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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농업 기술의 메카 선산 - ‘인재의 고향’, 길재의 힘만은 아니었다(3)

길과 사람들

  • 입력 2019.07.24 00:00
  • 수정 2020.11.12 11:29
  • 기자명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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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는 2018년 세계 3대 인명사전 중의 하나인 마르퀴스 후즈 후로부터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 펴낸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 중심 이동-영남농법과 한국형 지역개발’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역사 부문 최우수 학술도서에 뽑혔다.

1) 선산; 세종 대 테크노크라트들의 산실

앞서 조선 개국 이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이로 인해 국가가 권농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세종 대 권농정책의 추진 과정, 선산 출신 관료들의 역할, 그리고 이들의 정치적·사상적 지향을 살펴보도록 한다.

지난번호에서 태종이 권농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 농서를 저본으로 이두를 활용하여 가독성을 높인 『농서집요(農書輯要)』(1417)를 편찬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반면 세종은 당시 조선의 농업 현장에서 사용되던 기술들을 채록하여 출간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1429년(세종 11) 5월 이 조 참판 정초(鄭招)의 책임 아래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농서가 간행되었다. 한국 역사상 우리나라의 농업기술을 채록하여 소개한 최초의 농서라 평가받는 그 농서였다.

이 농서에서 주목되는 기술은 상경농법과 벼농사의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이었다. 지난번에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기술은 휴경(休耕) 농법·한전(旱田) 농업이라는 조방(粗放) 농법 단계에서 집약(集約) 농법 단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과도기적 농업기술이었다. 이 두 기술의 최종 목표는 농 업생산성 향상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이 원래 벼농사 부적합 지대라는 점에서, 벼농사 확대에는 많은 난 관이 존재했다.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몬순기후지대에 속한 탓에 6월 중·하순까지도 건기(乾期)가 지 속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친수성(親水性) 작물인 벼의 생장을 위해서는 생육 시기에 농업용수의 안정적인 확보가 필수였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수전농업은 수리시설의 확보 노력과 더불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저수지를 대대적으로 축조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오랜 밭농사 관행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은 이 사업에 부정적이었고, 태종 사후 폐기되었다. 부왕보다 더 과감하게 권농정책을 밀어붙인 세종은 다른 방식으로 수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의 벼농사 현장에서 실제 활용되던 수차(水車)의 제작 및 보급이 그것이었다. 세종은 이와 관련한 좀 더 생생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1428년(세종 10) 12월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대사성 박서생(朴瑞生; 1371~)을 정사(正使)로 하는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 12월 귀국하여 세종에게 복명했다. 세종은 통신사의 보고서를 토대로 이듬해부터 수차 제작과 설치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이 사업의 총괄책임은 통신사로 일본 현장을 직접 관찰했던 박서생에게 돌아갔다. 이 사업은 1435년(세종 17)까지 6년 동안 국가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추진되었지만, 그 성과가 크지는 않았다. 일본 수차가 한국 지형에 맞지 않는다는 점, 그리하여 실제 농사 현장에서 큰 효과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세종의 수리시설 관련 야심찬 프로젝트 또한 6년 만에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런데 『농사직설』의 편찬과 수차 제작의 책임자가 정초와 박서생이라는 점이 각별히 주목된다. 두 사람은 모두 선산 출신으로 일찍이 높은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를 역임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세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관료 였다. 142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통신사를 수행했던 김극유(金克柔)도 선산 속현인 해평 출신으로, 1402년 과거에 오른 관료였다. 그런 점에서 박서생, 김극유, 정초는 동향의 동년배로서 같은 시기에 관직 생활을 수행한 동료였다. 박서생은 1419년 길재 사후 ‘야은 행장(冶隱行狀)’을 쓸 정도로 ‘야은학파’ 내에서 수제자로 알려진 인물이고, 김극유도 길재의 제자였다. 이런 사실을 유추해 보면, 정초도 길재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여겨진다.

권농정책 추진 과정에서 선산 출신 관료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1444년(세종 26) 윤7월 세종이 지방관에게 하달한 교서, 곧 세종의 ‘권농교서(勸農敎書)’에서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교서 작성자는 하위지(河緯地; 1412~1456)였다. 그는 선산 영봉리 출신으로 문과에서 장원한 데다가 집현전 학사를 거친 당대 재원이었다. 선산 영봉리 출신, 과거의 높은 성적, 집현전 학사라는 점에서 그는 박서생, 정초와 닮은꼴이었다.

사실상 박서생과 정초는 오래 전부터 하위지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1402년(태종 2) 문과에서 부장원을 한 하담(河澹)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박서생은 1401년, 하담은 1402년, 정초는 1405년 문과에 각각 합격했다. 하담은 정초와 같은 마을인 영봉리 출신이자 길재의 제자 김극유와는 동방(同榜) 급제한 동년(同年)이었다. 하위지도 박서생, 정초, 김극유를 비롯한 부친의 친구를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을 총애했던 세종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교서 작성 책임을 하위지에게 맡긴 것은 정초와 박서생에게 권농정책의 중책을 위임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주요 권농정책의 중책을 선산 출신의 관료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당시 선산이 전국 최고 수준의 농업기술을 보유한 지역이라는 점, 세종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농사직설』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상경농법과 벼농사 기술이 선산에서 실행되던, 곧 ‘선산 농법’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세종은 평소 전국 최고 수준의 ‘선산 농법’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이곳의 선진 기술들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농사직설』의 편찬, 수차의 제작 및 보급, ‘권농교서’의 작성 등, 세종 대 주요 권농정책들이 모두 선산 출신 관료의 손을 거친 것은 이런 이유였다. 이들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로 평가받는 ‘영릉성세(英陵 盛世)’, 곧 ‘세종 치세(治世; 1418~1450)’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선산은 바로 ‘영릉성세’의 산실이었다.

