교가 부족해서 사병 출신 중에 소대장과 중대장을 뽑았다. 내가 금성 3중대장을 맡았다. 그것이 내가 청년 대표로 자문위원 선거에 나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를테면 금성면 청년대표였다.

청년들은 자기 일처럼 뛰었다. 이상문이 수십 명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방송과 인 터넷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어서 일일이 다니면서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일곱 개나 되는 동네를 돌면서 얼굴을 알리자니 너무 벅찼다. 벽보는 붙었지만 후보자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선거 운동을 하는 친구들은 거침이 없었다. “이상문이가 누고?”하고 물어오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이상문입니다!”

청년 모두가 이상문이었다. 이상문을 위해 뛰는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이상문이었다. 기성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나름의 활동을 하고 싶은 열망과 욕구가 그 만큼 컸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 덕에 목표한 것 이상의 선거 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후보가 바뀌었다!”

나중에 합동 연설회장에 섰을 때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선거운동원들 사이에서 웃 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랬는가를 솔직히 이실직고하자 어르신들이 모두 수긍하고 이 해를 해줬다. 청년들이 ‘원팀’이 되어 똘똘 뭉쳐 열정을 뿜어댄 덕에 선거는 낙승을 거둘 수 있었다. 7,700면 금성면 유권자 중 80%가 투표했고 내가 가져온 표가 2,532표 였다. 2등과 807표 차이가 난 만큼 말 그대로 압승이었다.

의성군 최연소 면장에 발탁

“아이고, 우야노!”

선거를 승리로 마무리한 다음 날 아침을 먹다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막상 당선이 되고 나자 덜컥 겁이 났다. 나를 찍어준 사람들의 열망과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 것이었다. 용기의 활시위를 힘껏 당기는 수밖에 없었지만, 활이 너무 컸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출발 지점에 문제의 답이 있었다. 청년이었다. 

선거에서 함께한 이들과 상대편 후보를 위해 뛴 청년들까지 젊은 피를 모아 ‘송림 동우회’를 결성했다. 청년들의 구심체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회원은 160명까지 모였 다. 봉사활동부터 시작했다. 영농지원, 공동방제, 논갈이, 퇴비증산운동, 면민 씨름대 회 개최 등의 활동을 벌이는 한편, 회원들이 돈을 갹출해 회관을 지었다. ‘자랑스런 군 민상’에 ‘일하는 도민상’까지 받았다.

“내 평생에 이런 장관을 보기는 첨이네!”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면민 민속씨름대회였다. 사흘 동안 펼쳐졌던 대회는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내 고향 의성은 낙동강을 끼고 모래사장이 많아 예부터 씨름을 많이 즐겼고, 장사들이 다수 배출됐다. 언필칭 씨름의 고장이었다. 행사는 행정 지원 없이 송림동우회 회원들이 회비를 내고 지역 유지들의 찬조를 받아서 진행했다. 부상으로 송아지를 내걸자 대구 등 인근 각지에서 장사들이 몰려왔다. 리그전이 아닌 개인전으로 진행하다 보니 경기가 박진감이 넘쳤다. 경기는 초등부와 일반부로 나 누어서 진행했다. 

1986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면장에 발탁됐다. 의성군 최연소 면장이었다. 별정 직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새마을 지도자 경력으로 추천을 받아 그 자리에 간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청년들과 함께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친 덕분이었다. 그해 내 나이 마흔하나였고, 팔 년 동안 면장으로 활동했다.

청년들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플 때가 많다. 마음껏 꿈을 펼치고픈 열망이 뜨거운 나이, 자신을 위해 또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취업 등 다양한 이유로 날개가 꺾인 이들이 적지 않다. 젊은이들은 이 사회의 가장 큰 동력이 자 미래 그 자체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그 거대한 에너지를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해 쏟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1981년, 그 뜨겁 던 청년들의 아우성을 생각할 때마다 구심점을 잃은 듯해 보이는 지금의 청춘들이 너무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그들을 더 믿어주고 또 나름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거대한 열정이 아닌가. 그들이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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