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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 동안 빗발친 북한군 총알, 맨손으로 모래톱을 파서 그 안에 몸을 숨겼죠”

6.25전쟁 참전해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장사상륙작전, 홍천 양평 춘천 패잔병 토벌작전
청년들에게 “철저하고 꾸준한 자아 관리가 애국”

  • 입력 2023.06.02 00:00
  • 수정 2023.06.22 18:27
  • 기자명 이종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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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보훈의 달6.25 영덕 장사상륙작전 참전 영웅 배수용
호국 보훈의 달6.25 영덕 장사상륙작전 참전 영웅 배수용

 

“대위님이 ‘머리카락, 손톱, 발톱’의 일부를 잘라서 봉투에 넣으라고 명령하더군요. 그렇게 한 후에 봉투 겉면에 각자 이름을 넣어서 육군본부에 보냈습니다. 출정이 눈앞이었습니다.”

경북 경산시 백천동에 거주하는 배수용(99)씨는 27세의 나이로 6.25전쟁에 뛰어 들어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22세에 결혼식을 올려 당시 부인과 딸, 그리고 어머니까지 부양하고 있었으나 나라의 위기를 그냥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어 자원입대했다.

장사상륙작전, 패잔병 토벌작전 등에 투입

6.25 전쟁 발발 3개월이 지난 즈음에 참전했다. 국군이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내려온 상황이었고, 배 씨는 대구역 광장에서 유격대원 모병을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지원했다. 그렇게 군번 없는 학도병 유격대원으로 참전해 장사상륙작전, 홍천 양평 춘천 패잔병 토벌작전 등에 투입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장사상륙작전이라고 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면 1950 년 6월25일 새벽 북한국의 기습남침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해 8월에는 낙동강 일대에서 50여일 동안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유엔군은 전세를 뒤집으려고 8월30일 인천상륙작전을 명령했다. 작전일은 1950년 9월15일로 정해졌다.

이때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이 기획되었다. 배씨가 속한 독립유격대 제1대대 병력 772명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모두 어린 학도병들이었다. 772명의 대대원 중 18세에서 19세 사이의 학도병이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8월 중순 대구역에서 모병 지원을 받아 모은 병력이었다. 그달 말에 경남 밀양 농협창고에 훈련소 겸 숙소가 마련되었다. 학도병들은 가마니 두 장을 요와 이불로 지급받았다. 배씨의 통솔을 맡은 인물은 이명흠 대위였다.

맨손으로 모래톱을 파헤져 방패 삼아

9월14일 오후 4시 무렵, 유격대원들을 태운 문산호(해군 LST: 2,700t급 상륙용 함정)가 부산항을 출발했다. 미(美)해군 구축함 엔디코트(Endicott)함의 보호를 받아 가면서 15일 새벽 5시쯤 장사리 해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태풍이 몰고 온 심한 파도에 휩쓸려 문산호가 좌초되었다.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썰물과 함께 배 밑으로 들어가서 사망하는 아군도 다수 발생했다.

해안에서는 장사리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의 총탄이 빗발쳤다. 유격대원들은 맨손으로 모래톱을 파헤쳐 방패로 삼았다. 북한군의 총탄을 뚫고 10여 시간의 사투 끝에 상륙에 성공했다.

이후 유격대원들은 영덕에서 6일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지상전을 펼쳤다.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교란하여 북한군 제2군단에 큰 타격을 주는 성과를 냈으나 적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상륙 사흘 만인 19일, 좁혀오는 포위망을 뚫어 110명의 부상자를 포함 640여 명이 빠져나왔다. 20일 오전 6시에 부산항으로 귀대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유격대원 92명이 부상당했으며, 139명이 전사했다. 상륙함 문산호는 좌초했고, 미처 철수하지 못한 39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됐다.

배씨도 전정에서 북한군의 박격포탄 파편이 몸에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교전이 워낙 치열해 양쪽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었는데도 다친 줄도 모르고 총을 쐈다. 그때의 상흔은 70년이 넘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배씨는 “잠자리에서 가끔 깊은 통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장사상륙작전 무명용사 유해 하루빨리 발굴하길

6.25 전쟁사에서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 대부대 유인책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의 반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씨는 당시 생존하지 못한 전우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참전유격동지회를 발족되자 위령탑 건립을 위한 활동 등에 동참, 장사상륙전승기념공원 조성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가려 조명이 안 되었던 장사상륙작전을 국민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또한 “장사상륙작전에 희생된 무명용사들의 유해를 하루빨리 발굴하여 국립묘역에 안장해 주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때의 당신처럼 젊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간절한 당부였다.

“청년이 나라의 희망입니다. 철저하고 꾸준한 자아 관리로 자기 생활에 충실하면서 나라의 주역 되겠다는 강직한 국가관을 갖고 생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세대가 피 흘려 구해낸 이 나라를 위하는 진정한 애국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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