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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김정화 수성대 교수

어머니의 마지막 말 '미안하다!'

  • 입력 2016.12.14 00:00
  • 수정 2016.12.16 17:52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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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을 넘기기 힘들 듯합니다…….”
나는 26살이었다. 폐결핵에 걸렸고, 의사가 내게 가차없는 시한부 선고를 했다.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2년도 아니고 2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병은 강도처럼 찾아왔다. 밤길을 걷다가 괴한에게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나빠졌다. 책장에 이는 바람에도 기침이 났고, 기침을 하다보면 으레 피를 토했다. 밥맛도 없었다. 억지로 삼켜도 소화가 안 될 뿐더러 정신이 흐릿해졌다. 구토가 날만큼 머리가 아팠고 때때로 몸에 열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고 짐을 쌌다. 누군가의 소개로 밀양으로 내려가 작은 암자에 들어갔다. ‘옮겨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차에 실려 간 기억밖에 나지 않으니까. 도시를 벗어나 짙푸른 숲길을 한참 가더니, 작은 암자에 나를 내려놓았다. 절 이름이 석골사였다. 절에 들어오자 조금씩 차도가 보였다. 밤낮없이 나를 덮치던 병증이 약화하자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그와 함께 뭔가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생겨났다.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병에 걸린 사람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을, 나는 그때서야 던졌다. 이유라도 깨닫고 나면 억울한 마음이 덜할 것 같았다.
‘너무 악착같이 살았어.’
제일 먼저 마음에 잡힌 생각은 그것이었다. 나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후부터, 나는 몇 사람의 인생을 혼자 살아낼 것처럼 아등바등 일상을 꾸렸다. 내가 만일 그때 죽었다면 가족들은 내 죽음을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몇 해 뒤 찾아온 갑작스런 죽음이 불러온 도미노 현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내 별명이 ‘유관순’이었던 이유
아버지는 세수를 한 후 머리를 빗다가 돌아가셨다. 원래부터 건강한 편은 아니셨지만 아마도 사업이 기울면서 상심이 심하셨을 것이다.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집안이 가난해진 건 아니었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는 돈 문제로 곤란을 겪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거였고, 상실감만큼 아버지도 내심 힘이 드셨을 것이다.
우리 외가와 친가는 모두 사업을 했다. 외할아버지는 울산에서 염색 사업을 했고 친가 역시 비슷한 사업체를 운영했다. 아버지는 잉크를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볼펜용 잉크를 만들었다. 일본과 중국을 다니면서 관련 기술을 습득해 직접 개발하신 것이었다. 당시 물잉크를 찍어서 쓰는 펜에서 볼펜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볼펜잉크는 사막에서 터진 유전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난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의 기술을 어느 기업에서 가로채버렸다. 법적으로 대처할 수 없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훔쳐가는 걸 번연히 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몸져 누웠다. 원래부터 심장병, 고혈압, 당뇨가 있던 분이었다. 병이 더 깊어졌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한 뒤부터 몇 배는 더 열심히 살았다. 개근상을 한번도 탄적이 없을 만큼 몸이 약했지만, 맏이라는 책임감이 나를 턱없이 분발하게 만들었다.
나는 집안에 피아노 교습소를 차렸다. 어떻게든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던 거였다. 다행히 집이 넓어서 방이 많았다. 나는 주변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인근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피아노 1대로 시작한 교습소는 나중엔 6대까지 늘었다. 피아노 교습은 결혼할 때까지 계속했는데, 학생이 많을 때는 67명까지 늘었다.
공부 욕심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피아노 교습에 대학 생활을 병행했다. 말 그대로 매일 매일이 강행군이었다.
그때 내 일과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새벽 6시 일어나 등교 준비. 7시 30분까지 학교 도착. 교수 연구실 청소 1시간. 교수님과의 하루 일과 준비 30분. 9시부터 5시부터 조교. 집으로 돌아와 10시까지 피아노 레슨. 10시에서 12시까지 잠. 다시 일어나 새벽 4시까지 과제. 4시부터 6시까지 잠. 이런 생활을 대학원 내내 지속했다. 하루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의 내 별명이 유관순이었다. 독립투쟁하듯 입을 꽉 다물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아버지는 특허를 다른 기업체에 빼앗긴 뒤에도 급격하게 무너지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건 내가 대학교 2학년일 때였다. 아버지는 늘 일어나는 그 시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면도를 했다. 빗으로 머리를 빗다가 갑자기 가슴을 손을 대시더니 옆으로 쓰러지셨다. 잠시 후 호흡이 끊어졌다. 조용히, 그리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난 뒤로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말 그대로 투쟁을 하듯 살았다. 지나친 열정과 과한 성실성이 젊음이라는 장벽마저 무너뜨리고 그 안에서 보호받고 있던 푸른 생명까지 갉아먹었던 거였다. 아버지의 죽음처럼, 나의 시한부 선고도 갑자기 들이닥쳤다.

