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조항조 “노래의 ‘맛’을 가르쳐준 내 어머니”

  • 입력 2016.07.05 00:00
  • 수정 2016.07.11 11:13
  • 기자명 김광원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는 조항조 씨.

“원표야, 막걸리 받아오너라!”

아버지는 자개 공장을 운영하셨다. 공장에서 일하는 분이 10명쯤 됐는데, 직원들이 모두 우리 집을 기숙사 삼아 먹고 잤다.

직원들은 일을 마치고 나면 어머니와 밥하는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내가 받아온 막걸리로 입가심을 했다. 반주에 은근히 취기가 오르면 으레 노래판이 벌어졌다.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 중의 한분이 젓가락으로 양제기를 톡톡 치면 그것이 신호였다. 뒤이어 현란한 젓가락 장단을 따라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왔다.

기타 연주가 가미될 때도 있었다. 직원 중에 기타를 잘 치는 분이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얗게 쇠어서 뮤지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분이 기타를 잡으면 마당공연의 수준이 한껏 올라갔다. 우리 집 마당은 그대로 작은 소공연장이었다. 하긴, 우리네 마당놀이가 바로 그런 공연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때 어른들이 밥상머리 콘서트에서 불렀던 노래는 한 곡 한 곡 모두 우리네 삶이 절절하게 담긴 가요 명곡들이었다. 아버지가 워낙 술과 노래를 좋아하셨던 때문일까, 내 기억엔 거의 매일 노래판이 벌어졌던 듯하다.

그때의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가끔 센티멘털해지면, 예전에 살던 그 동네에 그 때 그 시절처럼 머리가 하얀 아저씨의 기타소리와 젓가락 장단이 울려 퍼지고 있을 거란 생각에 불쑥 살던 동네로 가보고 싶어진다.

‘응답하라 1988’처럼, 내 어린 시절에도 동네에는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복작댔다. 골목으로 나가면 또래 아이들이 넘쳤다. 학원도 과외도 게임도 없던 시절,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골목은 디즈니랜드였다. 백설공주로 분장한 백인 여자나 하늘로 솟구치는 놀이기구는 없었지만 마음이 척척 맞아서 어떤 놀이든 멋지게 소화해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 좁은 골목이 디즈니랜드보다 훨씬 더 즐거운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느 아이들과 조금 다르게 놀았다. 나는 동네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불러 모아 방에서 노래를 가르쳤다. (대개 아이들이 먼저 내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어른들에게 귀염을 받으려면 노래가 최고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걸까, 아이들은 내 수업을 꽤 열심히 들었다. 가끔 사탕 한두 알씩 내 주머니에 찔러주면서 ‘스승’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친구도 있었다.

꼬맹이 노래 교실이 열리면 어머니는 방을 내주시고 마루로 나가셨다. 내가 음악 교습을 하는 동안 마루에 그림처럼 앉아서 바느질을 하거나 수를 놓으셨다. 가끔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하기도 하셨다. 나는 그 말없는 동의에 큰 행복감을 느꼈다. 그 은근한 지지가 내 음악 인생에 얼마나 큰 힘이 될지 그때는 몰랐다.

▲ 자개 공장을 운영했단 조항조의 부친은 공장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노래판을 벌이곤 했다.

- “우리 집안에 풍각쟁이라니!”

내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을 때, 온 집안에 난리가 났지만 어머니만은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어머니가 온건한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온 몸으로 집채만 한 파도를 막는 큰 바위 같으셨다. 나는 그 바위 뒤에 숨어서 쉼 없이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파도를 피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밴드를 구성해서 아버지 공장에 공간을 마련해 밤낮없이 뚱땅뚱땅 연주를 했다. 나에게는 음악이었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특히 이모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우리 집안에 풍각쟁이라니,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제발 정신 차려라!”

외삼촌도 거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선교사였던 것 알지? 외손자가 이러는 걸 알면 뭐라고 하시겠니.”

아버지도 마뜩잖아 하셨다. 공장 한켠에 연습실을 허락하긴 하셨지만 사춘기 시절 잠깐 앓는 열병이길 바라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정면으로 “그만두라”고 하시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본을 잘못 보였다. 공장 운영하면서 직원들 사기 올린답시고 늘 반주 한잔 걸치고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이런 결과를 낳았구나.”

진한 후회의 감정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푸념처럼 그렇게 말씀하신 후 간곡한 심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래도 남자라면 사업을 해야지. 남자가 무슨 음악이냐.”

