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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박항서보다 더 사랑한 ‘코리안’

베트남에 ‘베트남 타운’ 알리려 ‘덴도축제’ 방문
박항서의 축구 열풍도 ‘리 왕조 전설’의 실현?
봉화은어축제에 ‘베트남의 날’ 제정 결정
박닌성 부성장 “민요ㆍ수상연극 팀 등 보내겠다”

  • 입력 2023.06.16 09:00
  • 수정 2023.07.03 15:20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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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가장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세대공감의 장이자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리 왕조’의 역사를 강렬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노인과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가장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세대공감의 장이자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리 왕조’의 역사를 강렬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경북 봉화군 직원들과 베트남 박닌성 관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였다. 부엉꾸억투언(오른쪽) 박닌성 상임부성장에게 화산 이씨라고 밝히자 그는 꼭 잡은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경북 봉화군 직원들과 베트남 박닌성 관계자들이 만난 자리에서였다. 부엉꾸억투언(오른쪽) 박닌성 상임부성장에게 화산 이씨라고 밝히자 그는 꼭 잡은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베트남 박닌성의 뜨선시(市) 공무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려고 고급 식당에 들른 자리였다. 갑자기 정전이 됐다. 눈알을 잃은 실내는 굴속처럼 컴컴해졌다. 웅성대던 베트남인들의 목소리가 일시에 뚝 그쳤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는 듯 모든 것이 일시 정지 되었으나 베트남인들의 표정은 분주했다. 뭔지 모를 긴박함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는가. 그들에겐 50분 같았을 5분이 흘렀을 즈음 웅웅, 냉장고가 신음을 토해내더니 전등이 번쩍 눈알을 밝혔다. 천장에 달린 팬이 다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베트남인들도 그제서야 얼굴을 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베트남은 정전이 일상적이라고는 하나 한국에서 온 손님들 앞에서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니 적잖게 당황했던 듯하다.

 

봉화가 ‘베트남 타운’을 조성하려는 이유

베트남 방문 계기는 뜨선시에서 봉화군청과 화산이씨 종친회에 보낸 초청장이었다. 5월3일과 4일 해당 지역에서 ‘덴도(DO-temple)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베트남 최초로 중국의 책봉 시스템에서 벗어나 황제를 세운 ‘리(Ly) 왕조(1009~1225년)’의 여덟 황제를 기리는 행사다. 리태조의 즉위 기념일인 음력 3월14일에서 16일까지 축제를 연다.

봉화군청에서는 봉화군 봉성면에 ‘베트남 타운’을 조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 그와 관련해 뜨선 시와 박닌성의 지지와 응원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화산 이씨는 왜?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은 이 모든 교류와 사업 기획의 출발점에 화산 이씨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용상(1174~?)’이라는 화산 이씨 중시조의 존재가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었다.

베트남 식으로 ‘리롱뜨엉’으로 발음되는 이용상은 영종(李英宗)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나 800여년 전 (박닌성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6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화산 이씨 족보에는 이용상이 부하들과 함께 옹진에 진격해온 몽골 군 부대를 막아낸 것을 계시로 고려로부터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이라는 지명의 의미

봉화는 화산 이씨의 800년 세거지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화산 이씨 관련 유적은 봉화군 봉성면 창성리에 소재한 충효당이 유일하다. 충효당은 화산군의 14세손 이장발의 의병 활동과 순국을 기념해 세웠다. 화산 이씨들이 봉화에 정착한 계기는 화산군의 둘째 아들인 이일청의 안동부사 부임이었다. 화산 이씨가 세거한 지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우선 황해도에서 ‘영남(嶺南)’지역으로 내려온 것부터가 그렇다. 우리에게 영남은 경상도를 의미하는 익숙한 단어다. 베트남인들에게도 낯선 단어가 아니다. 베트남의 쩐 왕조 시절 14세기 후반‘영남척괴열전’이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여기엔 베트남의 신화와 전설이 담겨 있다. 책 제목의 ‘영남’은 베트남을 대신해 쓰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7~8세기부터 영남이라는 말을 썼다. 아버지(이용상)에게 고향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아들은‘영남’이란 단어 자체가 주는 뉘앙스에 마음이 쏠리지 않았을까. 

이용상이 고려로 올 즈음 고려의 왕이 큰 새가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이용상은 큰 새였다. 봉화는 말 그대로 큰 새의 고장이다. 봉화(奉化)의 ‘봉’자가 봉황을 연상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충효당이 자리 잡은 봉성(鳳城)은 우리말로 풀어쓰자면 ‘봉황의 둥지’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까이 봉화산이 있고, 물야면 압동리 사골마을 ‘진개골’입구의 바위에 ‘봉명동(鳳鳴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봉명’은 봉황의 울음소리를 일컫는다. 충효당이 내려다보고 있는 창평리의 옛 지명은‘창해(蒼海)’인데, 이는 들이 넓은 바다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화산군을 연상시키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 봉화다. 또한 봉화에 둥지를 튼 큰 새의 후손들은 결국 넓은 바다를 건너 고향을 방문했다. 필자는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창평 들을 한 바퀴 돌곤 하는데 새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형상화한 퍼포먼스라고 해도 될까 모르겠다.

