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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의 세탁 전문업체 호 1 우직한 설비 투자 ‘넘볼 수 없는 아성’

  • 입력 2023.04.01 00:00
  • 수정 2023.05.12 10:39
  • 기자명 김윤곤 기자, 김경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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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수 영천 신대영사 대표
권영수 영천 신대영사 대표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에는 개울물 소리가 들린다. 화면 아래 가득 물소리를 배경으로 빨랫방망이 소리가 경쾌하다. 두셋이, 서넛이 이어가며 주고받는 빨랫방망이 장단은 신명이다. 새옷에서 걸레까지 집집이, 세상이 깨끗해지던 시간, 날마다 개울가서 들리던 정겨운 소리 장단은 이제 다시 들을 수 없다.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 (주)신대영사(대표 권영수)는 특별한 빨래터다. 통계청 한국표준산업분류상 병의원 등에 세탁물을 공급하는 의료기관 세탁 전문업체다. 영남대학교병원, 계명대 동산의료원 등 대구·경북지역 50여 곳 의료기관에서 위탁받아 매일 수거해온 세탁 의뢰물을 세탁한다. 환자의 진료나 수술 과정에서 쓰인 여러 세탁 의뢰물들이 위생적이고 청결한 한살이를 새로 시작하는 곳이다. 너른 공장 안에는 수백 개 빨랫방망이 소리 대신 고압 증기와 세탁기(연속기) 터빈, 탈수기 프레스를 구동하는 낮은 기계음이 깔린다.

기계음 깔린 ‘특별한 빨래터’

의료기관세탁물 관리규칙(보건복지부령 제822호)에 따르면 ‘의료기관 세탁물’은 의료기관 종사자와 환자가 사용해 세탁 과정을 거쳐 재사용할 수 있는 세탁물이다. 크게 침구류(이불, 담요, 시트, 베개, 베갯잇 등)와 의류(환자복, 신생아복, 환자와 접촉하는 의사·간호사 등이 근무 중 착용하는 수술복·가운 등 근무복), 기타 세탁물(수술포, 기계포, 마스크, 모자, 수건, 기저귀, 커튼, 씌우개류, 수거자루 등)로 나뉜다.

위 관리규칙에 따라 세탁과 재사용이 금지된 세탁물도 있다. △피·고름이 묻은 붕대 및 거즈 △마스크·수술포 등 일회용 제품류 △바이러스성 출혈열 환자의 혈액이나 체액으로 오염된 세탁물 △크로이츠펠트-야콥병과 변종 확진·의심환자의 중추신경 조직으로 오염된 세탁물 등이다. 세탁 과정이나 세탁물 간 접촉에 의한 재오염·감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신대영사는 대구·경북지역 의료기관 세탁물 처리업체 1호다. 1994년 3월 경산 시지에서 대형 로터리 워셔기(세탁기) 10대 규모로 시작했다. 당시 상호는 대영사. 지역 의료기관 세탁물 처리업의 시작이었다. 의료 세탁의 핵심은 감염과 재오염 방지다. 이를 위해 의료기관 세탁물 처리업체는 △330㎡ 이상의 독립·구획된 작업장 △80~100℃의 열탕·수증기 주입 세탁기 △열탕 수증기 공급 고압 보일러 △80~100℃의 가열 건조기(자동온도 조절기) △소독시설 등을 갖춰야 한다.

당시 땅값을 제외하고 기계·장비 도입에 5억 원, 고압 보일러·배관 등 설비에 4억원이 들었다. 시지 땅 한 평에 10만 원, 아파트 한 채가 4,000만~4,500만 원이던 시절, 꽤나 거액이었다. “그때 그 돈으로 시지 땅 9,000평을 사뒀더라면 지금쯤 큰 부자가 됐을지 아니면 흥청망청 다 날렸을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흥청망청하다 빈털터리가 되지 말라고 일할 팔자를 타고난 것 같습니다.” 권 대표는 웃었다. 그는 5억을 들여 편히 사는 삶이 아니라 고생스런 일을 택했다.

시장 형성 안돼 초기 정착 어려움

새 업종인 의료기관 세탁물 처리업에 뛰어든 것은 권 대표의 선견지명이었지만 선두 업체의 고충은 컸다. 맨바닥에서 사업 영역을 개척해야 했다. “우선 시장 규모 자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대구지역 병원을 다 합쳐도 30곳이 되지 않았거든요. 이마저도 비슷한 시기에 설립한 다른 업체와 나눠야 했죠. 이 업체 사장과는 친한 사이였어요. 경북과 경남지역까지 영업을 뛰었습니다.”

