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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명문 사기장 가문의 280년 발물레, 이제야 문화재 신청하는 사연

9대째 이어온 발물레의 이력은 곧 가문의 역사
원형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조선 후기 발물레
조카 소송으로 2년 동안 분쟁, 대법원 최종 승소 판결
김남희 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 “문화재 등재 추진”

  • 입력 2023.10.18 09:00
  • 수정 2023.10.20 10:38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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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

“발물레를 대할 때마다 이 물레 앞에서 도자기를 빚으시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신산한 세월 속에서 온 정성을 쏟아 발물레를 돌리던 선조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김남희 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은 그렇게 세속을 떠난 수도승처럼 발물레를 돌리며 외롭고 힘든 사기장으로서의 삶을 대대로 이어온 집안의 정신이 오롯하게 담겨 있는 망댕이 사기요와 발물레 이야기를 꺼냈다.

 

 

 

물레의 이력은 곧 가문의 역사

김 소장에 따르면 물레의 이력은 곧 가문의 역사다. 발물레는 9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영남요 가문의 1대 할아버지인 김취정(1730년대 생으로 추정) 사기장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 발물레 하나를 제작하는데 쌀 세 가마니가 들었다. 지금 사람들이 보면 투박한 ‘도구’지만 당시 서는 좋은 목재(박달나무)와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고급 장비였다.

이 물레와 함께 가문의 역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2대 김광표(1761-?) 사기장이 충북 단양에서 상주시 화북면으로 삶터를 옮기고, 이후 3대 김영수(1804-?) 사기장이 문경읍 관음리로 이주하면서 문경을 대표하는 사기장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터전을 옮길 때마다 선친으로부터 이어받은 물레를 함께 가지고 갔다.

1898년 영남요 가문은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5대 김운희(1860-1929) 사기장이 그해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분원의 사기장으로 발탁되었다. 그곳에 왕실도자기를 제작하는 사옹원 분원이 있었다. 그때 다섯 살이던 6대 김교수 사기장도 아버지와 함께 분원에 머물렀다. 사기장은 훗날 막내아들인 김정옥 사기장에게 조부의 활동과 당시의 풍경, 함께 작업했던 이들의 이력 등을 일러주었는데, 그의 딸인 김남희 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이 이와 관련된 사료들을 발굴해서 학계에 알리게 되면서 이 가문의 정통성 확립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전해진 가문의 기억이 당대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부자는 10년 남짓 왕실도자기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사옹원 분원이 해체되었고 사기장들도 직위를 잃었다. 그때 다수의 사기장들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인근에 남아 도자기 공장을 세우거나 고용이 되었다. 김교수 사기장도 그곳에 머물다 1917년 고향인 문경읍 관음리로 돌아왔다.

사기장(沙器匠)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담당했던 사옹원 분원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김정옥 사기장은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이다. 김 사기장은 전통을 이어온 도예 가문 영남요의 7대 명장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왕실 자기를 만들었던 사옹원 분원의 사기장 조부 김운희(1860~1929) 사기장의 전통백자 제작 기술을 전승받아 계승해왔다. 일제강점기 분원의 해체로 소멸할 뻔한 조선백자 기술이 문경에서 조선의 마지막 사기장인 김교수(1894~1973) 사기장을 통해 김정옥 장인에게로 이어졌다.

왕실의 그릇을 빚던 사기장인의 물레가 문경에서 이어졌다. 김 사기장은 문경에서 도자기조합의 구심점으로 활동했다. 왕실도자기를 만든 ‘최고의 사기장’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리더 역할을 맡았다. 기술적으로 봐도 당시 문경에서 항아리 형태의 도자기를 빚을 수 있는 사람은 김교수 사기장밖에 없었다.

