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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모든 것이 그대로 있고, 그대로인 만큼 아름다웠다

  • 입력 2023.09.22 09:00
  • 수정 2023.10.20 10:39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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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그대로 있고, 그대로인 만큼 아름다웠다. 영국의 시골에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고,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조금만 벗어나도 만나는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고, 사방이 뻥 뚫려있는 하늘은 더 크고 넓다. 동네 공원에는 넓은 잔디밭이 잘 다듬어져 있고, 세월이 느껴지는 아름드리나무의 둥지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4년 만에 온 영국이 머릿속에 담아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작고 오래된 집들이 옆집과 벽을 공유하며 나란히 붙어 있다. 죄다 2, 3층 높이로 나지막하고 생김새도 비슷하다. 돌, 나무, 벽돌로 지어졌고, 경계는 빽빽하게 높이 자라는 나무로 나누어졌으며, 정원에는 온갖 꽃들과 나무로 채워졌다. 바라보면 눈이 즐겁고,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조용해서 평화롭기까지 하다.

영국인은 정원이 딸린 낡은 집에서 낡은 가구와 함께 산다. 아직도 수동기아 자동차를 몰고, 현관문을 열쇠로 열어서 집에 들어가고, 찬물과 더운물이 따로따로인 수도꼭지를 사용한다. 자주 가까운 숲길을 혼자 걷고, 아이들과 개를 데리고 산책하며, 자전거를 탄다. 종종 펍(pub)에서 맥주를 마시고, 티샵(tea shop)에서 차를 즐긴다. 

근처에 있는 펍이 초가지붕을 얹은 전통가옥으로 1352년생이다. 천장이 낮아 어두컴컴하고, 바닥은 여기저기 높이가 다르다. 머리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곳곳에 쓰여 있다. 테이블은 투박하고 흠집이 많으며, 의자는 짝을 맞추지 않아 제각각이다. 모든 게 낡았는데도 초라하지 않고 볼품없지 않다. 

오래된 것에도 마음을 끄는 게 없지 않다. 오래되니까 자연이 더 아름다운 거다. 낡으니까 집이 더 아늑하고, 역사가 깊은 펍이라서 더 고풍스럽고 운치가 있는 거다. 오래된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니까 더욱더 아름답다.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아름다움, 고스란히 간직한 오래된 아름다움, 나는 이 아름다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려온다. 멀리 시골에까지 찾아온다. 옛날 찻집에 서 차를 마시려고, 아직도 굽고 있는 옛날 빵을 맛보려고 줄을 선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영국만의 아름다움을 눈과 마음에 담으려고 기꺼이 시간을 낸다. “아, 나도 이담에 이런 곳에 살 거야” 한국에서 온 젊은이의 말이 나이 든 내 마음과 똑같다.

“결과적으로 삼십여 년에 걸쳐 쓴 글이지만, 어조와 문체에 크게 변함이 없고, 이제 나저제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다. 발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동안 포기할 수 없는 전망 하나와 줄곧 드잡이를 해온 것 같기도 하다.”

‘밤이 선생이다’에 쓴 황현산 교수의 글을 읽으며 나는 삼십여 년에 걸쳐 지켜본 영국을 떠올렸다.

영국은 새집보다 오래된 집이 더 비싼 나라다. 영국인은 런던보다 시골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변화를 원하지 않으니까 변화하지 않는 거다. 이렇게나 넓고 평평한 땅이 많은데도 고층빌딩과 아파트를 짓지 않고, 필요한데도 도로를 넓히지 않고, 불편한데도 공원에 편의시설과 화장실을 두지 않는다. 누군가 공원과 도로의 잔디를 깎고, 누군가 무너진 돌담을 쌓는다. 보이지는 않아도 모두가 그런 노력을 했을 거다. 

온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도 영국만은 달라지지 않으려는 듯하다. 백화점에 최신 최고급 물건이 많은데도 열광하지 않는 듯하다. 100년, 200년 된 집을 수리하며 살고,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올드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시골길을 달린다. 강에서 배를 타고,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멈춰서서 새를 관찰한다. 자주 가족과 밥을 먹고, 친구들과 바비큐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이 어떤지는 말하지 않겠다. 흘려버린 것이 아쉽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안타깝고, 잊어버린 것이 그립다. 나는 영국에서의 삶이 몹시나 불편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부럽다는 생각을 접어두기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진정으로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변화하지 않는 영국에 답이 있다는 게 아니라 영국에도 그 답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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