힘든 시기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더 좋았다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인건비와 기름값이 지금보다 많이 쌌거든요. 벙커C유가 1ℓ 220원, 직원 월급이 60만~70만 원이었으니까요. 환경 관련 규제나 환경 관련 민원 같은 것도 없어서 수월했고요. 매출만 올리면 할 만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권 대표가 회사를 설립한 때는 의료기관세탁물 관리규칙이 제정·시행된 첫해. 이에 따르면 병원 환자복이나 근무복은 개인이 세탁할 수 없고 시설 기준 등을 갖춘 병원 자체 시설이나 외부 전문업체에 맡겨 세탁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병원들은 이런 규정을 잘 모르거나 반발도 했다. 세탁물 계약은 그만큼 어려웠다. 계약처 20곳을 채우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이와 함께 아직 충분히 정착하지 못한 현장과 시설, 납품, 고객 관리 등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다. 초기의 개별 문제는 서로 얽혀 있었다. 상위 기종의 기계·설비 도입 문제이거나 불량률 개선, 공정 효율화 등의 시스템 개발 문제였다. 초창기 대형 세탁기 기술은 여러 가지로 미흡했고 그만큼 발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은 아니지만 ‘너무 큰 독’

“돈이 좀 모였다 싶으면 기계나 설비를 들였습니다. 지나 놓고 보니 그랬더군요. 밑 빠진 독은 아니었지만 독이 너무 컸죠. 허리가 휠 때가 많았어요. 대형 세탁 기계·설비는 한 대에 1억 원을 넘는 게 보통이에요. 거기다 운반·설치 비용과 운전· 유지 비용도 컸어요. 일에 파묻혀 살다 보니 5년이 금방 지나더군요. 기반은 잡았다 싶었는데 밖에 나가 술값 밥값을 내려면 다들 말렸어요. ‘부지런히 해서 어서 돈 모으소’ 이러면서요. 세탁소 하는 줄 아는 거죠. 4~5년 동안 밥이며 술 많이 얻어 먹었습니다. 허허”

6~7년쯤 지나자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당시는 일본으로 유학 간 사람들이 앞선 기술에 매료돼 귀국 때 일본에서 중고 기계를 들여와 기계상을 여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렇게 유학생 출신 기계상을 만나 권 대표는 해외 기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을 자주 오가게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등 여러 나라의 세탁 기술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국내 기술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럽더라고요. 이래서는 미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행·숙박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침구 등 세탁 수요가 많아 세탁업이 발전합니다. 일본이나 미국, 독일·영국·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이 그렇죠.” 한국은 당시 해외여행 자유화 전이라 소수의 사람들만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다. 세탁업도 기술수준도 낙후했다.

국내산 로터리식 세탁기는 빨래를 손으로 집어넣고 세탁이 끝나면 손으로 다시 꺼내 옮겨야 했다. 이것으로 작업하다 보니 그는 아주 진력이 났다. 일본을 방문해 공기 압축 프레스 등으로 모든 공정을 자동화해 세탁을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독일제 밀러 대형 세탁기(연속기)를 보는 순간 그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일제 시트 피드 롤러기(다림질기)의 성능에도 놀랐다. 세탁물은 100% 건조됐고 다림질한 옷이 풀을 바른 듯 빳빳했다. 증기 압력 롤러기 쇠판 두께의 차이였다.

해외 제품 성능에 매료돼 수입키로

“바로 중고 연속기를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중고인데도 일제라고 1억 원이 넘었습니다. 또 한 번 허리가 휘청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죠. 중기 자금 대출을 활용하기로 했어요. 막상 배송이 문제였어요. 덩치가 크다 보니 컨테이너에 실어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덮개 없는 별도의 대형 컨테이너 선에 실어 동해를 건너야 했어요. 배송비가 엄청났죠. 배송 후 설치도 힘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전문 기술 용어로 가득한 일본어 시방서를 제대로 해석하고 시공할 수 있는 기술자가 드물었거든요.”

당시 중소기업협동조합에서 중소기업을 위한 연리 1~2%의 기술·설비 자금을 대출해줬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대출을 거의 받지 못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산업용 세탁기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시절이라 공무원이나 은행 직원들이 중고 세탁기를 1억 원에 수입해 온다는 것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증빙 서류도 소용없었고요. 1억 원에 들여온 산업용 세탁기에 가능한 대출 금액은 2,000만 원이었어요.”  분통 터질 노릇이었지만 규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었다.