사실 아버지가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신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공장에 연습실을 낼 때도, 또 언짢은 눈길로 나를 보실 때도 어머니가 중재에 나섰다.

“당신이 워낙 노래를 좋아하고 또 그런 본을 보였기 때문에 아들이 음악에 빠져든 것 아니겠어요. 너무 심하게 꾸짖지 마세요.”

나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 집안에선 군대에 갔다 오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군대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러나 군대를 거친 후에도 나의 음악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군복을 벗자마자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군대도 다녀왔으니까 저 이제 독립하겠습니다.”

독립이라기보다 가출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었다. 음악을 하겠다는 열정 외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을 했으면 좋을 텐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전 음악하다 죽을래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그간 얼마나 힘드셨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내가 중학교 무렵 경쟁 업체가 많이 생겨나면서 공장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 다행히 작은아버지가 톱밥으로 단단한 합판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서 특허를 냈지만 그마저도 자금 때문에 특허를 팔았다. 거기다 사기를 당했다.

성남으로 공장을 옮기려고 땅을 샀는데,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고 나서야 그것이 개인이 사고 팔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가 땅이었다. 사기꾼은 구속당했지만 아버지는 보상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 그런 와중에 죽어라 공부만 해도 시원찮은 판에 ‘풍각쟁이’를 하겠다고 하루 종일 음악에 빠져 지냈으니 집안사람들은 모두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내게 음악은 병이었다. 음악이 아니면 삶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독립, 혹은 가출을 한 뒤에 더 맹렬하게 음악에 파고들었다. 미8군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도 그랬지만, 그 시절 밴드를 하는 사람들은 연예인이 되거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연주를 하는 것뿐이었다. 요즘 연예인이 되기 위해 기획사에 들어가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냥 음악이 좋아서 죽도록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뿐이었다. 주변에선 음악한다고 무턱대고 얕보기도 하고 돈도 크게 안 됐지만 그 시절 누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이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입니까?”

- 아내가 다시 음악을 허락한 사연

생각의 변화가 찾아온 것은 결혼한 뒤였다.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교포였다. 결혼 후 아이를 낳았고, 몇 해 뒤 아내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들어갔다. “음악이 지겨워지면 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러나 혼자 지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80년, 나도 미국행을 결행했다. 그때까지 나는 밴드 음반을 3장 냈고 솔로 음반도 1장 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혼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런 결정을 거들었다. 이제 집안에 남자라곤 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내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좋은 것만 하면서 살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했다. 나는 이상을 내려놓고 현실주의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마이크를 잡지 않을 마음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이라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새로운 일들이 닥치면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완벽한 ‘미쿡’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러나 얼마 안 가 외로워졌다.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까지 있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이 수시로 나를 덮쳤다. 한인 방송에서 애국가를 들을 때는 물론이고 슈퍼에서 ‘라면’이라는 한글만 읽어도 울컥했다. 이른바 ‘모국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자기야, 음악 다시 해.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음악을 해야지.”

느닷없이 나온 말에 나는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 다소 생뚱맞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모국병이라는 것, 살던 곳에 대한 그리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내는 진작에 눈치 챘던 거였다. 내 마음을 그토록 애절하게 만든 건 고국에 대한 향수에 앞서 음악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내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마음을, 아내는 귀신처럼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내심 받고 싶어 하는 생일 선물을 어머니가 귀신처럼 맞혔을 때처럼 신기하고 감격스러웠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내는 어떻게 마음을 열고 내 음악 활동을 허락했을까. 어쩌면 어머니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딸처럼 아꼈다. 사실은 당신의 딸보다 며느리를 더 좋아했다. “말이 잘 통해” 하시면서. 그렇게 친구처럼 딸처럼 잘 받아주셨고,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내 음악을 마뜩잖아 하시던 시절처럼 나와 아내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중재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떼로 데려와 안방을 점령했을 때, 마루에 나와 바느질을 하시면서 내 노래 소리에 발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며 나를 응원해 주셨던 것처럼.

- 미국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의 ‘나그네 설움’

나는 미국에서 밴드를 결성했다. 주로 가요를 연주했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래들이었다. 그건 한인 클럽에서 연주를 한 까닭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미국에 건너가서 미국인들로만 구성된 밴드의 연주회에 직접 가봤다. 음반이나 영상으로 접하던 음악과는 달랐다. 미국의 음악은 말 그대로 미국인들에 손끝에서 가장 미국적인 소리가 나왔다. 나는 내 음악이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국인은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 해!”

