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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들락날락하는 집에 살고 싶다

  • 입력 2023.05.22 09:00
  • 기자명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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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이 싱그럽게 파랬던 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만났다. 살랑살랑 마음이 흔들리고, 솔솔 생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면서, 불끈불끈 에너지가 솟는다. 봄이 내게 왔노라고 알려주는 거다. 이럴 때는 봄의 기운을 두 손 벌여 반겨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축하해야 한다. 축하는 뭐니뭐니해도 함께해야 제 맛이 아닌가?

봄맞이를 하자면서 집으로 점심초대를 했는데, 설레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금세 없던 일이 되었다. 누군가 “일하느라고”, “바빠서”, “다른 약속이 있어서”라고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단톡방이 너무 고요해서 민망했다.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는 안 그랬던 사람들이, 매일 카톡을 주고받는 다정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말이 없다.

영국 텔레비전에서 본 100세 할머니가 떠오른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밝은 표정의 웃는 얼굴이 예뻤다. 모든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작은 일에도 마치 아이처럼 경탄하며, 연신 “원더풀~”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BBC 방송에서는 분명히 그런 면모를 소개하려고 그를 인터뷰했을 거다. 인생을 행복하게 산 어른으로 부터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법’을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영국인은 친구를 집으로 부르고, 모임도 집에서 한다. 유독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사람들인데도, 집은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개인적인 공간인데도, 친구들과 공유하는 데에는 기꺼이 마음을 낸다. 그들을 보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차를 즐기고, 마음이 충족되는 식사를 하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삶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진심이 느껴지는 대화를 나누며,정서적 교감을 주고받는 것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삶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생소했던 영국인과 내가 마침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집’ 덕분이라고 믿는다.

그 사람을 ‘아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내가 초대한 사람들이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들을 조금 더 알고 싶었고,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일상 대화도 좋고, 살면서 느꼈던 잔잔한 감정도 좋으니, 개인적으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까워지기에 제일 좋은 방법은 대화가 아닌가. 

카페나 식당에서 수없이 만났는데도, 지금도 카톡을 주고받는데도,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거리를 둔 채로 각자 제자리에 서서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우리가 점점 대화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걸 불편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수십 년을 알고 지냈는데도, 우리가 서로의 집에 가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집에 가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오래 시간 만나지 않아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자연스럽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볼 수 있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저절로 느낄 수 있다. 그 집에 온 사람은 스스로 그 집에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집은 서로를 가깝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집이 그들을 친구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배우 김혜자가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쓴 책, <생에 감사해>에서 말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것,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어려움 속에서 서로를 보호해주는 것이 전부일 런지도 모릅니다.”라고. 좋은 삶을 산 사람들이 전해주는 지혜를 접할 때마다 하나같이 소박해서 놀란다. 대단하지 않아서, 엄청 어렵지 않아서,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게 아니라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진다. 따뜻해서, 친절해서, 나도 꼬~옥 바라는 거라서, 한번 해보자 싶어진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나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이 들어서도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행운이고말고. 소중한 인연들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싶다.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살고 싶다. 이제는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집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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