의료기관 세탁물 처리업은 대형 세탁기인 연속기와 증기 시설 등 여러 기계 설비가 필요한 시설 집약 산업이다. 또한 기계 설비를 많이 들인다고 해도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많아 일손도 많이 필요한 노동 집약 산업이기도 하다. 시설과 인력이 동시에 많이 든다는 점에서 경영의 입장에서는 3D업종인 셈이다. 처음부터 어려움을 헤쳐 나오기를 거듭하면서 권 대표는 더 단단해졌다.

그렇게 초기 정착에 어렵사리 성공해 기술 수준과 품질은 올라섰고 매출은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늘었다. 덕분에 25년간 둥지 틀었던 보금자리를 옮겨 2019년 현 위치에 확장 이전했다. 대지 5,289㎡(1,600평), 건평 1,983㎡(600평). 공장 2개동에 단독 세탁기와 연속기, 시트 피드 롤러기, 터널 피니셔, 건조기 등 40여 대의 기계·설비를 갖췄다. 일일 처리 능력 197t의 폐수 침전조와 여과기 설비도 갖춰 작업 물량 확장에도 넉넉히 대비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고비도 넘어서고 있다.

 

하루 14t 처리 능력…바코드 시스템 개발도

신대영사는 요즘 하루 14t의 의료 세탁 물량을 처리한다. 옷으로 따져 3만여 벌이다. 한 달 280t, 1년이면 3,360t이다. 날마다 작은 산더미 하나를 세탁하는 셈이다. 환자복과 근무복은 별도 건물에서 세탁한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교차 오염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규모 큰 세탁소 정도로 생각했다가 막상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고 엄청난 설비에 놀란다.

“규모에 비해 설비가 많고 커서 손을 댔다 하면 목돈이 듭니다. 독일제 밀러 건조기 한 대가 2억 5,000만 원입니다. 오죽하면 주변에 이런 기업은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을까요.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기술과 설비 수준을 개선했습니다. 현재 직원수 60명으로 규모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 설비 수준을 높이지 않았다면 20명 이상의 일손이 더 필요했을 겁니다. 그동안 큰 것만 계산해도 기술과 설비 도입에 50억 원 정도는 들인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도 시설 개선과 시스템 개발에 열성이다. 특히 지난해 말 개발을 마친 ‘의료 세탁물 관리 바코드 시스템’은 획기적이다. 근무복마다 세탁물 관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입력해 바코드를 부착하고 이를 바코드 리더기로 읽어 분류하고 단계별로 처리해 세탁 관리의 효율을 크게 높였다. 정확도는 99.9% 이상이다. 세탁물을 위탁한 병원의 업무까지 덜어주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를 통해 일일 처리 물량이 크게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병원 근무복의 자체 시설 세탁 또는 위탁 세탁 의무화에 따른 위탁 물량 증가에 대비한 것이다. 최근 전국 규모의 한 세탁 전문업체는 의료 세탁에 고체 칩을 이용하는 RFID 시스템을 도입했다. 신대영사의 관리 시스템은 천으로 된 바코드 레이블이다. 세탁 과정에서 세탁물을 다치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고체 칩에 비해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고정 관념에 갇히지 않는 권 대표의 유연하면서도 꼼꼼한 업무 스타일의 결과다.

‘내 일터는 세상 한 귀퉁이 빨래터’ 보람

“부모님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철이 일찍 들었는지 어릴 때부터 저 자신이 부모님을 돌봐 드려야 하는 가장이라는 잠재의식 속에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청춘의 낭만이나 객기를 부릴 틈이 없었죠. 늘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29년 전처럼 오늘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짠해진다. 신대영사는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다. 직원 60명 중 27명이 장애우다. 전체 직원의 절반 수준이다. 규모에 비해 직원이 많은데도 줄이지 않는 그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다. 그는 장애우를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권 대표는 1등을 위해 달려오지 않았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으로라도 버티고 견뎠을 뿐,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의료 세탁 전문업체를 만들고 싶다는 자존심은 지켰다. 그러다 보니 업계에서 누구도 쉬 넘볼 수 없는 자리가 돼 있었다. “사는 일이 내가 하지 못한 일들의 기회비용 같습니다. 제가 사지 못한 땅값과 가지 못한 여행을 지금 함께 사는 거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 한 귀퉁이 빨래터라면 괜찮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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