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천 고향엔 부친의 황계서실 대전 글방엔 아들의 궁고재…

작가의 집

  • 입력 2020.09.10 00:00
  • 수정 2020.11.13 16:20
  • 기자명 심지훈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는 저마다 자기 성(城)을 짓는다. 소설가셨던 아버지(황계 심형준·1949~2013) 역시 견고한 당신만의 성을 만드셨다. 그걸 본 우공 우한용(소설가·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은 “자네 부친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한 번 써보지”라고 어느 해 여름 권하셨다.

아버지 생전 작업실(황계서실·黃鷄書室)은 그 누구도 침범하기 힘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아버지는 온 벽을 교류 작가들의 작품들로 빽빽하게 둘러치셨다. 말년에는 솟대와 사랑에 빠져설랑은 솟대 연작시를 쓰시더니, 정은기(조각 가·영남대 교수) 선생님과 협업해 ‘시와 솟대전’을 열고, 크고 작은 솟대를 아버지 방에 들이셨다.

그런데도 황계서실은 전혀 혼란스럽다거나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안으로는 정교하고 꼼꼼하고 깔끔한 당신 성품을 황계서실로 보여주셨다. 밖으로는 평생 좁은 마당에 꽃과 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가꾸면서도 사시 사철 단정함을 유지했던 마당으로 성품을 보여주셨다.

아버지를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들이라 나도 언제인가부터 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서재만큼은 아내도, 아직은 세상물정 알 턱이 없는 아들 라온이도 침범을 할 수 없도록 아담하지만 튼튼한 나만의 성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성 쌓기는 2년 전 6월 난생처음 집을 산 뒤 시작됐다. 나는 이 집을 살 때, 주방이 아내가 쓰기 편한 집인지와 함께 누가 보더라도 서재가 ‘작가의 집답다’ 할 수 있는 곳인지를 그중 중히 따졌다.

주방에 넓은 광창이 있고 창 너머 시야가 훤히 트인 것을 확인하고는, 도심공원의 메타세쿼이아 숲이 내 전용 숲인 양 시원함을 주는 창가를 보고는 두 번 생각 않고 5억 원짜리 집을 덜컥 사버렸다. 내가 이전까지 고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내놓자 아내는 어안이 벙벙해하면서도 ‘계약금을 진짜 넣을지’ 묻지도 않고 쏴 버렸다. 맨 정신이었다면 또 의견 차를 놓고 씨름을 했으리라. 때론 상대를 몽매한 상태로 몰아 일을 매 조지는 것도 뾰족수겠다.

 집을 산 지 1년이 흘렀다. 1년은 참 빨리 흘러갔다.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마련하겠다는 틈이 잘 생기지 않았다. 채운것은 겨우 책들뿐이고, 늘린 것도 겨우 책들뿐이었다. 아버지가 서재를 ‘황계서실’ 이라 이름 지었듯 나도 내 서재에 걸맞은 이름을 짓기로 했다.

2년 전 7월 내 첫 시집 ‘문인송 가는 길’ 을 인쇄소 대흥사에서 싣고 온 날, 벼락같 이 지었다. 궁고재(窮考齋). 처음엔 궁리 재(窮理齋)로 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하는 지적 작업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다. 작가답게 작명했다. ‘궁리하고, 깊이 헤아려 결과물을 내겠다’는 작가 정신을 궁고재 이 석 자에 담은 것이다. 이제 물건을 채울 차례. 일찍부터 차 (茶)를 벗 삼아 드디어 옆에 두는가 싶었 지만, 물정 모르는 라온이가 용감무쌍하게 도자기로 덤벼들어 치워버렸다. 그것도 강화유리로 만들어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았던 공도배(간이 숙우)를 20개월도 안 된 라온이가 정확하게 던져 깨뜨린 직후 속전 속결로 찻짐을 싸버렸다.

헌데 세상에나! 2개월 더 자란 라온이가 뭘 좀 알긴 아는 게 아닌가. 다탁하려 산 소나무 떡판과 다탁에 어울리는 다판과 자사와 다구와 차 난로와 감상용 미니병풍과 보 이차와 이것들과 어울릴만한 기막힌 원목 화병과 소여물통을 두 달에 걸쳐 틈틈이 사 모은 뒤 궁고재 창가 옆 나무침대 위에 세팅하자, 우리 라온이가 아버지가 가라마라 하지도 않았는데 이전과 달리 나무침대에서 다섯 보 떨어진 자리에서 서서 “아뜨, 아 뜨”하며 다가가지 않는 게 아닌가. 참 신통방통한 녀석이로고. 참 기특한 녀석이로고. 이렇게 라온이가 도와준 덕분으로 작가의 집은 그럭저럭 큰 그림이 완성됐다. 이제 더 채울 것도, 더 채우고 싶은 마음도, 욕심도 없다. 나는 이제 쾌히 여명이 밝아오기 무섭게 득달같이 새벽에 일어난다.

일어나설랑은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로 ‘나를 두고 가려무나’의 가수 김동아 선생 노래 50곡 이어듣기를 재생시킨 후 차탁 앞에 앉아서는 그날 느낌 따라 자사(보이차 우 리는 다관)에 청차를 우렸다가 숙차를 우렸다가, 청차 중에서도 청향이 깊은 차를 우 렸다가, 장향이 깊은 차를 우렸다가, 청차인데 습을 주어 숙차 맛이 나는 청차를 우렸다가, 반발효차 대홍포를 우렸다가, 홍국차를 우렸다가, 이 차들 양을 많이 했다가 적게 했다가, 공도배에 따랐다가 뚜껑 없는 자사에 따랐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차놀음이란 놀음 삼매경에 빠져든다. 정말이지 나는 한시도 이 놀음을 늦출 수도 그만둘 수도 없다.

