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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심판’ 13년 만에 풀린 두 남자의 한(恨)

‘노래방 살인’ 2004년 발생 후 13년 간 미제사건으로
사건 담당 형사와 피해자 사이의 알려지지 않은 인연
피해자 아들이 형사가 되어 범인 검거에 결정적 역할

  • 입력 2022.05.23 09:00
  • 수정 2022.05.24 14:43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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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전 대구 성서경찰서 형사과장
김선희 전 대구 성서경찰서 형사과장

 

“우리 엄마 죽인 그놈, 제 손으로 꼭 잡겠습니다.”

2012년 즈음, 젊은 경찰관 한 명이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형사계에 지원을 하려 는데 꼭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형사가 되어서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 을 잡으려고 경찰에 입문한 그였다. 이야기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가 이렇 게 말했다.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그놈 꼭 잡고 싶다. 미치도록 잡고 싶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4년 초여름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휴대폰이 쨍쨍 울어댔 다. 입에서 ‘아이고’ 하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새벽 호출은 뭔가 심상찮은 사건 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당직 형사의 목소리에서 팽팽한 긴 장이 느껴졌다.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역한 피비린내가 숨을 턱 막았다. 현장이 지하 노래방이었던 까닭에 냄새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피 냄새가 더욱 농밀했다. 피해 자는 카운터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단 시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냥 봐도 과다출 혈이 사망원인이었다. 범인의 칼끝에 얼마나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몸을 살핀 후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며, 명숙아(가명)!”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도저히 시신을 볼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노래방 입구에서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잠시 후 피해자의 가족들이 몰려왔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듯 그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눈앞에 벌어 진 일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니 나중에 나한테 시집 와라!”

“오빠야, 밥 무로 온나!”

고등학교 시절, 나는 ‘가정학습’ 기간이면 으레 명수의 집으로 갔다. 어렵고 가난한 시대여서 시골에서는 농사일이 바쁠 때면 일정 기간 동안 등교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돕도록 했다. 나는 아버지가 경찰이었기 때문에 집안 일이 없었다. 친구인 명수 집으 로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명수네는 아버지가 낙동강에서 뱃사공 일을 하느라 어머니가 농사일을 맡았다. 그때 중학생이던 명숙이가 점심을 준비했다. “명숙아, 너 진짜 음식 솜씨 좋다. 나중에 나한테 시집와라.”

밥을 먹다가 그렇게 농담을 툭 뱉자 명숙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엌으로 도 망쳤다. 명숙이는 송아지처럼 큰 눈에 콧날이 오똑한 귀염상이었고 부끄러움이 많았 다. 농사일이든 뭐든 핑계만 생기면 명수의 집에 간 것도 사실은 명숙이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잠시 끊어졌던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찰에 입문한 뒤 다시 이 어졌다. 고향 친구들에게 “명수가 대구 산격동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 게 명숙이의 사연도 접했다. 명숙이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 하고 산업체 학교를 졸업한 뒤 섬유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명숙아, 드라이브 한번 하자!”

파출소 근무는 격일제였다. 비번 날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경산에 있던 섬유회사로 갔다. 근무를 서면서 있었던 일, 혹은 선배들에게 들었던 영웅담을 들려주면 눈을 반 짝이면서 들었다. 대화는 입으로 했지만 내밀한 마음의 언어는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어느 순간부터 만남이 뜸해졌다. 명숙이와 나의 문제는 아니었다. 형사계에 들어가 면서 쉬는 날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사건에 매달리다 보니 마음 편히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출근은 있으나 퇴근은 없는 시절이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명숙이와의 사이도 긴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명숙이 시집간단다.”

어느 날 뜬금없는 소식이 들여왔다. 집안 어른들이 하도 들볶아서 선을 보고 날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라고 했다. 가슴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 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인연이 아닌 거겠지 뭐.’

“이 자식, 내가 꼭 잡고 만다!”

사건이 터졌던 날, 명숙이는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는 바람에 아이들 학원비를 벌려고 오빠가 운영하던 노래방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했던 것이었다. 그날, 영업 시간이 끝났는데도 계속 놀겠다고 고집을 부리 는 손님 때문에 늦도록 문을 못 닫았다. 현장을 처음 발견한 것은 오빠였다. 으레 영업 을 마친 후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수입을 보고한 후 셔터를 내렸는데, 그날은 퇴 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전화가 없더라고 했다.   

피해자의 상태로 봐서는 분명히 초범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저지른 짓도 아니었다. 여러 갈래로 수사를 진행했으나 ‘치정’의 가능성은 제외시켰다. 명숙이가 치정에 얽 힐 사람은 결단코 아니었다. 

 

“이 자식, 내가 꼭 잡고 만다!”

이가 부드득 갈렸다. 범인은 명숙이의 원수였겠지만, 나 역시 그 놈의 칼에 젊은 시 절의 추억을 난도질당했다. 너무도 잡고 싶었지만, 범인은 땅속에 스며들기라도 한 것 처럼 도무지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겨졌다.

