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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23명 아호 지은 할아버지 “가족 모임에 이름 대신 아호로 불러요”

25년째 ‘할아버지 장학금’ 만들어 손자 손녀들에게 지급 
장학금 지급하는 날 와서 박수만 쳐도 ‘참여상’ 장려금 
동생, 자녀, 손자 손녀 23명에게 아호 만들어 부르도록 해

  • 입력 2023.05.04 09:00
  • 수정 2023.05.16 14:24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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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대가족’ 이야기
특별한 ‘대가족’ 이야기

 

“무슨 단오 행사를 이렇게 거창하게 합니까?”

오해다. 매년 단옷날마다 30여평 아파트에 할아버지부터 손자대까지 50명이 모이는 건 맞지만 단오 행사 때문은 아니다. 상산김씨 종손이자 대종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인 김동진(78)씨의 생일과 음력 단오가 겹친다. 김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이는 것이다. 동생들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그는 9남매의 맏이다.

“생일날 명절이나 진배없습니다. 장손 노릇한다고 동분서주하면서 살았는데, 그게 이렇게 늦복으로 돌아오는가 봅니다.”

이렇게 잘 모이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스스로 밝힌 대로 동생들을 잘 돌본 덕도 있지만, 독특한 아이디어로 모일 수밖에 없는 ‘꺼리’를 만든다. ‘할아버지 장학금’도 그중의 하나다. 벌써 25년이 넘었다.

어머니 제삿날에 열리는 특별한 행사

대상은 손자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들이 시험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금을 지원한 데서 시작됐다. 첫 명칭은 ‘올백 장학금’이었다. 하나가 틀리면 ‘아차 장학금’, 두 개가 틀리면 ‘아차차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그러다 차츰 항목을 늘렸다.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받으면 장학금을 줬다. 그냥 용돈 주는 식이 아니었다. ‘올백 장학금’처럼 교내에서 받는 상과 시군구 단위, 전국 단위, 세계 단위로 나누어서 다르게 차등 지급했다. 세계 단위라고 하면어마어마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장학금을 받은 손자가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 하나가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 미술 대회에 출품해 우수상을 탔다.

‘지도자 장학금’도 있다. 학급 회장을 비롯해 다양한 모임이나 단체에서 장(長)을 맡을 경우다. 손자들이 각자 속한 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장려하는 차원에서 제정했다.

대학 입학 장학금은 규모가 제일 크다. 서울권 대학으로 진학하면 아무래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역대보다 장학금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며느리의 강력한 요청으로 아이비리그 입학 장학금도 마련했다.

가장 재밌는 분야는 참가상이다. 시상식이 열리는 날, 상을 받은 손자는 물론이고 손뼉을 치는 손자들에게도 참가비를 준다. ‘사촌’이 잘 되는 걸 함께 기뻐하고 좋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어머니 제삿날에 장학금을 수여한다”면서 “그런 덕인지 며느리들도 꼬박꼬박 제사에 참석한다”고 말했다. 

최근 장학금 항목을 추가했다. 저출산에 대한 우려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는 생각에 ‘할아버지 출산장려금’도 마련했다. 30만원이다. 결혼에도 장려금이 있다. 또한 작년부터 장학금 대상 후손도 확대해서 동생들의 손자 손녀까지 챙기고 있다. 대상 ‘학생’이 쉰 명을 훌쩍 넘었다. 김씨는 “목욕탕과 헬스장을 운영해 장학기금을 마련하는데 코로나 이후로 손님이 부쩍 줄어 걱정이지만 조금씩 경기가 살아나서 한시름 놓았다”면서 “장학금이 가족들을 한데 모으는 작은 동력이 되는 만큼 후손 대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원래 이름보다 호가 더 예뻐요!”

지난해에는 동생들과 자녀 부부, 손자 손녀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렸다. 개명을 한 것이 아니고 아호 (雅號)를 하나씩 지어줬다. 모두 23개의 아호를 지었다. 김씨는 “가족 모임에서 아무리 동생이지만 손자 손녀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름을 부르기 민망한 것도 있고, 며느리들은 누구 엄마, 누구 애미, 하는 식으로 부르는데 그것 역시 적절한 호칭이 아니었기에 호를 지어 점잖게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전문가의 검증을 받기는 했지만, 일일이 혼자 고민해서 지은 호들이다.

“아호는 유명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녀노소 누구나 평범한 사람들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개명에 따른 복잡한 절차 없이 좋은 이름을 만들어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구요. 우리에게는 본명 이외에도 아명, 자, 아호 등 우리가 인격체로 성장해 가면서 정도에 따라 별칭을 불렀습니다. 아호를 통해 삶의 격조를 한층 높일 수 있습니다.”

호는 그저 좋은 글자를 짝맞추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문장의 끝글자를 모아서 호를 짓는다. 이를테면 김씨의 호는 ‘청운’인데. 정안만년청(静安萬年靑)과 번성기상운(繁盛起瑞雲)의 마지막 글자를 모아서 지은 호다. 이런 식으로 몇 년에 걸쳐 23명의 호를 손수 지었다. 각자의 개성과 성품을 고려해서 적절한 글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름을 지을 때만큼이나 정성들인 작업이었다. 딸들과 손녀들의 반응이 특히 좋더. 김씨는 “원래 이름보다 호가 더 예쁘다면서 앞으로 아호로 불리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며느리의 아호는 ‘단양헌’입니다. 격조와 품격이 느껴지지 않나요? 손자 손녀들이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고, 그래서 교육적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호를 따온 문장을 일일이 쓰고 해석을 달아 책자로 만들어 각 가정에 전달했다. 틈틈이 펼쳐보고 아호의 뜻을 되새기는 한편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잊지 않고 아호를 부르게 하려는 의도다. 아직 낯설어하는 가족 구성원이 있지만 차츰 정착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씨는 “장학금이든 아호든, 한데 모여서 예의와 범절을 지키며 정을 쌓아야 가족의 단결력과 가문의 화합이 오래오래 깊어지고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오는 단오에도 작게는 서른, 많게는 오십 명의 가족 구성원들이 모일 텐데, 서로를 새로 지은 아름다운 이름으로 점잖게 부를 생각을 하면 벌써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한 지붕 아래에 모여 살지는 않지만 자주 모이고 서로를 기억하며, 좋은 일이 있으면 서로 축하해주고 힘든 일이 있으면 위로하고 돕는 것, 이 또한 대가족의 미풍을 면면히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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