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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친절하지 않으면서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 입력 2024.03.07 11:17
  • 기자명 이진숙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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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걷는데 눈앞에 작은 집이 나타났다. 새를 관찰하는 집(bird house)이다. 눈에 띄지 않게 나무로 지어졌는데, 안에는 망원경이 비치되어 있고, 좁은 선반과 의자 몇 개가 있다. 나지막한 유리창은 좁고 길어서 새를 바라보기에 좋다. 주변이 몹시 조용한데도 조용히 해달라고 쓰여 있다.

영국에 가면 동물을 많이 본다. 정원에서 새들을 보고, 강에서 오리와 백조를 본다. 템즈강 옆 울타리 안에서 염소를 만나고, 큰길에서 토끼와 마주치고, 산책하다가 사슴을 발견한다. 친구 제니의 집에서는 옆집에 날아든 공작새까지 봤다. 영국인은 동물과 함께 살고, 공작새도 주택가에서 함께 산다.

개는 영국인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집안에서 같이 살고, 매일 함께 산책하며, 카페나 레스토랑에도 데려간다. 가게 앞에는 개를 위한 물그릇을 놓아두고, 펍에서는 개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준다. 개는 슈퍼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책을 읽는 남자 곁에 엎드려 있고, 앞서가다 뒤돌아서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할머니를 지켜본다. 믿을 만한 친구, 함께 있어 주는 친구, 의지가 되는 친구가 되어 준다.

영국인은 동물에게 친절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도 친절하다. 휴가 때는 이웃끼리 서로의 빈집을 봐주고 우편물을 받아준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 날에 쇼핑센터에서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비옷을 나눠주는 서비스가 있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교사와 부모들이 방과 후에 소방관의 아이들을 데려가 돌봐주는 시스템도 있다.

친구들과 함께 리즈의 집에 가던 날, 스텔라가 내게 말했다. 리즈가 지금 암 투병 중이므로 암이나 죽음 얘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니키가 리즈에게 손으로 만든 리본 꽃을 선물할 때, 나는 집안 곳곳에 간직한 작은 물건들을 보았다. 이야기와 웃음이라는 즐거움을 주고받고, 헤어진 후에는 서로에게 이메일로 무엇에 감사한지 다시 한번 표현했다.

안드레라는 여인은 전쟁 중 콩고에서 친절클럽 Kindness Club(1957년 슈바이처의 원칙이었던 생명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세워진 어린이 교육 단체)을 열어 동물에게도 생각과 감정이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동물 이야기를 하느냐고 따지는 이에게 그가 말했다. “저는 어린이들에게 동물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어린이들이 서로에게도 친절해집니다라고.

영국인은 동물에게 친절해서 서로에게도 친절해진 걸까? 아니면, 서로에게 친절해서 동물에게도 친절해진 걸까? 영국에서는 동물학대방지협회가 아동학대방지협회보다 훨씬 더 먼저 생겼다는데, 그건 어째서일까? 나는 영국인에게서 세심한 배려, 정성스러운 마음, 오래 간직하는 마음, 챙겨주고 돌봐주는 마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친절의 모습들을 보았다. 영국에는 친절이 아직도 남아 있고, 우리보다 더 많다.

나는 매년 영국에 갈 때마다 베란다에서 기르는 꽃 걱정에 난감해진다. 누군가에게 화분에 물을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워서다. 빽빽한 아파트 숲에 살면서도 우리에게는 도움을 주는 일과 친절을 베푸는 일이 드물어졌다. 아니, 사라진 거 같다. 각자도생이란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영국이 내가 상상한 나라가 아니듯이, 영국인도 내가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다. 싹싹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지만 친절하다. 차갑고 쌀쌀맞아 보여도 따듯하고, 무뚝뚝한 거 같아도 유머러스하다. 처음 만나면 과묵하지만, 친해지면 말이 많아진다. 딱딱한 말투는 영국식 액센트일 뿐, 속내는 더없이 인간적인 사람들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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