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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 국악인 박애리

한마디 말 못하고 헤어진 어머니

  • 입력 2016.10.20 00:00
  • 수정 2016.11.08 16:28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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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어머니 덕분이에요!”
나를 소리의 세계로 이끈 건 어머니였다. 고3 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타고 인터뷰를 할 때도 어머니 이야기만 했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소리꾼이 되는 가장 큰 역할을 하신 분이 내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국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이다. 재능은 대개 내력이다. 이를테면, 특정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가 아니더라도 집안 누군가에게 그런 피를 물려준 사람이 있다. 우리 집안은 음악과 아무 인연이 없다. 사촌에 팔촌까지 음악을 전공하거나 지방에서라도 두각을 드러낸 분이 없다. 심지어 아버지는 음치셨다. 내력으로만 치자면 나는 말 그대로 황무지에서 꽃이 핀 셈이었다.
어머니가 처음 국악 이야기를 꺼낸 건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였다.
“엄마가 국악원 보내줄게.”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국악’보다 ‘원’이라는 단어에 더 집중했다. 귓속에 지우개라도 있는 것처럼 국악이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자마자 ‘학’ 자를 쓱싹 지워버리고 ‘원’ 자만 남긴 거였다. ‘원’ 자는 다시 ‘학원’으로 탈바꿈했다.
“나도 인제 학원에 가는 거예요?”
그때까지 한번도 학원을 간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는 피아노학원이나 주산학원, 보습학원이 많았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었다. 위로 오빠가 하나, 언니가 셋이었고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이었다. 공교육 외에 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 됐다. 무슨 ‘원’에 보내준다는 말에 내가 그토록 흥분했던 이유였다.
“야는 애원성을 타고 났네!”
실제로 그 ‘원’이란 델 간 건 2년 후, 9살 때였다.
어머니와 함께 목포역 근처에 있던 목포시민회관으로 갔다. 시민회관 옥상에 있는 가건물에 목포시립국악원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 시립국악원치고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우리 문화를 이어가는 숨통 같은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른들이 전통무용을 연습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교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오른쪽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야금 교실반이었다.
“줄 한번 튕겨봐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가야금 앞에 쪼그려 앉아 줄을 힘껏 당겼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홉 살이었지만 언뜻 여섯 살쯤으로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았다. 그만큼 악력이 시원찮았던 것이다.
“내년에 오시오.”
어머니가 얼굴을 붉히면서 “예”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중앙 연습실로 나와 발길을 돌려 나가려다 소리하는 소리를 들었다. 왼쪽에 있던 판소리 방에서 울려 나왔다. 어머니가 잠시 주저하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고등학생 언니 4~5명이 소리 선생님 앞에서 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 언니들이 따라했다. 어머니와 나는 한쪽에 앉아서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지켜보는데 어느 순간 내 뺨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수업에 열중하던 선생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너 우냐?”
나는 소리든 뭐든 간절히 배우고 싶었다. 가야금 방에서 쫓겨난 터라 여기에서 또 나가면 ‘원’이라는 데를 다시는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식 ‘원생’이 되기만 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언니들보다 내가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들릴 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디.”

선생님이 빙긋 웃더니 “나 따라해 봐라” 했다. 테스트였다.
“갈까부다!”
‘춘향자탄가(春香自歎歌)’의 한 대목이었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서 뱃심을 끌어올려 소리를 뱉었다.
“갈까부다!”
그러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 끄덕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넌 소리해야 되겠다.”
선생님은 내가 ‘갈까보다’하면서 소리를 꺾을 때 깊은 슬픔이 배어나왔다고 했다. 배워서 흉내 낼 수도 있지만 절로 되는 사람이 있다. 슬픔을 타고나는 것이다. 이는 국악적 재능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야는 애원성을 타고 났네!”
선생님의 말씀에,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이가 들수록 애원성을 타고 났다는 그 말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생각하게 된다.
안 낳으려다가 낳은 자식
어머니는 나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위로 오빠 하나에 언니가 셋이 있었다. 세 살 터울 나는 셋째 언니만 해도 아들만 하나 더 낳으려다 얻은 딸이었다. 그것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모두 산파를 불러 집에서 출산했다.
