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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노래

손경식 ‘대구 S모터스’ 이사

  • 입력 2015.09.01 00:00
  • 수정 2015.09.09 10:31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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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은 내게 말 그대로 화창한 봄날이었다. 겨울 내내 준비한 끝에 경북 김천에 쉐보레 자동차 영업소 문을 열게 되었다. 내가 영업소의 소장을 맡았다. 개업식을 준비하는 내내 긴장되고 설렜다. 이제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날이었다.
그런데, 막상 개업식이 있던 날 아침에 이상하게 마음이 찌뿌듯했다. ‘너무 긴장이 돼서 이런 거겠지.’ 그저 일에만 몰두했다. 대표이사를 비롯해 지역민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개업 행사를 진행했다. 그들 모두 나의 고객이었기 때문에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아무 사고 없이 잘 끝났네. 괜히 걱정했네.”
손님이 모두 돌아간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저 긴장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 직원 회식을 준비했다. 잠시 쉬었다 일어날 생각으로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타서 소파에 앉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아, 너거 엄마 숨을 안 쉰다. 우야노!”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곡을 할 것만 같았다.
“빨리 119에 전화 하세요. 내가 지금 갈게요.”
어머니는 10년 동안 치매를 앓아왔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그땐 그저 팔이나 다리가 조금 다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뭔가 상황이 다른 듯했다. 나는 최고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려 고향으로 향했다.
“식아, 천처이 와라.”
구미를 막 지났을 때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숨을 안 쉰다. 당최 숨을 안 쉰다…….”
나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 페달을 밟았다. 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시골 노인이 혹시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의사의 선고를 듣기 전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최고속도로 달렸다.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죽으면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마지막으로 내 얼굴은 봐야지. 여섯 살에 고아가 돼가지고, 평생 고생만 하고 산 우리 엄만데, 아들한테 마지막 인사는 받고 가야지…….’

<14살에 식모살이 시작한 사연>
“난데 와스료우 와스라료유카…….”
어머니는 가끔 일본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일본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깊은 밤 혼자 앉아 바느질을 하거나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일을 할 때는 나지막이 일본어로 노래를 불렀다.
“엄마 그거 일본 노래 아이가? 엄마가 우예 일본 노래를 아노”
내가 물으면 엄마는 그저 빙긋 웃고 말았다.
어머니는 재일교포였다.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온 집안이 일본으로 이주했었다. 해방 후, 6살 무렵에 작은집 식구들과 한국으로 들어왔다. 부모님은 일본에서 일을 정리하고 뒤따라 올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부모님과 연락이 끊겨버렸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았다. 고아나 다름없었다.
“인자 니도 일을 해야 안 되겠나. 키울 만큼 키았으니까, 니 밥벌이는 니가해라.”
어머니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교는 4학년으로 끝이었다. 여섯 살 때 부모 품을 떠나서 천덕꾸러기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소녀티를 겨우 벗을 즈음에는 식모 아닌 식모살이로 녹록찮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 어머니의 희망은 착하고 믿음직한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었다.
“너거 아부지하고 결혼할 때, 딱 하나만 봤다. 식구 많은 거. 식구 많은 집에 가면, 옥닥복닥 재밌게, 이쁨 받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결혼 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환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어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고 주사가 있었다. 별난 시어머니에다 거의 달마다 돌아오는 제사, 시누이와 시동생 뒷바라지로 식모살이보다 더 힘든 세월을 보냈다. 맏며느리가 아니라 맏식모였다. 어머니의 얼굴은 항상 무표정했다. 형과 나를 볼 때는 예외였지만.
“이거 먹어라.”
형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우리를 몰래 불러서 누룽지를 입에 넣어주었다. 그 구수한 누룽지의 맛과 누룽지를 맛나게 먹는 우리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으시던 그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식아, 절대 나쁜 짓 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우리 형제만 보고 사셨지만, 공부를 곧잘 했던 형, 누나 들과 달리 나는 늘 사고를 쳤다. 7살에 학교를 입학한 까닭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술과 담배를 배웠다. 동네에서 서리도 많이 하고 싸움도 자주 했다. 사고를 치고 나면 어머니가 늘 학교로 불려갔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나를 불려 앉혀놓고 말했다.
“식아,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나쁜 짓 하지 마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지. 나쁜 짓한 사람은 절대 두 다리 뻗고 살 수 없는 법이다, 알겠제”
어머니의 진중한 충고에 나는 답답하다는 투로 이렇게 대꾸했다.
“엄마, 정직하게 사는 거 아무 소용없다. 눈치 보면서 약삭빠르게 사는 놈이 더 성공하더라.”
나는 점점 비뚤어지기만 했다. 내가 마음을 잡지 못한 이유 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다혈질에다 술을 너무 좋아했다. 때로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한번은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를 번쩍 들어서 대청마루에 던졌다.
“아이쿠야, 아이쿠야!”
나는 그날 당장 집을 나와 친구 집으로 갔다. 한달 정도 친구집에서 지내자 어머니가 찾아왔다.

