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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 한길 30년 9) 석호 김동영 서예가

  • 입력 2019.07.01 00:00
  • 수정 2022.02.23 10:09
  • 기자명 김윤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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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800자 이상 쓰고 썼다 왕희지·구양순 … 다 불러 ‘희롱’

“나는 겨우 쓴다.” 소설가 김훈이 최근 낸 산문집의 손글씨 표사다. 뭉툭한 연필로 꾹꾹 눌러 썼 다. 짧은 문장에서도 땀내 같은 글쓰기의 고투가 풍긴다. 중국인이 사랑하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글씨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하다. 혁명가의 또 다른 풍모를 엿본다. 추사(秋史 김정 희, 1786~1856)의 붓은 그를 총애한 스승 청나라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경지를 넘어섰다. 스승은 손자뻘 제자에게 청대의 귀한 서책을 바리바리 보내줬다.

필치에서는 사람이 느껴진다.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 필치는 뜻이 두 가 지다. ‘글의 내용에서 우러나는 맛’과 ‘글씨 자체의 기세’. 컴퓨터, 노트북, 휴대폰 등의 자판을 두 드리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필치의 두 번째 뜻은 사라져간다. 이에 대한 반작용일까. 캘리그 래피가 유행처럼 번졌다. 오늘날 서예는 이처럼 사라져가는 필치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 미를 갖는다.

 

서예 이력 59년의 ‘필치 인연’ 서예가 석호(石湖) 김동영(83) 선생. 그의 59년 서예 이력은 온통 ‘필치 인연’이다. 또한 그의 서 예 인생에는 이 땅의 생활사, 문화사 몇몇 대목들이 담겨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필경과 문건·책 자 작성, 인쇄 등에 관한 장면들이다.

그는 대한민국서예대전과 대구시서예대전, 경상북도서예대전, 영남서예대전의 초대작가·심사 위원을 맡아 서예인으로서 영예를 두루 누렸다. 30여 년 전 ‘국전’으로 흔히 불렸던 대한민국미 술대전의 서예부문 초대작가가 된다는 것은 서예인으로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일에 비유되기 도 한다

그는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첫 발령지는 경북도청 건축과. 공직생활 틈틈이 서예 에 정진했다. 공직과 서예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975년 대구시서예대전 대상, 1976 년 대구시서예대전 최우수상을 받았고 드디어 1981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특선에 올랐다. 1981~1983년 대구시서예대전에서 연3회 특선에 오르기도 했다. 서라벌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등에서도 대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1984년 정년퇴임 후 달서구 송현동에 석호서예원을 열어 서 예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고향은 의성 단북. 한의원을 하던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기도 했다. 그는 다섯 살 때부 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집집마다 누에를 키우던 시절이었고, 종이가 귀했던 시절이었 다. 누에를 키우는 채반 자리 밑에 까는 누에자리종이(잠좌지)가 그의 연습장이었다. 종이는 누 에의 배설물로 얼룩졌고, 그 얼룩이 새카매지도록 아이는 먹으로 천자문을 쓰고 또 썼다. 그러면 서 마을 형들이 글 읽는 소리를 흉내 냈다.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한편으로 재미 있는 놀이였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한약을 지어 봉지에 쌌다. 약첩 묶음 꾸러미에는 약을 복용할 주인의 이 름과 탕재 이름을 붓으로 쓰기도 했고 서찰을 반드시 동봉했다. 그는 그런 할아버지를 늘 보고 자 랐다. 그런 할아버지가 보기 좋았다. 어린 그는 할아버지 곁에 앉아 할아버지가 쓰는 한자 이름들 을 따라 썼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칭찬했다. 시키지도 않은 묵필 놀이에 열 중인 어린 손자를 할아버지는 무척 기특해 했다

약첩 꾸러미가 완성되면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불렀다. 어느 동네, 어느 어르신을 찾아가 서찰 과 약첩 꾸러미를 갖다 주라고 시켰다. 그가 좀 더 자라 아버지 대신 해낸 일이기도 했다. 학교 갔다 오면 소 먹이러 가랴, 밭 매러 가랴 바쁜 그에게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 번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하 지 않았다.

