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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입는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 입력 2023.08.31 09:00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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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고백하건대, 나는 아직도 새 옷을 산다. 출근할 일도 없고, 약속도 별반 없는데, 게다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옷에 열광한다. 분별 있게 살기로 다짐까지 했는데도 옷 앞에서는 분별이 무너진다. 늙어가는데 옷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굳이 새 옷을 살 필요가 있을까? 도대체 나는 왜 그러는 걸까?

늙을 줄은 알았지만, 내 몸이 이렇게 무너지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키도 작은데, 늘어난 체중으로 펑퍼짐해진 몸매는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이자 내 생에 최악의 조건이었다. 더 이상 젊고 예쁘게 보일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대신, 멋지게 늙기를 선택했다.

멋진 노인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텔레비전에서 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인 작가를 보았는데, 푸른 셔츠에 연한 회색 양복을 입은 노신사가 어머나! 알록달록한 빨간 양말을 신고 있다. 묵직함과 진지함 뒤에 감춰진 자유와 여유가 멋있어서 나는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나이 지긋한 멋쟁이 영국 여인들도 봤다. 독특한 액세서리와 함께 과감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일하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자꾸만 눈이 갔다. 자신의 나이에 대해 너무나도 편안해하는 모습이 당당해 보였고, 두꺼워진 허리와 불뚝 튀어나온 팔뚝에도 아랑곳없이 적극적으로 패션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할 수 있다면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고 싶었다.

옷은 매우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자기표현이다. 옷에는 착용한 사람의 취향과 성향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열망하는지와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반영된다. 집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듯이, 글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듯이, 옷도 보여주고 말해준다. 옷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보그’의 전설적인 편집장 알렉산드라 슈먼은 ‘옷의 말들’에서 “패션은 언제나 젊음과 새로움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에 도전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에게는 새 옷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새 옷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해줄 것 같다.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보일러 수트를 샀다. 칠십이 넘은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입는다는 말에 나는 그 옷을 입은 디자이너의 멋진 삶을 떠올렸다. 일체형 옷이라 키가 작은 나에게 어울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단추들을 죄다 풀고 다시 채우느라 몹시 불편한데도, 나는 덜커덕 입기로 마음먹었다.

‘멋’은 여전히 나에게 흥미로운 단어다. 이제는 멋진 옷 앞에서 주춤하고 싶지 않다. 멋진 모습을 기다리고 싶지도 미루고 싶지도 않다. 전에는 입을 생각도 못 했던 옷, 젊고 날씬했던 때도 입지 않았던 옷, 어울릴까 망설였던 옷도 이제는 입고 싶다. 멋진 옷을 입고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신나게 경험하고 싶다.

알렉산드라 슈먼은 또 말했다. “‘신경 쓰지 말렴, 아가.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는단다.’ 이는 어머니가 그 자신이나 나, 여동생이 큰 행사를 위해 옷을 차려입을 때마다 했던 일종의 가족 농담이다. 또 무엇을 입든 그것이 정말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데도 걱정할 때마다 자조적으로 쓴다. 그러나 어떻게 입는가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이 말이 농담인 것이다”라고.

젊음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노후를 멋지게 맞이하고 싶은 거다. 늙어진 뒤에도 멋이 있을 거다. 아름답게 빛나는 멋, 깊고 은은한 멋, 유행을 따르지 않는 자신만의 멋, 그래서 젊음은 감히 쫓아올 수 없는 멋이 있고말고. 여전히 멋에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종국에는 더 이상 멋지게 입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나 자체로 빛나고, 내 모습 그대로 멋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새 옷을 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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