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1900년, 일본은 독도에 관심도 없었다

1900년 10월 독도 칙령 발표에도 반응없던 일본
‘독도 강치’로 1904년에야 독도 가치 발견한 일본
신라 시대 우산국인 등 진작부터 독도를 인식한 한반도인

  • 입력 2023.10.10 09:00
  • 수정 2023.10.20 10:39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창근 대구대학교 교수
최창근 대구대학교 교수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되고 인천, 원산, 부산 3개의 항구가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한반도 주변에서 어업도 가능해져서 울릉도에 상륙해 무단으로 나무를 베고 어업활동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1881년 수토관(搜討官)이 울릉도에서 도벌(盜伐) 중인 일본인 7명을 적발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규원(1833~1901)을 파견해 울릉도를 조사하게 했다. 1882년 이규원검찰사를 파견되어 11일간 체류하면서 일본인과 섬을 조사했다.  조선인 141명, 일본인 78명을 확인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1883년부터 울릉도 재개척 사업을 시작해 주민을 이주시켰다. 1900년 10월25일에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릉도를 독립된 군으로 승격시키는 한편 지방행정 장관인 군수로 하여금 울릉도와 독도(석도)를 관할하도록 했다.

이 대목에서 미스테리한 부분이 하나 있다. 임금이 이규원을 파견해 울릉도를 조사하는 한편, 다양한 조치들을 취하고 칙령에도 독도를 명기했으나 이규원의 보고서에 는 독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조사관이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으나 임금의 칙령에는 독도가 한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규모나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관심이 아닐 수 없다. 해양수산부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섬은 3,348개에 이른다. 그중 2023년 현재 사람이 사는 섬은 400여개이고 독도처럼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섬은 2,918개다. 그 숱한 섬 중에서도 유독 독도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할 수 있으나 ‘독도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왜 그토록 강렬하게 기억되었는가’하는 물음을 끌어낸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한반도인들이 그 작은 돌섬에 관심과 애착을 가지게 된 과정을 일본이 그대로 밟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선, 애당초 일본은 독도에 관심이 없었다. 고종이 칙령을 발표했을 때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관례상 칙령이 관보(제1716호)에 실었을 때 서울에 있던 외국공관은 이를 대부분 확인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 칙령의 행정조치에 대해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울릉도는 명백하게 일본의 땅이 아니었기에 할 말이 없었을 것이고, 독도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안용복이 일본을 오가며 이의를 제기했을 때도 일본의 관심사는 울릉도(‘다케시마’)였지 독도가 아니었다. 이때도 독도는 조선만 관심을 가지는 혹은 인지하고 있는 섬이었다.

일본이 독도를 ‘발견’한 계기는 강치였다. 우리에게는 독도 강치 멸종의 주범으로 통하는 일본의 어업인 나카이 요자부로(1864∼1934)가 일본의 독도 야욕의 방아쇠 를 담겼다. 그는 강치를 잡으려고 1904년에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냈는데, 강치 가죽은 소가죽보다 튼튼해서 고급 가방이나 군용 가방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독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었다. 마침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던 일본은 이를 승인한 뒤 ‘비밀리에’ 시마네현에 편입하고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는데 필요한 망루와 통신시설을 설치했다. 민간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로 정부는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점령한 것이다. 불과 1~2년 사이에 너무도 요긴한 섬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독도 편입 근거는 ‘주인 없는 땅’(無主地)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시마네현 고시가 탄생한 배경이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강치에 매료됐지만 독도에는 강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도의 바다 밑에는 미역과 천초, 전복, 소라 등이 풍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열도와 중국 다롄과 칭다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 동북아 일대를 다니며 물질을 했던 제주 해녀의 ‘원양 물질 기지’ 중의 하나가 독도였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작은 돌섬이지만, 신라의 이사부 이전부터 바닷 사람들에게는 강치부터 해산물까지 그야말로 ‘먹고 사는데’ 정말 보탬이 되는 바다의 옥토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섬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해도 나침반도 없던 옛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 섬을 오가는 건 불가능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독도는 작았지만 다행히 눈에 보였다. - 아무리 날씨가 안 좋아도 볼 수 있는 죽도·관음도와 달리 독도는 ‘바람이 불고 청명한 날씨’에 볼 수 있었다. 주인 없는 버려진 섬을 일본이 최초로 발견했다는 주장은 어떤 면에서 봐도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고종이 칙령에 쓴 ‘석도(石島)’는 ‘독도(獨島)’가 아니라는 주장도 펼쳤다. 독(獨) 자가 가진 의미 중의 하나가 ‘돌’(石)다. 또한 당시 울릉도에 대거 이주해 살아가고 있던 전라도 사람들이 ‘돌’을 ‘독’으로 발음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돌섬’을 중앙정부는 울도군을 설치하는 칙령41호에서는 문서서식인 한자로 ‘석도’로 표기되었고, 대다수 전라도 출신인 울릉도 주민들은 속칭 ‘독도’라고 표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1906년 심흥택 보고서에는 ‘본군 소속 독도(獨島)’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 단어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요컨대, 한반도인과 일본인이 독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한반도인이 독도를 먼저 선점한 것은 맑은 날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울릉도인들이 고려 시대에 왕건에게 공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한반도의 어업인들이 1904년에 이르도록 해산물의 보고인 독도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 안 된다. 독도는 작지만 중요한 땅이었고 그런 이유로 역사의 중요한 대목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고종황제가 제대로 탐사하지도 않은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칙령에 포함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작권자 © 대구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