2010년 6월 즈음 명수에게 전화를 받았다. 조카가 전화를 걸어와 “경찰이 되기로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조카가 바로 명숙이의 아들이자 나에게 형사계에 들어갈 수 있게 힘써달라고 부탁한 친구였다. 그때 내 마음은 명숙이에 대한 사무치는 미안함 반, 아들에게 느낀 연민의 정이 반이었다. 

명숙이의 아들은 2012년 형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하는 서가 달랐기 때문에 평소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한번씩 주변 동료나 상관들에게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하나 같이 “열심히 한다”는 말을 전했다. 대견하면서도 측은했다. 명숙이의 사건은 ‘개구리 소년’처럼 사회적 관심이 크지도 않았고, 확실한 실마리도 없었다. 영원히 미제로 묻 힐 가능성이 컸다. 명숙이의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늘의 심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경찰 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2017년 봄, 나는 한국일보 김민규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퇴직을 일 년쯤 남겨 둔 즈음이었다. 퇴직을 앞둔 형사과장을 기획 시리즈로 취재하겠다면서 나를 찾아왔 다. 가제는 ‘4개 폭력조직을 와해시킨 형사계의 큰형님’이었다. 젊은 시절 미친 듯이 범인을 잡으러 쫓아다닌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놓았다. 마지막 질문이 그것이었다. 형 사로서 해결 못 한 사건, 혹은 가장 아픈 기억이 무엇인가. 그때 명숙이를 떠올렸다. 

“아들이 자기 엄마 죽인 범인 잡겠다고 경찰이 됐어. 지금 형사로 근무하고 있지.” 세월은 거짓말처럼 흘러 어느새 13년 장기 미제 사건이 되어 있었다. 기자는 “드라 마 같은 이야기”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정말 그놈 잡으면 꼭 우리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십시오. ‘하늘의 심판’이라 는 타이틀 달고 우리가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잡히면 정말 하늘의 심판이겠지. 사람의 힘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 을까.’

 

범인을 검거하러 가던 날, 아들은 팔공산을 돌며...

“과장님, DNA 검사 결과가 심상찮습니다. 그놈 같답니다!”

2017년 11월, 귀가 번쩍 뜨이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 게 손이 떨렸다.

보고에 따르면 명숙이의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 경찰서의 관할 지역에서 한 남자가 귀가 중인 여성을 둔기로 때린 후 손가방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터졌다. 경찰에서는 사건 현장 주변 CCTV를 분석하다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현장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길에 버리는 것을 확인했다. 즉시 현장에 달려가 담배꽁초 수십 개를 수 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분석 결과 그중 하나가 명숙이가 살해된 현장에 서 나온 DNA와 일치했다. 노래방 사건이 발생하는 당시에는 DNA 기술이 없었지만 피해자 옆에 떨어져 있던 담배꽁초에서 타액을 채취해 둔 것이 있어서 대조가 가능 했던 거였다. CCTV를 확인하고 현장에서 담배꽁초를 수거해온 형사가 바로 명숙이 의 아들이었다. 

“수사팀에서 빠지게.”

상부에서는 명숙이의 아들을 수사팀에서 제외시켰다. 범인과 마주칠 때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해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명숙이의 아들 은 그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오로지 그 한순간을 위해 그 긴 세월 칼을 갈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서자니 목구멍이 꽉 막히더라고 했 다. 선배와 동료들의 위로에 겨우 마음의 칼을 내려놓았다. 

동료들이 범인을 검거하러 가던 날, 그는 차를 타고 팔공산을 한 바퀴 돌았다. 제발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하기를, 동료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그 괴물을 잡아 경찰서로 끌고 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보도 기자 “경찰이 나를 고소해도 상관없습니다!”

“이건 하늘의 계십니다!”

‘아들이 엄마를 죽은 범인을 잡았다.’ 소문이 삽시간이 퍼졌다. 경찰은 아들의 정 체를 철저하게 덮었다. 비본질적인 부분에 관심이 쏟아질까봐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범인의 검거가 하늘의 심판이었듯, 그 심판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 또한 하 늘의 뜻이었다. 명숙이 사건을 소상하게 들었던 기자가 당장 기사를 작성했다. 위에 서는 기사를 막으려고 기자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지만 소용없었다. 동료들도 모르는 내용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기사 작성은 일사천리였다. 기자가 기사를 송고하 기 직전 전화를 걸어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죄를 짓고는 못 산다, 천벌이 있다는 계시 아니겠습니까. 경찰이 뭔 소리를 해도 우리는 ‘알리는 자’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경찰이 저를 고소해도 괜찮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의 말대로 이런 사건을 널리 알려서 죄를 지으 려는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혼자서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열망하던 범인 검거에 성공했지만, 그 렇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온 건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섭섭하고 섭섭한 일이었다. 남 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응어리가 풀어진다고 해서 이미 죽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의 미랴 싶었던 거였다. 명숙이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처연한 마음이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명숙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넋두리를 했다. 

“명숙아, 어쨌거나 이제 편히 쉬어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이 니 한을 풀어줬 으니 그나마 위안은 될 것 아니냐. 나도 이제 조금은 마음이 편하다. 부디 편히 쉬어 라, 내 동생 명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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