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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클럽리의 문화마당’

새로운 느낌은 곧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니까

  • 입력 2023.03.17 17:59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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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내가 이만큼 꾸준한 적이 있었던가. 기부금을 내고 걷는 모임을 시작한 이후 계속 걸었다.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4개월이 넘도록 매일 한 시간씩 걸었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혼자 걸었던 100일까지 치면 더 꾸준하다고 할 수도 있다. 쉬지 않고 걷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을 거다. 

빼먹은 날이 하루 있기는 하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볼일이 있었고, 겨울이라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은 너무 춥고 컴컴해서 “에이, 하루쯤이야” 하면서 건너뛰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웬걸 그렇지가 않았다. 찜찜한 기분이 찌꺼기처럼 남아 영 개운치 않았다. 두고두고 나를 방해했다. 

걷는 것은 돈도 들지 않고, 장비나 파트너도 필요 없고,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서 좋다. 걸으면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은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참 좋다.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들고 걷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좋다.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마라톤도 아니고, 히말라야 등반도 아닌데”라고 되뇌면 괜찮아진다.

지나간 시간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실제로 경험하고 직접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들을 ‘일’이나 ‘사건’이 아닌 ‘느낌’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따금 촉각을 곤두세우며 느낌을 만끽하기도 하고, 섬세해진 감각으로 느낌의 뒤를 따라가기도 한다. 종종 느낌으로 나의 안부를 살피고, 내 앞날의 갈 길을 확인하며, 나 자신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맛보고 음미하는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는 느낌들이 있다.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를 할 때 온몸을 떨게 했던 설렘과 두려움,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 만화책에서 본 바로 그 그림처럼 심장이 몸 밖으로 ‘쿵’하고 떨어져나갔던 느낌, 거꾸로 매달린 채로 두 눈에 사방의 풍경을 한껏 담았던 여유로운 느낌. 그 강렬했던 감각들은 그때의 나였다.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첫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했을 때 산소통을 맸는데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숨이 쉬어지지 않아 답답했던 느낌, 바닷속에서 물결을 거슬러 나아가려했을 때 느껴졌던 무력감, 바다에 온몸을 맡겼을 때 비로소 편안하고 순조로웠던 느낌. 그 뜨거웠던 열정과 자유로움은 그때의 나였다.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의 파편들을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이라고 감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젊음 속에는 그 시절 그 느낌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그것이 그저 호기심의 발동이든, 모험심의 발로이든, 적어도 실제로 느껴봤다는 사실은 남는다. 덕분에 젊음을 헛되게 보낸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니 나의 느낌 컬렉션은 꽤 다채로운 것 같다. 

작가 임경선은 ‘다정한 구원’에서 세상사라는 것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면서 “다분히 사소해 보이는, 지극히 비실용적인 이유 하나가 때로는 그 외의 모든 중요하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압도해버리고 만다. 그쯤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이유가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이유가 된다”고 했다. 

나만 느끼는 느낌이란 게 있다. 그것마다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내 느낌에 충실하면서 지금의 내가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느낌들이 내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있다. 지금 내가 꾸준히 걷고자 하는 것은 그런 느낌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그 소소하고 하찮은 찜찜한 기분이 나를 살짝 흔들어 놓았다는 거다. 어쨌든 무엇이 되었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졌다. 앞을 모르는 거니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그걸 경험할 때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꾸준히 실천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본심일지도 모르겠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차곡차곡 느낌들이 쌓이면 세월이 내 손에 나도 모르는 뭔가를 쥐어줄 것 같기도 하다. 각자 걷고 함께 기부하는 일은, 꿋꿋이 계속하는 일은 처음이니까. 새로운 느낌은 곧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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