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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평등하다

생태 독서모임 ‘시루떡’이 들려주는 생태 인문 이야기

  • 입력 2014.10.16 00:00
  • 수정 2015.07.20 12:42
  • 기자명 김광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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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물 건너온 브랜드 커피만 찾는 아가씨를 ‘된장녀’라고 했다. 이제는 된장녀 기준이 커피에서 물로 바뀌었다. 어떤 물을 마시냐에 따라 계층이 나누어진다. 계층 중에서 최상위층은 프랑스에서 물 건너온 물을 마신다고 알려져 있다. 소시민은 국산 생수를 마신다. 수돗물에 입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옛날엔 물을 공동관리했다
 과거에는 물만큼은 평등했다. 지역마다 수원지는 달랐지만 한 동네 사람들이 같은 물을 마셨다는 점에서는 물은 곧 평등을 의미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물을 공동으로 관리했다. 이를 드러내는 속담들이 있다.
 물이 공동 관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는 풍수지리다. <택리지>는 복거총론에서 ‘어떻게 지리를 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곧장 ‘물’을 언급한다.
 ‘먼저 수구(水口)를 보고...’ 뒤에선 보다 단호한 언급이 등장한다. ‘무릇 물이 없는 곳은 자연히 살 곳이 못 된다. 산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토질이나 강이 흘러드는 방향과 모양은 한 집이 책임지거나 혜택을 보는 사안이 아니다. 우물을 몇 개씩 파더라도 결국 같은 물을 마시게 마련이다. - 한 동네에 흐르는 물을 ‘에비앙’급과 ‘일반생수’급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물 없는 곳은 살 데가 못 된다”
 농업용수도 공동으로 관리했다. 앞서 언급한 천방도 그렇지만 가뭄이 들면 마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의 물을 골고루 끌어다 쓰기 마련이었다. 물론, 저수지에서 가까운 논에서 물을 독점하는 바람에 아래에 있는 논밭 주인들이 반발하는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비약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물 문제는 지나친 개인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는 도시의 강의 아무리 더럽혀져도 “나는 물 건너온 물 사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태무심하다면 그보다 더 한심한 노릇이 어디 있을까. 생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내가 오염시킨 환경은 반드시 나에게 해를 끼치기 마련이다. 잠깐은 나 혼자 깨끗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
 물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다시 살려야 한다. 사람들이 마을 숲과 우물을 공동 관리하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는 어떤 물을 마실까>를 쓴 이태관 교수(계명대)가 주장한 ‘도랑 살리기’가 눈에 번쩍 뜨였다. ‘내 집’에서 쓰는 물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수관을 땅에 묻지 말고 도랑을 만들어 흘려보내자는 이야기다. 설득력이 있다. 눈으로 보면 물을 조금씩이라도 덜 쓰고, 화학세제도 자제할 것이다. 그러면 강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해질 것이다.

물을 다시 공공재로 돌려야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정수에는 한계가 있다. 덜 오염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이면 수도꼭지에 그냥 입을 대고 물을 마실 날도 오지 않을까.
 물을 다시 공공재로 돌려야 한다. 그저 ‘관리자(정부)’에게 볼멘소리를 하거나 “난 사먹으면 괜찮아”하고 관심을 끊을 게 아니라 늘 우리 곁에 보고 돌보아야 할 생명체로 여겨야 할 것이다. 생태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더럽히거나 파괴해야 하는 것들에 연민을 가지고 보듬는 것, 훼손을 최대한 늦춰 자연 스스로 되살아날 여유를 주는 것.

박태순 <한국예다문화원 원장>

■ ‘시루떡’은 대구경북 지역에 있는 영유아 교육기관의 장(長)들과 직원들, 관련 단체의 CEO들이 격주로 모여서 생태와 인문 관련 사적을 읽고 토론하는 대구숲유치원협회 산하 정기 독서ㆍ연구 모임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문의010-2686-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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