대학 시절부터 필경 아르바이트 그는 학창시절부터 필체가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의 필체는 담당교수의 눈 에 띄었다. 당시는 유인물·교재의 제작 방법이 지금과는 아주 달랐다.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쓴 후 등사해 책으로 묶거나 낱장으로 사용했다. 모든 문서와 책자를 필경으로 만들던 때였다. 이 땅 근현대의 생활사·문화사의 장면들이다.<앞면 미니박스 참조> “본격적으로 서예를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이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2학년 때 대학 교재실에서 필 경(筆耕)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교재실 주임교수님이 제가 책자의 본문만 아니라 책 표지 제목 까지 쓰면 좋겠다면서 유명한 서예가 선생님에게 사사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그 후로 붓을 놓지 않았네요.”

필체가 좋아 교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주임교수의 눈에 띄어 서예 대가에 사사하는 기회까지 얻을 만큼 그의 필체는 남달랐고 이것이 그가 본격적으로 서예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됐다. 그가 사사한 서예가는 석재 서병오, 죽농 서동균 선생의 필맥을 이은 왕철 이동규 선생이었다. 왕철 선생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사사하며 스승으로 모셨다. 침산초등 교장을 지낸 선생은 국전과 시전 특 선 서예가로 구양순체와 육조체의 대가였다. 특히 구양순체는 선생이 정진하여 갈고 닦은 서체였다.

구양순체 ‘배세’와 안진경체 ‘앙세’ 구양순체는 서예의 바탕 중의 바탕이다. 엄정하여 쓸 때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면 글씨가 흐트러진 다. 서로 마주 보는 두 획이 안쪽으로 휘는 배세(背勢)가 특징이다. 자획의 등이 안으로 굽는 모양이다. “구양순체는 서예의 바탕이지만 강건·정연·명쾌하기가 면도날로 베고 도끼로 찍는 듯하다고 하죠. 까 탈스럽다고 할까요.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맛을 살려 제대로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서체가 좋아서 다른 서안을 버린다고 할 만큼 매력적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꼭 가르쳐야 할 구양순체를 가르치는 서예원은 많지 않다. 스승으로부터 구양순체를 제대로 전수 한 그는 석호서예원에서는 오랫동안 구양순체를 가르쳐왔다. 당나라 중기인 650~700년 무렵 구양순보다 마흔 살 정도 적은 안진경은 ‘구양순을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고 한탄하면 서 운필 웅장한 안진경체를 개척했다. 안진경체는 구양순체 와는 반대로 바깥쪽으로 휘어 포옹하듯 하는 앙세(仰勢)다. 구양순도 안진경도 300~400년 전 왕희지의 법첩(法帖. 역 대 명인의 글씨를 모아서 돌이나 나무판에 새겨 탁본을 뜨고 인쇄한 것. 후대의 자습용·감상용으로 쓰인다)을 닳도록 공 부한 제자들이다.

스승상 당하자 상복입고 탈상까지 대학생인 그를 본격적인 서예의 세계로 이끌어준 왕철 선 생은 그의 초등학교 은사이기도 했다. 그가 단북초등 3학년 일 때 선생이 전근 와서 교직생활을 했던 것. 담임선생-학생 이 아니어서 그때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서 예의 은사로 옛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된 인연이 그는 놀랍 고 고마웠다. 군사부일체. 그는 은사를 서예의 스승만이 아니라 부모처 럼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는 명정(銘 旌)을 써 올렸다. 그리고 자녀들과 똑같이 두건 위에 쓰개를 쓰고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타지생활을 하거나 직 장생활을 해온 자녀들로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동료·지인 들을 잘 알지 못했다. 스승의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아 는 그가 이들을 안내했다.

