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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나이 듭시다’

  • 입력 2023.06.26 09:00
  • 수정 2023.07.03 15:20
  • 기자명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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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소개를 하려니까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태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막막했다. 전에 말했듯이 나는 생각나는대로 말하지 않고 생각한 후에 말하는 ‘이야기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의 이번 주제는 자기소개였다.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수년간 알고 지낸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일은 과거의 나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불러왔다. 마흔이 넘어 대학원에서 간 나는 무지하고 서툴렀다. “과제는 카페에서 확인하라”는데 “어느 카페로 가야 하나?” 할 정도여서 애먹었다. 남편이 그때 지어준 나의 묘비명, ‘지 무덤 지가 파다 죽다’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내 생각과 의지는 뒤로 제쳐둔 채로 사는 나 같은 주부들이 안타까워서, 오십 줄에 문화 공간 ‘클럽리’를 열었다. 암에 걸린 것은 불행이었지만,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던 남편의 생각이 비껴간 것은 행운이었다. 포기했던 ‘클럽리’를 다시 시작했을 때는 나름 비장했었다. 육십에 난생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참 이상하다.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자분자분 설득하더니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내가 한 것만이 나구나” “내가 살아낸 것만이 내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묻고, “멋지게”라는 답을 듣게 한다. 결정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어떤 안도감이 생긴다.

나에게 멋이란 삶을 좀 더 깊게 즐기는 일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챙기는 일이다. 매일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사는지를 살피는 ‘깨어있음’이다. 가진 것, 보고 느낀 것, 배워서 아는 것을 공유하려는 ‘나눔’이다. 평생 나에게 득이 될까 실이 될까 따져왔던 ‘계산’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는 ‘계산 없음’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여기 있는 동안 많이 공부하고, 좋은 일 많이 하세요”란 문장을 읽고, 나는 “사는 동안 멋을 공부하고, 멋진 일 많이 하세요”로 이해했다. 만만한 배움이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지만, 이상하게도 멋에는 하염없이 욕심이 난다. 건전한 의욕이고 간절한 희망이며 여전히 남은 생의 목표이다.

이제는 ‘나로 살기 힘든 세상’으로부터 ‘나로 사는 세상’으로 옮겨 가도 되지 않을까. 이쪽을 다 보았으니까 저쪽을 바라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과 마음이 일치되어도 되지 않을까. 불가능한 일을 좇아도, 좀 현실적이지 못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해 못 할 사람이 되어도, 좀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멋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자세히 살펴볼 의지가 있다. 멋을 찾아 그 가까이에 가보고 싶고, 멋이 내 일상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공부하면 좀 더 꿈꾸던 바에 다가가 있을 거다. 멋은 느껴지는 거니까, 희미하기는 해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사노 요코의 ‘그래도 괜찮아’에는 이런 말들이 나온다. “매일의 축적이 중요해, 공부는 축적이야. 알지?” “공부는 알면 알수록 재밌거든” “으음, 그때도 여전히 공부하고 계시더라. 공부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나” “지금 셰익스피어를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나이를 먹는 게 아까워서, 아까워서” 책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말들을 나는 끈으로 이어 묶었다.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듯, 멋을 공부하는 거다.

내 삶이 서론 몇 장 쓰다가 멈춘 소설 같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 같다.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노력과 꾸준함이 부족해서 포기한 일 같다. 늦게라도 완성하고 싶고, 미흡하나마 잘 마무리하고 싶다. 상상하고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는 일을 만나보고 싶다. 드디어 마지막에는 올바르게 성공했다고 선언하고 싶다.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둔다. 인생은 마지막에 판가름이 나는 거고, 우리는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된다. 나는 멋지게 나이 들기로 했다. 아니, ‘멋지게 나이 듭시다’로 바꿔 말한다. 함께 멋지게 나이 들자고 다정스럽게 두 손을 뻗어 내미는 거다. 좋은 걸 혼자만 하겠다는 건 멋지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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