 

석골사의 보물, 창고 안에서 발견한 것은...
억울한 마음이 때때로 신열만큼이나 심장과 머리를 뜨겁게 달구었지만, 의사에게 죽음을 선고받은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다르게 살아보려고 애썼다. 말하자면, 나는 석골사에서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아가씨가 되었다. 주는 밥 잘 먹고, 자라고 할 때 잠자리에 누웠다. 더 이상 시간을 아껴서 뛰어다니지도 식사를 거르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장 평범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리 절에 보물이 있다. 보여줄까?”
몸이 어느 정도 나아졌을 무렵, 나이 드신 스님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요사채뒤에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자물쇠를 꺼내 열쇠를 따고 문을 열었다. 언뜻 창고 같았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났다.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스님이 말했다.
“여기가 스님들의 해우소야.”
된장 냄새는 스님들의 대변에서 나는 거였다.

“부산에 있는 한의원에서 약으로 쓸려고 가져간다.”
막내 스님은 그 해우소를 못 쓴다고 했다. 학교에 다니는데, 오가는 길에 ‘나쁜 음식’을 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절에서 내려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아니 그 후 몇 십 년 동안이나 스님이 내게 그 화장실을 보여준 이유를 몰랐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약 잘 먹고, 끼니 거르지 않고 푹 쉬었던 덕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줄 알았다. 먼 훗날 ‘생태’를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서서히 깨달아갔다. 스님은 내게 우리 몸에 좋은 음식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절은 공기도 좋고 조용하기도 했지만 모든 음식이 스님들이 손수 키운 유기농이었다. 그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푸른 에너지가 내 몸을 살린 거였다. 지금에사 깨닫는 것이지만, 생태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깊고 오래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사주신 구두를 화장실에 던져버린 이유
아버지의 부재로 나 이상으로 고통을 겪은 분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남편 그 이상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성품 자체가 바뀌었다. 성품이 밝고 예능미가 넘치는 면이 있었지만 아버지를 만나서 여자 중의 여자로 탈바꿈했다. 아내였지만 어떨 땐 딸처럼 의지하고 여동생처럼 기댔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 산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줄곧 신경안정제를 드셨다. 늘 마음이 불안하셨던 것이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들어가는 방이 있었다. 어머니는 방 하나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그 안에 다 모아놓았다. 아버지의 숨결과 흔적을 그토록 놓치기 싫으셨던 거였다. 어머니에겐 그곳이 고향처럼 가장 아늑한 곳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맏이인 내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했던 듯했다. 집안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내셨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내가 피아노 교습으로 번 돈을 학비에 쓰는 것을 못 마땅해하셨다. 그저 다른 집 딸처럼 좋은 혼처가 나면 시집을 갔으면 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바람을 외면하고 욕심껏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섭섭했을까.