2) 절의파(節義派)의 고향

선산 출신 지식인이나 관료들은 당시 지식인사회에서 풍미하던 사조나 학문적 경향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었다. 이 지역 출신들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생활이나 각종 의례에서 성리학을 실천하는 이들이 많았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은 성리학이 아닌 여타의 유학 사조나 종교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강하게 배척하고,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성인(聖人)이 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서 ‘영릉성세’의 주인공인 선산 출신의 지식인과 관료들은 그들의 스승 길재(吉再)와 조우하게 된다.

길재는 “고금의 예를 실천하고 자신의 포부대로 살아가는 지식인이 세상에 나와 처세할 때는 군주에 게 충성하고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충심(忠心)과 단심(丹心)은 제자들에게 은연중에 흘러들었고, 그들은 스승의 유지를 계승했다. 그리하여 정변이 발발했을 때 이들은 스승을 본받아 옛 군주에게 충성하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강단을 보였다. 1453년( 단종 원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발했을 때 그러했다.

‘계유정난’은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14살의 어린 군주를 축출하고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쿠데타였다. 이 과정에서 어린 군왕을 보위하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같은 대신이 살해되 고, 그와 더불어 권력을 다퉜던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같은 형제들이 귀향가고 또 살해당했다. ‘계유정난’은 1390년 2차 ‘왕자의 난’ 이후 64년 만에 맞는 일대 정변이었다

이 사태를 접한 수많은 관료와 지식인들은 경악했지만 체념한 채 현실을 받아들였다. 세종과 문종(文宗)이 애정을 갖고 양성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사들도 새로운 권력자 편에 줄을 댔다. 그렇지만 소수의 학사들은 이런 현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이들은 1445년 어린 군왕이 폐위되고 수양대군이 세조(世祖)로 즉위하자, 곧바로 단종(端宗) 복위 운동에 돌입했다. 1456년 ‘사육신(死六臣) 사건’과 1457년 ‘금성대군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를 비롯한 관료들이 목숨을 잃었고, 금성대군과 함께 거사를 모의한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도 살해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5년 동안 정변이 이어지고 관료들에 대한 정부의 감시,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관료들도 적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등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 그들이었다.

이 무렵 구왕(舊王)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절의를 위해 몸을 바친 이들 가운데 선산 출신이나 길재 제자들이 유독 많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육신 하위지와 생육신 이맹전은 선산 사람이고, 영천 출신 이 보흠은 길재의 제자였다. 왕조 교체라는 ‘정변’ 상황에서 절의를 지키고자 은둔에 들어간 스승 길재의 정치적 지향과 궤를 같이 하는 행동이었다. 여기에서 선산과 ‘야은학파(冶隱學派)’는 성리학의 추종 세력, 절의적(節義的) 기질을 가진 지식인과 동일시된다.

훗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길재의 사 상과 정치 신념을 전파하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고, 이런 사상과 신념을 공유하는 세력을 모아 ‘경상도당(慶尙道黨)’이라는 정치 결사체를 만들었다.

45세 때인 1476년(성종 7), 성종의 배려로 선산 부사에 부임한 그는 길재의 제자인 이맹전, 정중건(鄭仲虔) 등을 방문하고, 손자 길인종(吉仁種)을 만났다. 이들로부터 ‘야은학’과 ‘야은학파’의 은밀한 얘기를 전해들은 그는 이후 정치적 신념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 나갔다. 그의 이와 같은 노력 덕택에 길재는 조선 성리학의 비조로서, 그의 고향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로서, 그를 비롯한 제자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한 절의파(節義派)로서, 그리고 성리학을 실행에 옮긴 성리학자의 전형이라는 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렇듯 15세기 전반 선산은 혁신사상과 실용 지식, 성리학과 절의 정신이 한데 버무려져 에너지로 분출된 도가니 같은 곳이었다. 에너지의 내적 함축과 외부로의 발산이 이뤄지는 가운데, 이곳 출신 관료 학자들은 ‘영릉성세’의 주역이자 ‘계유정난’ 이후 절의파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다. 다음 호에서는 선산의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게 한 ‘영남대로’의 부설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파급 효과를 살펴볼 예정이다.

<참고문헌>

김성우, 〈15세기 중,후반~16세기 도학운동의 전개와 송당학파의 활동〉, 《역사학보》202, 2009.

김성우, 〈수전농업의 발달과 경상도의 위상〉,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 중심 이동》, 태학사, 2012.

김성우, 〈15~16세기 선산-김천 지역 유학자들의 교류와 조선 성리학의 전개>, 《지방사와 지방문화》18-1, 2015.

이태진, 〈세종 대의 농업기술 정책〉·〈세종 대의 천문 연구와 농업정책〉, 《조선유교 사회사론》,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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