“아부지가 니 데리고 오란다. 집에 가자. 이래 고집 피아가 될 일이 아이다. 암만 친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신세지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우리 모자는 논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린시절처럼 내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버지보다 더 커진 손이었다.
“아키라메마쇼우토 와카레테 미타가, 난데 와스료우 와스라료유카…….”
어머니가 일본 노래를 흥얼거렸다. 뜻은 몰랐지만 가슴에 잔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지난했던 당신의 과거를 노래 한 자락으로 고백하는 듯했다. 어머닌 어쩌면 ‘너도 이제 철들 때도 됐으니 어머니의 일생을 가슴 깊이 새겨보라’ 는 말씀을 하셨던 건지도 모른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노래로 풀어내셨던 것이리라.

<어머니가 사주신 구두 한 켤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대구에서 경비업체에 입사해 몇 년 정도 일하다가 “돈이 된다.”는 친구 말을 듣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겁도 없이 이것저것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엔 사업이 잘못 되어서 그때까지 모은 걸 다 날렸다. 모든 책임은 내 몫이었다. 통장을 말끔하게 비우는 건 물론이고 집에다 차까지, 내놓을 수 있는 건 모두 내놓았다. 그러고도 빚이 더 남았다. 
나는 대구로 내려왔다. 몇 달 동안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못 먹는 술도 엄청 먹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자동차 판매원 해볼래? 그거 열심히 하마 개안타 카더라.”
어쩌다 연락이 닿은 지인이 자동차 영업을 권했다. 나는 계속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간 내 손으로 내 목에 줄을 메겠다 싶어서 선뜻 “해보겠다.”고 했다. 대구로 떠날 채비를 했다. 집을 나서기 하루 전, 어머니가 시장에서 구두 한 켤레를 사왔다.
“식아, 지난 일은 다 깨끗하게 이자뿌라(잊어버려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돈은 다시 벌 수 있다. 절대 기 죽지 말고, 차근 차근 다시 시작하거래이!”
나는 다리가 부러질 각오로 일했다. 6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전단지를 뿌리고 회사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다녔다. 문전박대는 기본이었고, 소금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루에 100군데는 다녔던 것 같다. 발에 물집이 잡혔고, 어머니가 사준 신발은 한 달이 채 안 돼 밑바닥에 구멍이 났다.
신발 밑창이 닳도록 다닌 보람은 있었다. 얼마 안 가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차를 팔았다. 내 머릿속에는 늘 ‘판매왕’ 타이틀이 맴돌았다. 하나 더, 퇴근 후 바로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했다. 퇴근하며 양복을 입은 채로 바로 대리운전을 하다 보니 그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그렇게 고생을 하자 주머니에 다시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쌓이진 않았다. 대부분 빚을 갚는데 썼다. 한번씩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우리 식이 이래 고생해가 우야노.”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 나는 호기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걱정도 팔자다. 내가 누고, 엄마 아들 아이가. 걱정 마라. 내 다시 돈 벌 거다.”

<어머니의 건망증, 알고 보니… >

 

이후 자동차 영업은 꾸준히 매출이 오르고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이제 좀 숨을 돌렸다 싶을 즈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기둥 같은 어머니에게 어떤 변화가 찾아왔다. 한번은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데 반찬 투정을 했다.

