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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훈이 만난 사람 조정래 감독 <귀향>흥행 그 후

  • 입력 2016.06.01 00:00
  • 수정 2016.06.13 15:42
  • 기자명 심지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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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할머니들께 진심으로 사죄하는 날까지 불러만 주시면 죽을 때까지 상영하고 만날래요"

비수기 개봉, 비상업 영화, 비관적 예상 깨고 8~10월까지 미,영,프,러 순회, 특강 쇄도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은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평가된다. 영화개봉 전부터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귀향>이었던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활화산 같은 감정이 <귀향>으로 용솟음 칠 지도 모른다는 예상도 사실 '딱 그러고 말'것이란 게 영화담당기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대단한 관심과 감정에도 <귀향>은 이내 스크린을 내리고 말 것이란 비관적 견해가 우세햇던 것이다. 심지어 <귀향>후원자들을 위한 블라인드 시사회에도 "그래, 우리야 그 의미를 아니까 후원을 하고, 관심을 갖지만 일반관객들도 호응할까는 미지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귀향>은 애당초 ‘덜’ 상업적 영화(세상에 비상업적 영화란 없다)였다. 덜 상업적이었기에 돈이 되는 영화에만 투자하는 셈 빠른 투자자는 <귀향>을 거덜떠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우리 국민들이 ‘일본’하면 이를 간다지만, 굳이 영화감독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귀향>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성토는 영화가 아니더라도 대체로 적절하게 그러나 이상한 국면에서 시시때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개봉시점(2016년 2월 16일)도 <귀향>의 성공여부에 의구심을 보탰다. 7~8월이 광고시장의 비수기이듯, 2월은 영화시장의 비수기이기 때문이다.

누적관객 3,585,756명(2016년 5월 20일 현재), 상영횟수 9만 1,000여 회. (후원자수 75,270명)
<귀향>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 기적은 누가 만들었나. 관객이 만들었다.관객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후원자’라는 특별관객이 있다. <귀향>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금(크라우드펀딩)으로 만들어졌다. 그걸 도모하고 주도한 건 <귀향>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감독 조정래(42)다. 조 감독은 대한민국 영화판에서 <귀향> 이전에도 ‘좀 다른’ 감독이었다. 중앙대 영화과를 나와 단편영화 <종기>(2000)로 영화감독이 됐지만, 판소리 고수(鼓手)로 더 잘 알려졌고 그 때문에 그가 아직도 국악과 출신의 이색경력의 영화감독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데 <귀향> 이후, 그는 ‘확실히 다른’ 감독이 됐다. “(귀향을 만든다는 건) 미친 짓”이라는 진심어린 충고에도 14년을 뚝심 있게 만들었고, 대한민국 영화흥행 방정식상 있을 수 없는 풀이법을 출현시킴으로써 일약 (좀은 과장될 수도 있지만) 세계적 감독으로 부상했다

6개월 만인(엠플러스한국 12월호 ‘심지훈이 만난 사람-영화감독 조정래’ 참고) 지난달 19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전화인터뷰를 가졌는데, 이 시간도 겨우 잡았다. 그의 삶은 <귀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엄청 다른(=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월 개봉 이후, 지금까지 주말도 없이 하루에 2~3개의 특강, 관객과의 대화를 소화하고 있다. 영화관에선 관객의 쇄도로 스크린 수가 늘어갈 때, 영화관 밖에선 조 감독을 초청해 <귀향> 이야기를 별도로 들어보는 시간도 동시에 늘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19일 오늘 현재, 영화관 스크린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조 감독과 시민들 간 만남 수는 여전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날도 막 고려대 교수와 학생을 상대로 특강을 마친 뒤라고 했다.

 

특강은 어떻게 진행하나요.
“제가 특강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불러주시는 곳이 많으니,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사전에 <귀향>에 대한 질문을 많이 요구해요.”

현장에선 어떤 질문들이 나오나요.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 뭐가 힘들었나. 배우와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오세요.”

관객들이 뽑은 베스트 샷은 뭐고, 조 감독이 생각하는 베스트 샷은 뭔가요.
“관객들은 소녀들이 모여서 가시리를 부를 때 감정선이 무너졌다고 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소녀(주인공)가 살아서 돌아오는 장면을 꼽죠. 이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영(靈) 앞에 그렇게라도 따뜻한 밥 한술 대접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만들었죠.”