 

베트남 경찰에게 “리 왕조의 후손”이라고 했더니...

봉화는 큰 새의 둥지이자 그 새가 남긴 이야기들이 옹송하게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산군의 이야기는 후손들의 입으로 지금까지 전해져왔다.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그 기억들마저 희미해졌을 것이다.

화산 이씨들은 어린 시절부터 “너희들은 왕손의 후손이다. 자부심을 가져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다. 전하는 이야기 중에는 화산군의 인품과 관련된 것들이 있다. 베트남에서 새로 권력을 잡은 진씨 일족들이 장례식에 모인 황족들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 화산군만은 이 자리에 나가지 않아 목숨을 구했다. 집안 어르신들에 따르면 진씨 일족 중에 “이용상 같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살해계획을 미리 귀띔을 해준 덕분에 횡액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려에 귀화해 주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부하들을 훌륭하게 통솔해 몽골군을 막아낸 행적이 그의 인품과 용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 왕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존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문중의 동생 하나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 리 왕조 관련 이미지를 걸어두었다. 한 경찰관이 와서 그 이미지에 대해 물어 보기에 “리 왕조의 후손이다”라고 밝히자 갑자기 그 동생에게 깍듯하게 예를 차리더라고 했다.

이들의 존경심은 전설도 만들었다.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고 화산군의 후손들이 덴도 사원을 처음 방문했을 했을 때, 사원 주변의 노인들이 “리 왕조의 후손이 돌아오면 베트남이 부흥한다”는 전설이 있었노라고 알려주었다. 수교 이후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발전을 했으니 아주 틀린 전설은 아닌 듯하다. 그 중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컸다. 현재 삼성전자가 베트남 GDP의 24%를 차지할 정도로 큰 기여를 하고 있고, 수도인 하노이에서 박닌성의 박닌시로 출근하는 통근버스만 매일 900여대에 이른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물고기 은어의 은유

봉화군에 들어설 ‘베트남 마을’은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와 발전의 역사에서 화룡정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800년 인연을 돌아보고 미래를 구상하는데 이보다 더 근사한 역사적 장소가 있을까 싶다.

베트남인들은 ‘베트남 마을’에 대해 무척이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박닌성의 부엉꾸억투언 부성장은 박현국 봉화군수에게 봉화군의 베트남 마을 조성 사업에 관한 내용을 중앙부처에 보고해 베트남 전체가 각별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박 군수가 7월29일부터 8월6일 사이에 열리는 봉화은어축제 기간에 ‘베트남의 날’을 제정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부엉꾸억투언 부성장은 “미술작품을 비롯해 전통민요 및 수상연극 팀을 보내겠다”고 화답했다. 은어축제 기간에 열리는 ‘베트남의 날’이 베트남 타운 조성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이자 봉화와 박닌성이 베트남과 한국의 교류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의 날’을 품게 된 은어축제 역시 봉성과 창해라는 지명 만큼이나 화산군의 삶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은어는 먼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고향의 개울로 돌아오는 물고기다. 바다 건너 홍강의 풍광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을 화선군의 은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베트남의 날을 위해 은어축제를 만든 것이 아니다. 화산군의 후손들이 정착한 지역에 하필 은어가 돌아오는 청정 지역이다.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 남자의 간절한 마음이 시간을 초월해 이토록 절묘한 우연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 그 마음이 오늘날 두 나라의 우호의 바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은어떼가 강과 바다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처럼, 리 왕조의 고향인 박닌성과 그의 후손들이 정착한 경북 봉화군 사이에도 교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박항서의 축구 열풍은‘리 왕조’전설의 실현?

화산군의 후손들이‘베트남 마을’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몇 년 사이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관광과 경제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박항서 감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박 감독이 베트남 축구팀을 이끌 때 화산 이씨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필자도 그의 팀이 축구 시합을 할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응원을 했고, 그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꽃다발을 들고 인천공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박항서’가 아니라 ‘이항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가 화산 이씨든 아니든 베트남인들은 그의 업적을 ‘리 왕조’의 전설과 연결시키게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인들에게는 국기나 다름없는 축구의 부흥도 경제 발전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다. 박항서 감독이 쓴 스포츠 신화도 ‘리 왕조 후손이 돌아오면 베트남이 부흥할 것’이라는 전설이 실현된 한 가지 예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1996년 화산 이씨 후손들이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 정부의 삼부요인이 모두 나왔고 대대적인 환영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를 재현한 두 번째 한국인이 바로 ‘박항서’였다. 그 모습이 서로 닮았다. 훗날 베트남인들은 이렇게 역사를 기록하지 않을까.

‘800년 만에 리 왕조의 후손들이 돌아온 뒤 국가 경제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고, 경제가 가장 가파르게 발전하던 시기 이용상의 후손들이 정착한 ‘영남’에서 나고 자란 박항서 감독이 혜성 같이 나타나 베트남의 국기 축구를 부흥시켰다. 박 감독과 그가 이끈 축구 영웅들은 가장 위대했던 왕조가 베트남을 다스리던 시절의 기쁨을 재현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 가장행렬에 참가한 여고생들이 취재진의 카메라를 담긴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 가장행렬에 참가한 여고생들이 취재진의 카메라를 담긴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행렬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광원 기자
어린 아이들이 행렬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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