“너거 엄마 요새 나이가 들어가 그런가 간을 못 맞춘다. 국도 짭어가 몬 묵겠다.”
밥도 자주 태운다고 했다.
“건망증인가 보네요. 차츰 나아지겠지요.”
찜찜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이 탓이겠거니 했다. 생각이 바뀐 건 둘째 돌잔치 때였다. 돌잔치에 온 동네 후배 하나가 이렇게 귀띔했다. 
“헹님요, 어무이가 좀 이상합디다. 병원에 한번 가 보는 기 안 좋겠습니꺼.”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그저 나이 탓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된다. 뒤늦게 병원에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치매’진단을 내렸다. 병원을 다녀오고 난 후부터 더 증상이 심해졌다. 우선 변덕이 심해졌다. 어린아이처럼 툭 하면 삐쳤다가 금세 호호, 웃었다. 물건을 부수고 다치는 일도 많았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를 찾아갔다. 내가 가면 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엄마 내가 오니깐 좋나?”
같이 공기놀이를 하면서 물었다.
“좋다.”
과자를 입에 넣어 오물거리며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락없이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여자아이였다. 한 번은 집으로 가니 어머니가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
“엄마 지금 뭐하노?”
“니 좋아하는 고디국(올갱이국) 끼리고 있다. 있어봐라. 금방 해줄게.”
나는 엄마가 내민 빈 그릇을 들고 먹는 시늉을 했다. 엄마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가 먹는 것을 지켜봤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끼니마다 끓여주시던 올갱이국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어머니의 치매가 10여 년이 넘어가자 가족들도 모두 점점 지쳐갔다. 그러는사이 나도 어머니에게 조금씩 소홀해졌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된다.

<어머니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어느새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도착했다. 이삼십 분만 더 달리면 병원에 도착할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면 어머니에게 죄송하단 말을 먼저 건네야지 싶었다. 대답을 못할 만큼 힘들 수도 있을 테니까 “내 말 알아들었으면 손가락만 까딱해 달라.” 고 할 생각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단 말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병원으로 가는 내내, 나는 어머니에게 건넬 마지막 말을 무수히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도착했단 말을 들으면 얼굴에 미소를 띨 지도 몰랐다. 치매가 말끔하게 걷히고 맑은 정신으로 마지막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그러나 소망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형에게 전화를 걸어 병실이 어디냐고 했더니 “바로 장례식장으로 오라.”고 말했다.
“엄마!”

어머니는 뜻을 알고 불렀을까. 포기하려고 해도 마음에서 떨쳐지지 않는 것,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것, 어머니의 인생에는 온통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나마 치매가 걸린 10년 중 3년은 아버지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젊은 시절 술 좋아하는 아버지와 못된 송아지처럼 함부로 굴었던 나에게 시달린 위로는 어느 정도 받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내 어머니의 삶이 온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편으론 이런 마음이 든다. 어쩌면 어머니는 애당초 아버지나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어머니는 깊은 한(恨) 같은 그리움을 안고 사셨지만, 자식들에게 늘 원망 없이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어머니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나는 수입차 판매보다는 정비와 교통사고 처리 같은, 사후관리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그것이 나를 찾아주는 분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나쁜 마음 없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가 힘겹게 살아내신 삶에 대한 보상이자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는 늘 나에게 “니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셨다. 그 소망은 돌아가신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나는 그때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다가 금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것이 가슴에 사무쳤다. 장례식 내내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심지어 친구들 얼굴도 못 알아봤으니까. 어떤 이들은 큰 상심을 겪으면 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아예 하늘 자체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아키라메마쇼우토 와카레테 미타가, 난데 와스료우 와스라료유카…….”
어머니 생각이 간절해지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가 부르던 일본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가사의 의미도,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저 기억나는 대로 불러보는 거였다. 가사의 뜻을 알게 된 건 몇 달 전이었다.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반주로 소주를 마셨다. 술기운 때문인지, 어머니 기일이 다가와서인지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노래 알 듯도 한데.”
나이 지긋한 외과 의사 한 분이 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다가 “내가 다니는 노래 모임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손 소장, 그거 엄청 옛날 노래라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 1940년 이전에 나온 노랜데.”
어머니는 아마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불렀을 것이다. 대개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가사가 궁금했다.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재우쳐 말을 이어갔다.
“그게 연애 노랜데, 이별하고 뭐 그런 내용이야.”
그는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나서 “이 노래 맞지”하고 재차 확인한 뒤에 가사를 풀어줬다.
“포기해 버리려고 헤어져 봤지만, 어찌 잊을 건가 잊을 수 있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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