조문 온 서예인들은 스승 상을 당해 자녀들과 똑같이 상복 을 입은 제자에게 ‘고맙다’, ‘아름답다’, ‘고인이 부럽다’는 인사를 셀 수 없이 했다. 어떤 서예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지역 언론 이 ‘아름다운 사제 간의 모습’을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100일 탈상 까지 자녀들과 같이 했다. 서예인들 역시 대부분 노후를 외롭게 산다. 그래서 그의 상복이 더 고마웠을 것이다. 앞서 그는 노후의 은사가 외로울까봐 근무 지를 은사의 거처인 대구로 옮겨 더 자주 찾아뵙고 있었다. “요즘 서예원(서실)들이 추사체를 잘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 니다. 구양순체, 안진경체 정도에서 그치고 맙니다. 지금 흔히 접하는 추사 의 글씨는 대부분 추사 말년 성숙기의 작품입니다. 육조, 당, 송, 청의 서법을 두루 섭렵하고 통합해 펼친 추사의 서체는 아무나 쉽게 따라할 수는 없죠. 서법에 해박하고 열정 넘치는 후학들이 추사체를 더욱 알뜰히 밝혀내고 이 어가기를 바랍니다. 풋감을 거치지 않고는 홍시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홍시이거나 어느 날 갑자기 홍시인 것은 없습니다. 서예는 오랜 인고의 시간 을 거쳐야 빛과 맛을 내는 감과 같습니다.”

서예의 실상은 반복…자신과의 싸움 “서예의 실상은 반복입니다. 흔히 임서(臨書)라고 하는데 형임(形臨)과 배임(背臨)이 있어요. 형임은 글씨본을 보면서 최대한 글씨를 그대로 베껴 쓰는 거죠. 수많은 반복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면 배임으로 넘어갑 니다. 배임은 글씨본을 보고서 그 뒷면에다 최대한 그대로 쓰는 겁니다. 보 이는 그대로 베껴 쓰는 형임과는 한 차원 높은 거죠. 뒷면에 써야 하니까 앞 면의 글씨본을 기억하고 되살려내어 쓰는 겁니다. 법첩을 배임이 될 정도로 쓸 수 있다면 연습이 어느 정도 된 것이라 하겠죠.”

“옛 선비들도 사서삼경을 한 번에 읽고 터득하지는 못했습니다. 벽에다 주 판을 걸어놓고 한 번 독파할 때마다 주판알을 옮겼습니다. 옛 주판의 크기 에 따라 주판알 개수가 다르지만 91~102개 정도예요. 100번 정도는 독파하 겠다는 각오로 주판을 걸었겠죠. 논어가 8만~9만 자니까 100번이면 800 만~900만 자. 900만 자를 읽어서 한 권을 떼는 거죠. 서예도 다르지 않습 니다.”

“형임과 배임을 포함해서 하루 최소 800자 이상을 날마다 썼습니다. 최소 가 800자이고 수천 자를 쓴 날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대부분의 글씨본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요. 외워버린 거죠.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 는데, 서예만한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까 싶어요. 그 문턱을 넘어 들어선 사 람에게는 왕희지와 구양순, 안진경조차 희롱할 수 있는 진경이 열립니다.”

서예는 당신의 표정, 자기표현법 “서예 초보자에게 권하고 싶은 글씨본이라면, 안진경의 쌍학명(雙鶴銘) 과 근례비(勤禮碑)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쌍학명은 중국의 초등학생 서 예 입문서입니다. 쌍학 한 쌍을 키우는 얘기인데 100자쯤 됩니다. 이야기 속 에서 자연스레 서법을 익힐 수 있습니다. 근례비는 글의 내용보다 서체의 기 세와 기운을 느끼며 서법을 익힐 수 있어 좋습니다.” 1996년부터 23년째 매 주 의성문화원과 봉양농협에서 서예교실을 열고 있다.

그의 글씨는 단정하고 기품이 있다. 온후하면서 파격적이다. 캘리그래피 의 시대. 정작 돌아봐야 할 서예를 돌아보지 않는 시대. 서예는 결코 은퇴 후 소일거리만이 아니다. 자신만의 멋과 개성 넘치는 표정의 일부, 당신 손끝에 서 순금처럼 반짝이는 자기 표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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