내가 어머니의 몸에 깃든 건 불혹이 다 되어서였다. 어머니는 나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그 시절, 부모님은 주말이면 시골에 있는 본가로 내려갔다. 거기서 농사일을 도왔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일을 열심히 했다. 몸을 혹사시켜서 나를 떠나보낼 생각이셨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악착같았다. 몸을 힘들게 하면 할수록 나는 더 끈덕지게 생명을 이어갔다. 결국 어머니와의 힘겨운 투쟁에서 내가 이겼다. 세상 빛을 보고야 말았다.
낳고 나니 또 걱정이었다. 아들 하나 보려고 낳은 딸 밑에 또 딸이라니! 할아버지 볼 면목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본 할아버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가, 이런 딸이라면 하나 더 낳아도 되겠다!”

할아버지가 나를 끔찍이 좋아하셨다. 똘망똘망하니 사내아이처럼 생긴 나를 늘 무릎에 앉혔다. 나는 때때로 할아버지의 보물창고에 가서 곶감이며 사탕, 통조림 복숭아를 실컷 먹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어머니의 마음에 똬리를 튼 미안함이 다 씻기진 못했을 것이다. 또래보다 두세 살은 작아 보이는 체구와 맨 처음 불러본 소리에 깃들어 있는 ‘애원성’까지, 어머니는 나 몰래 마음으로 우셨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꾸만 당신 탓인 것 같아서 말이다.
공연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시던 어머니
소리를 배울 때도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셨다. 처음에는 그룹으로 소리 수업을 받다가 1:1 수업으로 바꾸었다. 선생님이 “혼자 배우면 훨씬 잘 할 것”이라고 하신 때문이었다. 그룹은 월 수강료가 2000원이었고, 1:1 레슨은 3만 원이었다.
어떤 집에는 3만 원쯤이야 할 돈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큰 결심이 필요한 지출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여섯이나 거느린 장남이었다. 어머니가 시집을 와서 보니 할머니가 두 살 난 삼촌을 업고 있더라고 했다. 부모님은 옛날 사람답게 동생들의 교육과 결혼에 뒷짐을 지고 있지 않았다. 삼촌과 고모들을 교육시키고 결혼시키는데 내 부모님의 역할이 조부모님보다 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어머니에게 “너만 믿는다”하는 유언을 남기셨다.
어머니는 살림에 보태려고 보험 일을 하셨다. 용기를 내긴 하셨지만 워낙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분이셨다. 우리 남매 교육 보험만 잔뜩 들었다. 우리 교육비는 모두 그 교육 보험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소리를 배울 때까지, 아등바등 분투를 하며 학비를 대시면서도 나에게 “소리 그만해라”는 말씀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 대학을 다닐 땐 외삼촌 세 분도 적잖은 도움을 주셔서 그나마 나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소리 하는 것을 제일 기뻐하셨다. 그러나 대회에 나가거나 공연에 참가해 무대에서 소리를 할 때 여느 어머니들처럼 박수를 치거나 “아이고, 내 새끼 잘한다!” 하시며 호들갑을 떠신 적이 없었다. 늘 눈시울을 붉히고 눈물을 훔치셨다. 내가 무얼 하든 어머니에게는 애절하게 다가왔던 것이리라.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셨던 적이 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거기서 일 년도 안 돼 창극 주연을 맡게 된 때였다. 신입이 주연을 꿰차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낙지와 홍어를 바리바리 싸서 서울에 왔다. 단원들과 선생님들이 “따님이 정말 큰 역할을 맡았어요. 얼마나 좋으세요!”하고 말씀하시자 어머니가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 낳으려다가 낳은 딸 덕분에 좋은 날을 보네요. 세상천지 이렇게 홀가분한 날이 또 없네요.”
그날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리 열심히 하길 잘했던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국립창극단에서 한창 잘나가던 시절, 어머니는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 언제부턴가 입맛이 없어지고 급기야 요리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 누워있다시피 하는 날이 많았다.
예외가 있었다. 내가 고향에 내려가는 날이었다.
“엄마, 나 다음주에 집에 가!”
그러면 어머니는 내가 오는 날에 맞춰 요리를 하셨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처럼 산낙지 연포탕에 목포에서 구할 수 있는 산해진미를 다 사와서 지지고 볶고 잔칫상을 차렸다. 내가 집에 들어서면 오빠는 말했다.
