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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맞는 남편들의 나라 조선

발행인 칼럼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 입력 2023.04.18 09:00
  • 수정 2023.04.18 13:58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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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cature_강은주
Caricature_강은주

 

 얼마 전 한국에서 ‘남아선호사상’이 사라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여자아이가 100명 태어날 때, 남자아이는 104.7명 태어났다. 100명당 103명에서 107명이 나오면 정상 범위로 보는데,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지난 199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나이든 분들 중에 딸 낳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주변을 살펴보면 부모가 아프거나 힘들 때 대개 아들보다는 딸이 더 잘 보살핀다. 그런 현상이 이런 분위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전에는 아들 낳지 못해서 설움 받았다는 이야기가 흔했다. 세상이 변하긴 변했다. 남아선호사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과거에는 농사를 짓고 힘을 쓰는 일이 많았으니까,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계속 아들이 선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종갓집도 큰집도 없었다 이 시대 이전에는...

 우리나라는 남아선호가 본격화된 시기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 있기 전과 후의 달라진 점을 조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종갓집’이란 것이 있다. 부계 중심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종손, 큰집 같은 개념은 특정 시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종갓집이 생겨난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본다. 이 시기에 조선은 부계 중심의 사회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분재기라는 것이 있다. 아들, 딸, 맏이 막내에게 재산을 분배한 것을 기록한 문서인데, 17세기 들어 점점 맏이에게 주는 재산의 양이 많아지다가 18세기에 들어서서는 이것이 사라진다. 분재기가 굳이 필요없을 만큼 장자 상속의 ‘룰’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까닭이었다.

 그 이전에는 재산 상속에 아들딸 구분이 없었다. 아들과 딸이 번갈아 가면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아들 하나에 딸이 셋이면, 올해는 아들, 내년에는 첫째 딸, 그 다음 해엔 둘째 딸이 지내는 식이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의 원인을 인구 증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인구의 변화와 연동해 상속제도가 바뀐 예가 많다. 어떤 나라에서는 막내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기도 했다. 조선은 전후 평화시대가 지속되면서 꾸준히 인구가 늘었고, 이런 변화의 시대에 장자를 중심으로 한 세습 시스템을 선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남아선호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유교였다. 공자의 시대는 부계 사회였다. 논어 등에 담긴 부계 사회의 분위기가 조선에까지 흘러내린 것이었다.

 유교는 이미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나름의 융통을 부렸다. 원본 그대로 판박이 한 것이 아니었다. 부계 사회의 요소가 있어도 적절히 융통해서 적용했다. 사족을 달자면, 우리나라는 부계 사회도, 또 모계 사회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적절한 균형을 갖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가 보통 ‘조선 시대’라고 하는 시대의 모습은 17세기 후반 이후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이 모계 사회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좀 강한 편이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내부터 시작해서, 왕건은 수많은 아내들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수수팥떡을 조몰락거리면서 초야를 맞은 남편의 사연

 중종 임금 때인 1517년 12월에 어전에서 심각한 회의가 열렸다. 부부 사이에 구타 사건이 자주 일어나서 임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도 아내를 때리는 남편이 있었구나, 하겠지만 그 반대였다. 한 신하가 이렇게 말했다.

 “매 맞는 남자들의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된 고질적인 일이옵니다.”

 구전 설화 중에 성격이 괄괄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아내를 고분하게 만들 묘책을 구상했다. 첫날 밤, 남자는 수수팥떡을 조물락거려서 주머니에 넣고 방에 들어갔다. 신부에게 술을 몇 잔 권한 후 그녀가 곤히 잠든 틈을 타 이불 속에 수수팥덕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급히 깨워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곤해도 그렇지 첫날밤에 어떻게 똥을 쌀 수가 있소.”

 수수팥떡을 잔뜩 주물러놓으면 언뜻 똥처럼 보인다. 신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녀는 이후 시쳇말로 ‘죽어 지냈다’. 칠순이 넘었을 즈음 남편이 아내에게 첫날밤에 있었던 일을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아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남편의 수염을 뽑아버렸다. 성격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논어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하며 훈계하는 대목이 없다. 유교적 통념으로 억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  또 나이 들어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17세기 훨씬 이전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역사 내내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딸바보’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는 보수파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아선호가 원래부터 쭉 그랬다고 믿는 이들이다.

 아니다. 남아선호사상은 기껏 300년 남짓 된 ‘전통’이다. 아니 이제 곧 사라질 ‘인습’이다. 속이 후련할 ‘할머니’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들딸 공평하게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은 확실히 한쪽으로 기운 세상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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