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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

  • 입력 2023.07.25 09:00
  • 수정 2023.07.25 11:05
  • 기자명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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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 딸이 이번에는 셀카를 찍어 보냈다. ‘외할아버지의 안경’을 쓰고, ‘외할머니의 목걸이’를 하고, ‘아빠의 바지’를 입고 있다. 수십 년 된 안경테를 폴리시하고 새 렌즈로 바꾸니 빈티지가 따로 없다. 이제는 입지 않는 통 넓은 양복바지가 돌고 돌아 다시 온 하이 패션 같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로 그리고 딸에게 내려온 진주목걸이는 여전히 손색이 없어서 유행과 시대를 뛰어넘는 클래식 아이템이고 말고. 사용했던 물건을 물려주고 또 물려받는 영국의 귀족이 생각나 “귀족 같네”라고 했더니, 딸이 풋 하고 웃었다.

대학 시절, 나도 아버지의 가방을 들고 다녔다. 아버지의 카디건도 입고 다녔는데,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넌 옷을 입은 거냐, 걸친 거냐?”라며 빙그레 웃었더랬다. 우리 집거실에는 가죽으로 만든 아버지의 여행 가방과 엄마의 앉은뱅이 화장대가 놓여 있다. 책꽂이에는 책을 손에 든 아버지의 사진이 세워져 있고, 벽에는 젊고 예뻤던 엄마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나는 아버지의 책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엄마의 얼굴은 내 마음속에 담겨 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나를 맞이했던 환한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생의 막바지로 가면서 말을 못 하게 된 엄마가 눈에 반가움을 가득 담고 입을 크게 벌려 함박꽃같이 웃으며 알려줬다. 엄마의 사랑을 모를 리 없건만, 엄마 전화기의 단축번호 1번이 나란 걸 알았지만, 나는 잘 몰랐던 거다. 엄마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면서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딱 한 번 엄마에게 억울한 일을 일러바친 적 있다. 이해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몰랐고, 잘못을 저지른 게 나인지 상대인지 분명치 않아서 어리둥절했다. 방법을 모른 채로 나자신과 옥신각신하면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음 쓰지 마라. 세상이 다 갚아준다” 엄마의 말이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나의 심정을 누그러뜨렸다. 나는 다시평범한 시간을 시작할 수 있었고, 품위를 지키면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말도 내 가슴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오십이 넘은 내가 처음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알았나 보다.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게 보였나 보다. “넌 잘할 거다”라는 한마디 말이 마치 등을 두드려주는 아버지의 두툼한 손 같았다. 아버지가나를 믿어준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미리 알지 못했다.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분들이 지금도 문득문득 그리워질 줄은. 필요할 때마다 그분들의 말이 수시로 나에게 소리 내어 가르쳐줄 줄은. 여전히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 줄은. 내가 아버지와 엄마를 잘 몰라서, 아는 게별로 없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함께 나눈 이야기가 너무 빈약해서 가슴이 아린다.

‘어떻게 늙을까’에서 다이애너 애실이 말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거의 보이지는 않아도 실제적인 뭔가를, 유익하든 해롭든 간에 남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우리는 죽는다. 하지만우리는 남기고 또 남는다.

딸에게 내가 읽은 책을 물려주고 싶다. 밑줄을 그어 생각을 적어놓은 책을 읽으며, 딸이 내 마음을 슬그머니 엿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보고 느낀 것, 배워서 얻은 것, 마침내 깨달은 것들까지도 고스란히 물려주고싶다. 그것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의지할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딸은 나를 더 많이 닮아있다. “엄마가 이렇게 키웠잖아”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키운다고 그렇게 자라지는 않는다. 나를 보고,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스며든 거다. 그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달라지고, 닮으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닮는 거다.

나에게 무언가를 남긴다는 생각은 없었다. “훌륭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은데” 했고, “한 것도 없고 이뤄 놓은 것도 없는데, 뭘~” 했다. ‘어떻게’라는 의문도 없었고, ‘왜’라는 의심도 없었다. 그냥 살았다.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남기고 또 남는다.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많이 남는다. 속속들이 남고, 별거별거 다 남는다.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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