“너 자주 집에 와라. 네가 와야 어머니가 힘이 나시는 것 같다!”
그렇게 내 이름만 들어도 없던 힘도 솟던 어머니였지만, 내가 스물일곱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더 이상 요리를 못 하게 됐다. 영영 못 돌아올 먼 길을 떠나신 거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나는 당장 짐을 쌌다. 당시 나는 창극 주연을 맡고 있었고 공연은 스무 날 넘게 남아 있었다. 주연이 갑자기 자리를 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더 이상 내가 기쁘게 해드릴 분이 없어진 마당에 공연은 무의미했다. 내 삶 전체가 뿌리째 뽑히는 기분이었니까. 무대에 서서 아무리 소리를 끌어올려도 슬픔으로 사태가 난 가슴을 뚫고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엄마한테 가야겠어요. 어떤 책임도 감내할 게요. 전 당장 엄마한테 가야겠어요.”
목포로 내려갔다. 엄마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오빠가 “안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엄마를 보겠다고 거듭 간청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 내 뺨을 갖다 댔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돌아와 내 얼굴을 뺨을 대실 때처럼 차가웠다.
“엄마 무서워?”
내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엄마 혼자 자기 무서우면 나 데리고 가.”
진심으로,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었다. 자식들 때문에, ‘안 낳으려다 낳은’ 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포기하고 사신 분이었다. 이제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단 생각에 길벗을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목포시립국악원에 찾아갔던 날 선생님이 “야는 애원성을 타고 났네” 하고 말씀하시자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시던 일부터 내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 “잘한다!” 큰 소리 한번 못 내시고 늘 눈시울을 붉히시던 것까지, 지난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구였고, 동료이자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집에 오면 늘 그날 있었던 일을 놓고 어머니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 배운 소리도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들려드렸다. 어머니가 나의 첫 번째 관객이었다. 당신의 박수 소리가 나에겐 세상 더 없는 격려였고 행복이었다. 평범하지만 너무도 특별한 일상을 만들어주신 어머니가 말도 없이 훌쩍 떠나셨다. 한 번 가고 못 온다는 그 먼 길을…….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 찾어 갈까부다.
어이하여 못 오신고?
...천상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일도 상봉을 허는디,
우리 님은 무슨 물이 막혔간디,
한 번 가고 못 오신고!’
어머니가 떠나신 후 갈까부다, 갈까부다 하는 ‘춘향가’의 한 대목이 늘 마음에 맴돌았다. 여섯 달 넘게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선생님과 선배님들의 위로가 아니었으면 더 깊은 우울의 강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네가 열심히 사는 것이 엄마한테 잘하는 길”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국악에 입문시킨 분이 어머니였다. 그러니 내가 끝까지 잘해야 어머니의 마음이 기쁘실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러 다시 힘을 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십년이 훌쩍 넘었다. 시간을 헤어볼 때마다 깜짝 놀랐다. 어머니와 헤어진 게 언제나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던 말인가. 이제는 간혹 잊을 때도 있지만, 어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공연을 할 때면 다시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얼마 전, 어머니를 강렬하게 떠올린 일이 있었다. ‘불후의 명곡’에서 문주란 선배의 ‘공항의 이별’을 부를 때였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노랫말로 옮겨 놓은 것 같아, 노래를 부르는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 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이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구름 저 멀리 사라져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
허전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달랠 길 없어 나는 걸었네
노랫말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하고 싶은 말들이 세월만큼 쌓였다. 불혹의 나이에 나를 낳으시고, 안 낳으려다 낳은 미안함 때문에 늘 과분한 지출로 나를 뒷바라지 하시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도 딸에게 먹이려고 연포탕을 끓이시던 내 어머니. 고맙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다는 말을 이제는 노래로 전하는 수밖에 없다. 내 공연을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니까 내 음성이 들리면 객석 어딘가에 오셔서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실까. 살아계실 때처럼 남몰래 눈시울을 적시면서 말이다.
밤을 새우며 공연을 준비해도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다 그런 생각 때문이리라. 나의 첫 관객이자 가장 소중한 관객을 위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노래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나를 소리의 세계로 이끄셨으니 내 음악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내 공연을 지켜보실 것이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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