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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교, 같은 반, 시대를 대표하는 두 미남이 나온 학교는?

가요따라가요

  • 입력 2019.02.16 00:00
  • 수정 2020.11.12 16:45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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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미인의 도시? 훈남의 도시...

대구는 ‘미인의 도시’다. 동시에 훈남의 도시이기도 하다.

대구를 대표하는 두 명의 훈남에 대한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나이가 같다. 게다가 고등학교 동창이다. 한때 대구 경북을 대표하는 명문이었던 경북고등학교 출신이다. 공부면 공부, 외모면 외모,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재원들이 수두룩했던 셈이다.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가수 손시향이다. 수려한 외모 때문에 별명이 많았다. 한국의 ‘팻분’, 혹은 한국의 ‘이브 몽땅’으로 불렸다. ‘마카오 신사’란 별명도 있었다. 하얀 정장에 백구두를 주로 신고 다닌 때문이라고 한다. 

대표곡이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등이다. ‘이별의 종착역’은 김현식이 리메이크를 하기도 했다. 

손시향은 어린 시절 집에 피아노가 있었을 만큼 부자였다. 형제들도 모두 외모가 출중했다. 특히 여동생은 1960년 미스코리아에 나와서 1등을 했다. 손미희자씨다.

손시향은 중앙국민학교와 경북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대 농대로 진학했 다. 서울대를 다니다 모 방송국에서 개최한 ‘노래경연대회’에 입선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1958년에 ‘검은 장갑’이라는 곡을 발표했다. 수려한 외모와 미성 덕분에 이 노래는 단숨에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그의 최대 히트곡인 ‘이별의 종착역’은 영화 주제가였다. 최무룡, 김승호 선생이 주 연을 맡았다. 영화가 히트하면서 주제가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검은 장갑’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이야기가 재밌다. 1958년 1월이었는데,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방송을 마치고 찻집에서 전속 가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일상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짜 예술이다.” 

지나치게 돈 되는 쪽으로만 생각을 몰아가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 다가 앞자리에 앉은 여자가수 검은 장갑을 끼고 있는 걸 보고 “이 장갑도 노래의 소재 가 될 수 있는 거야!”하고 예 들었다.

불과 몇 분 뒤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큰소리를 쳐놓은 만큼 검은 장갑으로 반드시 노래를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오선지에 ‘검은 장갑’이라는 제목만 크게 써놓고 끙끙대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들어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연애 시절 이야기로 노래를 만드려구요?”

아내가 뜻밖의 힌트를 줬다. 아내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추억의 책장을 뒤적거렸다. 문득, 알토란 같은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지금은 아내가 된 애인을 집으로 데려다줄 때 장갑을 낀 손을 꼭 잡고 걸었던 기억. 손 선생은 아내에게 천연덕스럽게 “그걸 어떻게 알았어?”하고는 그날의 기억을 바탕으로 가사를 써내려 갔다. 그 곡이 바로 손 시향이 부른 ‘검은 장갑’이다.

‘검은 장갑’이 히트하고 나자 나중에는 ‘검은 스타킹’도 쓴다. 한국 가요사에 ‘검은’ 시리즈가 탄생할 뻔했다.

미 언론 ‘통제할 수 없는 위대한 매력이 담긴 노래!’

손시향 선생은 인기가 한창이던 1960년,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에미로 갔다. 거기서 도 가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Lee Shon(리 손)’이란 이름으로 독집을 내놓았다. 거기에 12곡을 실었는데, 현지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당시 지역 신문에 이런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한국 가수 리 손의 흥미로운 목소리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

‘새로운 발견’

‘뛰어난 바리톤 음색’

달라스 타임스 헤럴드라는 신문이 가장 파격적인 평을 실었다.

‘통제할 수 없는 위대한 매력이 담긴 노래다!’ 

손시향 개인에 대한 평가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당시 미국 평론가들도 잘 몰랐 겠지만) 한국인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증명한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겠지만) 한국인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증명한 사례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2014년에 하버드대 니콜라스 하크니스 교수가 책을 한 권 냈다. 큰제목이 <서울 의 노래>였다. 그는 이 책으로 미국 인류학협회가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인 에드워 드 새피어 상을 수상했다. 책 내용 중에 ‘한국인이 노래 잘하는 이유’라는 대목이 있 다. 그가 꼽은 첫 번째 이유는 ‘타고 났다’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음악교사 출신 병 사인 스튜어트 링이라는 사람은 “한국엔 어딜 가나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을 가진 사 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데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고백을 남겼다. 

손시향에 자존심 구긴 그 사나이 ‘나도 한 얼굴 하거든!’

두 번째 대구 미남은 손시향과 고등학교 동기였다. 이 사람은 손 선생과는 달리 조금 굴곡이 있었다. 공부는 잘했지만 집안에 우환이 닥치는 바람에 재수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다. 서울에서 빈둥대다가 석 달 정도 호떡 장사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손시향을 만났다. 충무로에서였다. 중부경찰서에서 미도파백화점 쪽으로 ‘마카오 신사’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 었던 고향 친구를 물설고 낯선 서울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용호야!” 

손시향의 본명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불렀지만 손시향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 깨만 툭툭, 치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때 그의 친구는 너무 화가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넌 노래 잘해서 가수 됐지? 나도 얼굴로 따지면 너보다 못하지 않다. 뭘 해서든 너 보다는 잘 나갈 거다!’

그렇게 결심하고 고개를 드는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했다. ‘한국배우전문학원’. 그가 선 곳이 마침 충무로였으니 배우 학원 간판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 을 것이다.

그렇게 연기 학원에 들어가서 영화배우 수업을 받았고, 얼마 뒤 3천38대 1의 경쟁률 을 뚫고 주연 배우로 영화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예명도 하나 얻었다.

‘신성일’

그렇게 고등학교 같은 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이 둘이나 탄생한 것이었다.

아쉬운 건, 손시향이 너무 일찍 국내 연예계를 떠나버린 것이다. 좀 더 활동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손시향, 신성일 두 동기 덕분에 대구가 미남의 도시로 완전히 명성을 굳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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