해방 후 전쟁이 터지기까지 5년 동안 호황이 찾아왔다. 보부상이 50명씩 드나들며 줄을 서서 서로 그릇을 더 많이 가져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유기그릇을 모두 걷어가는 바람에 빚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현대식 양은 그릇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나 누구에게도 도공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때 선뜻 막내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자청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김정옥 사기장이었다. 흙일하는 일꾼에게 줄 급여도 빠듯한 집안 형편을 보고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어머니는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왜 느지막하게 얻은 어린 막내를 막지 않으냐”고 화를 냈고, 아버지는 그저 먼 산만 바라봤다. 1957년의 일이었다. 

아버지 김교수(1894-1973) 도공의 물레는 그렇게 아들 김정옥(82) 사기장(인간문화재)에게 맡겨졌다. 혹자는 “땔감이 될 위기에 처했던 발물레가 그렇게 소멸의 위기를 벗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8쪽을 할애한 도자(陶瓷) 가문의 이야기

가문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87년이었다. 그해 김정옥 사기장이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포도넝쿨문이 그려진 백자 사발대접’을 출품한 것이 계기였다. ‘뿌리 깊은 나무’ 발행인과 문화재 전문가가 영남요를 방문했고, 해당 잡지에는 8쪽에 걸쳐긴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 안에 김교수 선생 이후 가문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자세히 담겨 있다. 기사에 따르면 선생의 세 아들 중 맏형은 막내동생(김정옥 사기장) 뒷수쇄나 하면서 그저 관음리 망댕이요 옆에 눌러살고 있고, 둘째는 다른 마을로 이주한 상태였다. 막내인 김정옥 사기장이 문경 읍내에 영남요를 따로 차리고 운영하면서 관음의 사기점에 수시로 들러 그릇을 만들며 가업을 잇고 있었다. 김 사기장의 발끝에서 이 가문의 물레가 쉼 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이 물레가 240년이 넘는 긴 현역 활동을 마치고 은퇴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4년 선친 김교수 사기장때 친분이 있던 일본인 도예가가 선물한 물레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 물레는 보전을 위해 안전한 곳에 보관하기로 했다. 현재 물레는 문경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 1층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전시 코너의 벽면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젊은 시절 고락을 함께했던 물레에 대한 김 사기장의 애틋한 마음이 담긴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물레를 대할 때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물레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선조들을 떠올립니다. 시련을 인내하며 혼신의 정신으로 이 물레를 돌리던 그분들의 마음, 그것이 나에게 단절의 위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한 힘이 되었습니다. 이 물레는 도자 장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 집안의 혼을 담고 있는 진실의 도량입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된 조선 후기 발물레

2021년, 은퇴 후 40년이나 영남요에 머물던 발물레와 관련해 갑작스럽게 ‘본적’ 논란이 일었다. 김 사기장의 큰형님(김천만, 1931-1989)의 아들인 조카 김영식(53, 조선요)이 발물레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그는 숙부가 아버지에게서 발물레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2년여의 재판 끝에 재판부(대구고등법원)에서는 ‘김정옥 사기장이 관음리 가마에서 이 발물레를 이용하여 사기 제작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김교수 선생으로부터 발물레를 증여받았을 개연성이 높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는 ‘김정옥 사기장이 1996년경 국가무형문화재 사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던 점 등에 의하면, 김천만과 김정옥 사기장이 함께 관음리 가마에서 일할 당시 사기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은 김정옥이라는 사실이 인정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지난 7월 13일 대법원 전원일치로 상고 기각이 결정되면서 280년 발물레의 주인이 법원에 의해 확증되었다.

소송이 끝나면서 백산헤리티지연구소는 미루어뒀던 숙제를 다시 시작했다. 발물레의 문화재 지정 작업이다. 김남희 백산헤리티지연구소 소장은 “조선 후기 도자 성형의 주요한 도구였던 전통 발물레의 실체를 원형 상태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가문의 유산”이라면서 “소송을 통해 발물레의 가치가 다시 한번 부각된 만큼 문화재 등재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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