흥행을 예상했나요.
“1주일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봤어요. 1주일을 버티면 대박이 나는 거고, 못 버티면 그대로 잊혀지는 것이고. 중간은 없다고 봤지요.”

흥행요인이 뭐라고 보나요.
“글쎄요. 안 그래도 영화평론가 분들도 그걸 분석하시느라 애를 많이 쓰시는 것 같더라고요.”

기자가 다음 질문을 이어가자, 조근조근했던 조 감독은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기자는 조 감독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었으나, 흥행요인을 나름대로 찾아보자는 의도에서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귀향>은 개봉 전부터 뜨거운 감자였지요. 위안부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림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볼 의무’를 갖게 했고, 애국심 적개심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 주된 요인 아니었을까요? 그 ‘볼 의무’의 장막이 씌어지지 않았다면 <귀향>은 실패했을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말씀은 제 귀에 좀 불편하게 들리네요. 말씀대로라면 국민들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봤다는 것인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영화를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는 관객 개개인이 판단할 몫이고, 제 말은 그것과 무관하게 ‘크라우드펀딩’ ‘14년간 제작’ ‘위안부’ ‘비상업 영화’ 같은 키워드가 국민들에게는 일종의 콩깍지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만으로 흥행요인을 설명하는 건 부족한 것 같아요. 개봉 초에는 예약만 하고 실제로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은 후원자 분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큰 기대하지 않고 영화를 보러 온 일반관객 분들이 지인들에게 추천을 하고,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스크린 수가 300개에서 500개로, 600개로 늘어갔죠. 4월 12일부터 IPTV에도 <귀향>이 상영됐는데, 1만원이에요. 며칠 동안 1위를 지켰죠. 1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닌데 말이죠. 또 불법다운로드 사이트에서도 상위권을 오랫동안 유지했어요. <귀향>이 상업 지향이 아닌데다, 비수기에 개봉했고, 기자 분들 후원자 분들 시사평론가 분들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던 점 등을 미뤄보면 저도 어떻게 왜 흥행을 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귀향>을 사랑해주신 관객 분들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해외 반응은 어떤가요.
“우리 국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개봉일에 맞춰 강일출(87) 할머니와 이옥선(94) 할머니를 모시고 미국을 다녀왔어요. ‘나눔의 집’ 지부 초청으로 가서 할머니들의 전시회도 갖고, 예일대 초청도 받아 할머니들의 위안부 증언도 들려주고, 영화 얘기도 나눴죠. 모두들 충격적이라고 하죠.”

해외에서도 특강요청이 오나요.
“네. 8~10월말까지는 미국 영국 중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를 순회하게 되요.”

영화자막이 준비됐나요.
“네. 사전에 6개 국어 자막도 준비해 뒀죠. 위안부 문제는 세계적인 이슈니까요. 국내 반응을 차치하고 준비해 뒀죠.”

감독이 추구한 <귀향>의 궁극적 목표가 뭐였죠.
“문화적 증거가 되도록 하는 거였어요. 교조적으로 위안부를 알려주면 얼마나 알려고 들겠어요. 문화적으로 접근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아가겠죠. 그러면 궁극적으로 일본의 진정한 사죄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특강이나 관객과의 대화 때도 <귀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하자고 독려하죠.”

<귀향>이 너무 확장되면 차기작은 어떻게 추진하나요. 준비중인 차기작은요.
“‘<귀향> 14년의 기록’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올 연말 완성이 목표죠.”

이러다 <귀향>에만 붙들려 살아가는 게 아닌가요.
“(웃음) 불러주시면 죽을 때까지 상영하고 만나야죠. 그러기 위해 만든 것이고요. 그렇다고 차기작이 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고요.”

위안부 할머니들은 영화 성공한 거 보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고맙다. 애썼다.”

끝으로 대구 관객들에게 한 마디 하시죠.
“대구에는 이옥선 할머니가 계세요. 동성아트홀에서 관객들과 만남을 가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해서 증언해 주시는데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시는 대구 관객께도 감사드리고요. 안타깝게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빠르게 줄고 있어요.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할 텐데….”

지난달 17일 ‘나눔의 집’에는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이수단 할머니가 한날 저 세상으로 나비가 되어 떠나갔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들은 42명(국내 40명, 국외 2명)만이 생존해 있다. 할머니들은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sim@hankookilbo.com
사진=제이오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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