그 재미에 폭 빠져 있다가 시간이 되면 [보통 글밥]을 짓기도 하고, 대구서 보내 온 기사를 리라이팅하기도 하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신문을 넘겨보기도 하고, 손에 잡히는 책을 보기도 하고, 창 너머를 감상하다가 졸졸졸 흐르는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생각들 사이를 점핑하다가 돌연 사방이 막힌 우물을 만난 듯 갑갑증이 몰려오면 2,000권 되는 작은 도서관 궁고재 책장의 책들을 훑어 족집게 강사가 시험문제 찍어내듯 우물을 뚫어줄 딱 맞는 참고도서를 집어낸다. 오로지 궁고재 주인장- 심 보통만의 호사인 것이다.

(출처: 『심지훈 살이집-보통글밥』 pp286~289 수정)

 

[보통 글밥] 궁고재 개방(2020년 6월 15일자) 코로나·둘째 출산으로 미뤘지만 집 개방해 소통의 장으로 쓸 것

당초 계획은 이랬다. 대들보 두 개를 나란히 놓아 묶은 가로 250m·세로 40cm짜 리 다탁(찻상)을 우리집에 들이기로 했다. 지난해 그 진기한 물건을 보고 시점도 조율했다. 3.1독립만세운동 101주년을 기념하는 올 3월 1일 받기로 했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나는 단박에 125년 전 사발통문을 모의했던 전라도 글방 선생 전봉준을 떠올렸다. 이 정도 다탁이라면 20명은 능히 빙 둘러앉아 대의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탁을 들여 늦어도 5월엔 내 글방 궁고재(窮考齋)를 일 반에 개방, 본격적으로 손님을 들이고자 했다.

그러던 것이 하나의 복병과 하나의 경사로 결국 2주 전 무마됐다. 일단 코로나로 대 구서 대전으로 다탁을 옮겨오는 일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가져가 쓰라고 허락한 원주 인도 이제나저제나 대구 코로나가 숙지기만을 기다렸고, 다탁에 홀린 나는 5월 정도 엔 가져올 수 있으리라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둘째아이를 임신한 아내가 출산이 임박해오자 이 짐 저 짐, 이 계획 저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아뿔싸’ 싶었다. 이기적인 남편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동시에 아직 세상 빛을 보지 못한 둘째 ‘사랑이’에게도 미 안한 마음이 들었다.

라온이가 생후 24개월 무렵, 어른이 마구잡이로 던져도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 강 화유리로 된 간이숙우 ‘공도배’를 한 번 던져 깨뜨린 후 다구 일체를 서랍장으로 옮겨 두었다. 30개월 지나 말이 제법 통하기 시작한 올해 조금씩 꺼내놓았다. 다탁이 오면 본격적인 장을 펼칠 일만 남았다고 굳건히도 믿었었다.

(*숙우는 도자기 재질로 우린 찻물을 담는 그릇이다. 공도배는 숙우의 대체품으로 오랫동안 일본이 독점 공급하던 것을 최근엔 중국이 이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개당가격도 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 순망치한(脣亡齒寒) 식의 투정 대신 치망순역지(齒亡脣 亦支)의 지혜를 살려 쓰기로 했다. 다탁 대신 식탁을 사용하고, 딱 그만큼의 손님만 한 번에 받으면 될 일이겠다. 일단 6월에만 궁고재를 임시개방한다.

지난주엔 농림부 파견 온 농암(農巖) 조숙현 사무관이 다녀갔고, 다음 주엔 대구경 북 사회적경제 대부(大父) 정홍규 신부와 그의 애제자 온암(溫巖) 박철훈 선생이 다 녀갈 예정이다. 또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와 이학무 지사장의 방문도 예정돼 있다. 자유인이 된 곽대훈 전 국회의원께도 방문을 청해 뒀다.

나는 왜 궁고재를 개방하려는가. 누군가는 궁금해 할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집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어야 마땅하다. 현대인일수록 친구는 어떻게 하고 사 는지 보여주고, 서로 알 필요가 있다. 현대인의 불통 중 상당수는 그가 살아온 환경, 살아간 환경이 어떻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다고 나는 본다.

상대의 가풍을 알면 상대를 이해할 여지가 많아 불필요한 오해를 떨쳐버릴 수 있다. 무엇보다 평생을 지기지우로 살면서도 자기 집 한 번 공개하지 않고 하하호호 하는 건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건 겉껍데기하고만 살다가 가는 것과 같다.

부득이 라온엄마가 7월부터 출산·육아휴직에 들어가 임시개방으로 그치지만 궁고 재가 활짝 열리고 문전성시를 이룰 날을 나는 꿈꾼다. 전봉준이 봉오리 틔운 대동사 회란 꽃은 아직 반도 입을 벌리지 못했다. 개화는 당대와 후대의 몫이다. 궁고재에는 차향이 흐르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가 흘러넘칠 것이다.

(*‘사랑이’는 8월 23일 처서 아침 건강하게 태어났다. 남아, A형, 3.27㎏, 50㎝)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