나를 물끄러미 보시던 어머니 “미안하다”
내가 가장 정 없이 굴었을 때는 돌아가실 즈음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후, 어머니는 “살고 싶다.”고 하셨지만 암 세포가 이미 유방에서 자궁과 폐까지전이된 상태였다. 살릴 방도가 없었다.
내가 결혼하고 8년째 되던 해, 어머니는 유방암 수술을 한번 했지만 십도 안 된 나이에 더 큰 병을 얻은 건,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의 고생이 너무 심했던 탓이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무심했다. 동생들에겐 상담을 다해주면서도 어머니와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정화야, 나는 너하고 언제쯤 상담할 수 있겠니?” 하면서 희미하게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한번은 무턱대고 계산 성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듯 신부님에게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기도 했다. 성당에 다니지도 않으시던 분이. 병상에 계실 때도 나는 동생들에 비해 ‘매정한 간호’를 했다. 동생들은 달랐다. 둘째는 인정스러웠고 막내는 애교가 많았다. 어머니가 병들자 둘째 동생은 늘 음식을 해서 병원으로 날랐고 다른 동생들은 정성껏 간호했다. 반면 나는 정해진 시간에 와서 잠깐 앉아 있다가 바로 나와 버렸다. - 우리오남매는 순번을 정해서 어머니를 간호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내가 제일 바빴다. 여동생 둘과 올케는 가정주부였다. 나는 직장에 나갔기 때문에 웬만하면 돈으로 해결했다. 병실에 에어컨을 달아주면서 그 정도면 내 할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도 했다.
어느 날엔가 어머니가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 너희 아버지가 보이더라. 나보고 가자고 하시네.”
마지막을 예감하셨던 듯하다. 동생들과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는 동생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추억담과 당부가 대부분이었다. 나에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셨던 어머니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그냥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꺼낸 말이었다. 너무 앞뒤 없이 갑자기 하신 말씀이어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나는 동생과 간호 순번을 조정했다. 갑자기 서울 출장이 잡힌 까닭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출장을 가야한다.”고 하자 어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지만 섭섭하셨던 것이리라. 이렇게 아픈데 같이 좀 있어주지, 하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눈빛을 외면했다. 매정하게도 속으로 ‘엄마가 또 사람을 옭아매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 서울 출장길에 나섰다. 차에 몸을 싣고 고속도로를 막 빠져나올 쯤 동생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 돌아가셨어.”
나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와 함께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믿었다. 취소하기엔 너무 중요한 출장이었으니까.

내 마음에 쏟아진 홍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가끔 어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하신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숨 가쁘게 살아온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읊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살아온 나였으니까. 박사 과정을 밟을 때 교육철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과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도 나는 어김없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고서 떠나셨다고 했다. 그때 교수님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식한테 안 미안한 부모가 어딨겠습니까?”
무심한 듯 던진 그 한 마디가 내 마음 속에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마음에 견고하게 쌓였던 제방이 무너지고 그 안에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빌미삼아 마음껏 쌓아올렸던 교만한 생각들과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자식에게 미안하지 않은 부모가 없구나.’
어머니가 내게 미안했던 건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엄청 잘했고 어머니가 너무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보다 더 잘 살았더라도, 훨씬 완벽한 삶을 살아냈다 해도 죽음의 문턱에서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밖에 남기지 못하셨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 앞에선 모두 죄인이라는 말이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상통했다. 한 마디로 두 분 모두 멋을 아셨다. 우리 오남매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도록 해주셨고, 두 분이 레코드로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틀어놓고 춤을 추셨다. 아버지는 가끔씩 외식을 시켜주시면서 우리 가족의 미각을 살려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난해졌을 때도 예술적인 사랑을 잃지 않았다. 식구들에게 생일과 크리스마스카드를 꼭 챙겨주셨다. 또한 힘들 때마다 가족과 함께 여행 또는 나들이를 나갔다. 우리가 들판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기를 좋아하셨다. 사진도 자주 찍어주셨다. 물론, 꼭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어야 인간적인 정이 생기고 가족이 끈끈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네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가끔 궁금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늘 가르치신 것처럼 과연 삶의 멋을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아버지가 보여주신 모범답안만큼 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려운 마음은 없다. 두 분의 기대가 크셨지만 또 그만큼 사랑과 이해도 깊으신 줄 알기 때문이다.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가장 간절한 사랑으로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신 것처럼 나의 삶도 그렇게 너그럽게 보아주실 것으로 확신한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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