생각이 바뀌자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젓가락 장단이었다. 아버지와 공장 직원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젓가락을 두드리며 리드미컬하게 부르던 노래들이 마음을 울렸다. 우리 삶의 가장 곡진한 사연들을 꾸임 없는 목소리로 담아낸 우리 가요가 내게 오래된 첫사랑처럼 성큼성큼 다가와 품에 안겼다. 노래라기보다 가장 진솔한 고백이 마음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나그네 설움’을 부를 때였다. 가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특히, 3절에 나오는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가워라’ 하는 구절에서 성남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집안이 가장 힘들었을 때다. 야심과 희망에 가득 차서 공장 부지를 마련했다가 사기로 드러나 장밋빛 미래가 깜깜한 암흑에 묻혔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저렇지 않았을까. 다정한 사람들과 따뜻한 말들, 정든 거리가 갑자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풍경처럼 다가오지 않았을까.

‘새벽 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 쏘냐…….’

성남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던 그 심정이 바로 그러했을 것이다. 찬바람이 외투를 뚫고 뼛골에 스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렇다. 가요는 막걸리 한잔에 젓가락 장단으로 인생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이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살가운 친구다. 그 친구가 드디어 내게도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 '남자라는 이유로'로 성인가요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후 최근 '사랑 찾아 인생 찾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십대부터 중장년까지 두루 인기를 얻고 있는 조항조 씨.

- 어머니가 “좋구나” 하시면 히트

89년 귀국해 나는 본격적으로 정통 가요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남자라는 이유로’라는 곡을 만났다. 이 곡은 원래 다른 가수가 취입했다. 곡이 너무 좋아서 “제가 홍보해 줄게요”하면서 업소에서 라이브로 자주 불렀다. 반응이 좋았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으레 손님들이 찾아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노래 제목이 뭡니까?”

“누구 노래죠?”

어머니 앞에서도 이 노래를 불러드린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답했다.

“노래 참 좋구나. 네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 원래 가수보다 네가 훨씬 잘 부른다.”

어머니는 좀체 허투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그저 아들 기 살리려고 하시는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감이 왔다고 해야 하는 게 옳겠다.

얼마 후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노래를 취입한 녹음 기사가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형! 그건 형 노래야. 형이 불러야 되는 노래라고.”

녹음을 하자는 것이었다. 처음 노래를 취입한 가수는 3년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좋은 노래가 사장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다른 음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잠시 중단하고 후배의 말을 따라 녹음을 하기로 했다.

행운이 따랐다. 97년 7월에 녹음했는데, 얼마 후 내 노래가 9시 뉴스 전파를 탔다. 갑자기 불어 닥친 IMF에 고개 숙인 남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로 꼽힌 거였다. 내 노래는 그렇게 시대를 대변하는 가요로 자리매김했다. ‘나그네 설움’처럼 ‘IMF 설움’이 내 노래 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PD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노래방은 물론이고 어느 자리든 술에 취하면 으레 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조항조의 이름이 서서히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 ‘왕가네 식구들’ “내가 불렀다고 알리지 마라!”

그 뒤로도 신곡이 나오면 늘 어머니에게 들려줬다. 기대하는 대답은 하나였다.

“좋구나.”

어머니가 그렇게 평가한 곡들은 늘 호평을 받았다. ‘사나이 눈물’(2000년), ‘만약에’(2005년), ‘거짓말’(2005년), ‘가지마’(2012년)이 모두 어머니에게 “좋구나”하는 평을 들은 곡이었다.

짧고 간단하게 말씀하셨지만 ‘촉’은 늘 정확했다. 그만큼 어머니가 내 활동에 무심한 척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 아닐까.

처음부터 그러셨을 것이다. 내가 동네 아이들을 안방에 데리고 와서 꼬맹이 노래 선생님 노릇을 할 때부터 어머니는 무심한 척 내 목소리를 세심하게 경청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평가는 어떤 가요전문가도 따라올 수 없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집중해서 들어주시니까.

나의 최근 히트작은 ‘왕가네 식구들’ OST다. OST 전문제작팀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OST를 불러달라는 말이 내게는 전혀 뜻밖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주제곡은 젊은 친구들이 주로 부른다. 나에게 순서가 돌아올 이유가 없는 듯했다.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수긍이 갔다.

