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특집 교육 '마니아' 아들을 위해 특수 교육전문기관 설립

  • 입력 2016.04.07 00:00
  • 수정 2016.04.15 09:12
  • 기자명 김민규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들을 위해 특수교육 전문가가 된 아버지

 

1993년, 한 부부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을 얻었다는 감격이 가시기도 전, 여타 아이들과 다르다는 느낌이 받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병원에서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했다. “발달장애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장한 후에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살이 되었지만. “엄마”라는 말도 못 했다. 아이를 돌보던 산후 도우미도 “한가지 행동을 종일 하는 것을 보니 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지인이 자폐증에 관한 책을 줬다. 읽을수록 아들의 증상과 일치했다. 병원에서는 ‘자폐증’이라는 확진을 내렸다. 그러나, 20년 후 발달장애 1급인 아들은 서울에 있는 카돌릭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고 부부는 전국에서 유명한 특수교육전문가 되었다.
 

자식을 위해 특수교육전문가 된 아버지
그는 공대출신이다. 공대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 강사를 하고 있던 그와 한의원 개원을 앞두고 있던 부인의 계획을 포기하게 한 것은 아들의 자폐증이었다. 한국에서 장애아를 데리고 산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치료기관은커녕 사실상 격리조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사진을 찍을 때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사진도 못 찍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웠다. ‘같이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해맑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아들만큼은 내가 고쳐보겠다’

그는 의대로 진학해 아들을 치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소한 10년이 걸리는 과정이었고 아들이 증상이 그때까지 기다려줄지도 의문이었다. 아내와 상의 끝에 내린 결론은 그가 특수교육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서울에 있는 발달장애를 대상으로 유명한 지압법을 배우기로 했다. 특수교육대학원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지도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네 같은 사람이 특수교육학을 배워야 한다. 모든 지 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마음껏 연구하라’는 말을 들었다. 난생 처음 보는 외국 연구자료와 논문, 보고서도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남들에게는 공부였지만 그에게는 아들의 치료제나 마찬가지였다. 원서 논문도 그에게는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교수도 그의 열정을 인정했다. 그가 구해달라는 외국자료나 서적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밤에는 과외를 했다. 집에 도착하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질 때도 많았다. 욕조에서 졸다가 물에 빠진 적도 많았다. 그의 사정을 모르는 동기들은 ‘학위에 미쳤다’고 말할 정도였다. 해명할 시간도 아까웠다. 그 시간에 하나의 논문이라도 더 봐야만 했으니까.

 

자녀를 위해 연구소를 개원
그의 아들과 딸은 극과 극의 비교를 보여줬다. 딸은 영재성 판정을 받고 아들은 발달장애판정을 받았다. 석사과정 중 연구소를 만들어 유사증상을 가진 이들의 치료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다소 생소한 치료기관이었지만 같은 증상을 가진 부모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증상이 호전되는 것이 눈에 보이자 원생들이 급격히 늘었다. 그는 발달장애를 병으로 보지 않았다. 검사를 통해 밝혀낸 장점을 길러주는 것이 그의 교육방법이었다. 또 부모치료도 했다. “치료기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방향을 잡아주는 것뿐이다”며 “진짜 치료는 부모가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또 “부모가 자식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치료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세발자전거에 발도 못 디딜 정도로 증상이 심했던 아들은 컴퓨터 관련 공부에 매진해 네이버에서 주는 태양신지식인까지 올랐다. “아내와 웃으며 말했어요. ‘우린 부모로서 가질 수 있는 근심과 기쁨은 다 가졌다’고 말이죠. 딸이 영재성을 보이며 학업성적도 거의 탑이었죠. 아들과는 정반대에요. 하지만 맥락은 같습니다. 둘 다 남들보다 집중력이 좋다는 것입니다.” 2006년 대구·경북에서 최초로 특수클리닉을 개원했다. 돈이 없어 광고도 못 했지만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특히 그의 아들도 발달장애가 있고 치료를 해서 호전이 되었다는 소문이 가장 큰 광고였다. 치료를 받는 이는 늘었지만, 병원 재정은 좋아지지 않았다. 돈이 생기면 테이프를 만들어 전국으로 무상배포를 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배운 지압법으로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긴장을 완화하는데 큰 효과를 볼 수 있었어요. 같은 부모 입장에서 가정에서 이 치료만 해주어도 증상이 많이 호전됩니다. 또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장점을 살려주는 것이 치료의 시작입니다. 바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장점을 살리는 거죠.” 20여 년간 부모의 끈질긴 노력 앞에 자폐증이라는 괴물은 백기를 들었다. 아, 어밖에 할 줄 모르던 발달장애 1급인 아들이 정상적인 생활은 물론 대학까지 입학했다.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는 것은 물론 장학금까지 받고 있다. 최근에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발달 장애아동들을 위해 꾸준하고 연구하고 있다. 또 자기 아들을 통해 치료의 확신을 하게 되었다. 돈을
벌기보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부모들을 위해 아들의 치료일지를 공 개하고 무상으로 영상을 배포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