“삶의 곡절을 경험해본 가수가 필요합니다. 젊은 친구들은 가창력은 좋겠지만 ‘맛’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단, “너무 트로트스럽게 부르진 말아달라”고 했다.

악보를 받아보니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네 삶이 담긴 가사라서 마음에 착 감겼다. 내용으로 봤을 때 테크닉이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마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가사만으로 느낌을 전달해야 하는 터라 부담이 컸다. 고민 끝에 가사 내용에 충실해서 느껴지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게 정답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사에 담긴 애환과 감성을 목소리에 충일하게 담아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일 것이란 판단이었다.

덧붙이자면, 나는 이 노래의 포인트를 ‘바쁘게 산다’하는 부분으로 잡았다. 이 대목을 부를 때 삶에 지친 사람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다. 이를테면 몹시 지친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듣는 이에게 말을 걸 듯이.

나는 대중가요가 단순히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 파트에서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게 통하면 대중은 그 대목 때문에 노래를 듣는다. ‘사랑 찾아 인생 찾아’에서는 ‘바쁘게 산다’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는 노래를 녹음한 후 부랴부랴 미국으로 떠났다. 갈 때는 “내가 불렀다고 알리지 마라”고 당부했다. 혹시나 트로트 가수가 OST를 불렀다고 하면 시청자들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됐다.

한 달쯤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돌아와 보니 나를 찾느라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시청률이 40~50%에 육박했고, OST는 음원 차트에서 아이돌 가수들이 주도하던 K-POP을 비롯해 발라드나 댄스곡을 제치고 몇 주 동안이나 1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드라마 OST가 이런 대박을 치기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OST를 부른 가수가 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말 그대로 섭외 전쟁이 얼어난 것이었다.

 

- 언제까지나 “좋구나” 하시는 말씀 듣고 싶어요, 어머니!

한번은 생방송을 마치고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헤어 누가 했니? 머리가 조금 떴더라. 조금만 더 가라앉혔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내가 나오는 방송을 보는 게 하루의 가장 큰 낙이면서 일이다. 피곤해서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어김없이 벨이 울린다.

“목소리가 조금 약하더라. 노래도 좋지만 쉬어가면서 해라.”

‘기획사 사장님’이 따로 없다. 사장님이 나에게 조언을 하실 때는 반드시 옆에 앉은 상무님과 상의를 한다. 상무님은 나의 아내다. 둘이서 가수 하나를 놓고 의상과 헤어, 무대 화장, 목소리까지 일일이 체크해서 모니터 보고서를 제출한다. 두 상사 덕분에 2030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팬이다. 어머니의 자리가 빈다면 내 가수 인생의 가장 큰 조력자를 잃는 셈이 된다. 어머니가 더 오래 오래 모니터링 하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40~50대 체력으로 돌아가실 수는 없겠지만, 이대로라도 100세를 넘겨 사셨으면 좋겠다.

이제야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느낌이 된다. 삶이 스며든 진짜 노래. 돌이켜보면, 처음 음악에 빠졌던 시절, 세상 모든 것이 다 귀찮았다. 음악 이외의 것들은 모두 괄호 밖에 내놓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괄호 밖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괄호 안으로 들어왔다. 기타를 배우고 마이크를 잡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내 아버지의 ‘나그네 설움’이 드디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처럼, 내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때로는 왁자하게 때로는 밤이슬처럼 스리슬쩍 내 노래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노래가 만두피처럼 삶이란 속을 꽁꽁 감싸 안은 느낌이다. 이제 진짜 ‘맛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소리만 질러대던 ‘생짜’ 가수에서 삶의 맛을 아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나를 묵묵히 지지하고 응원해주신 분은 어머니였다. 언덕이 되어주신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었을까. 노래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인생이 곧 나의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내 마음의 첫 번째 관객은 항상 어머니다. 노래가 잘 되는 날은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고, 노래가 안 되는 날은 무대로 내려올 때 어머니가 어깨를 토닥이시는 느낌이 든다.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 덕에 내 노래에 점점 더 깊은 맛이 배어드는 듯하다.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께 맛난 음식을 드리듯이 나는 ‘맛’이 제대로 밴 노래를 들려드리는 셈이다. 오래 오래 사시면서 맛있는 노래 많이 즐기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열매는 내게서 맺혔지만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땀 흘려 지은 농사니까.

“노래 참 좋구나.”

어머니의 자애로운 목소리를 언제까지나 듣고 싶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