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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떠난 슬픔에 좌절
이웃들 응원으로 다시 일어섰어요”

  • 입력 2023.02.07 09:00
  • 수정 2023.03.06 09:31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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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왼쪽)씨가 애완견 낙엽(왼쪽)과 콩이를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이웃들이 선물한 강아지다. 낙엽은 목줄을 묶어놓았고 콩이는 그냥 풀어놓고 키운데. 이유가 있다. 이 씨에 따르면 콩이가 어느 날 문득 가출을 해서는 20일이나 ‘개고생’을 하고 퀭한 몰골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문을 열어놓아도 집 밖으로 안 나간다. 이 씨는 “짐승이지만 고생을 아는 녀석이라서 정이 간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군위전통시장에서 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순옥씨다. 인터뷰를 하던 날 이 씨 의 사랑방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미자(왼쪽)씨가 애완견 낙엽(왼쪽)과 콩이를 안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후 이웃들이 선물한 강아지다. 낙엽은 목줄을 묶어놓았고 콩이는 그냥 풀어놓고 키운데. 이유가 있다. 이 씨에 따르면 콩이가 어느 날 문득 가출을 해서는 20일이나 ‘개고생’을 하고 퀭한 몰골로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문을 열어놓아도 집 밖으로 안 나간다. 이 씨는 “짐승이지만 고생을 아는 녀석이라서 정이 간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군위전통시장에서 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순옥씨다. 인터뷰를 하던 날 이 씨 의 사랑방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어린 시절 허리 꺾여 6살부터 등이 굽는 장애

결혼 후 거창에서 군위로 이주 닭집 아르바이트 

남편 별세 후 이웃과 단골의 응원으로 장사 계속 

두 자녀가 만들어준 ‘감사패’가 인생의 훈장

 애창곡은 ‘동백 아가씨’. 별명은 엘레지의 여왕. 어쩔 수 없다. 이름이 ‘이미자’다. 경북 군위의 군위전통시장에서 생선 가게를 하고 있는 이미자(64)씨는 “가수 이미자 선생님은 너무 성공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 성공이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가게는 사랑방이다. 군위 전통시장은 3일과 8일에 장이 서지만 그의 가게는 1년 365일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 반찬을 들고와 같이 밥 먹는 사람, 하루 종일 조용할 틈이 없다.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게 ‘사는 낙’이라고 여기는 이웃이 적지 않다. 시장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는 최순옥(54)씨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최 씨는 “군위에서는 가수 이미자보다 생선가게 이미자가 더 인기가 좋다”면서 “이 언니 없으면 무슨 낙으로 장사를 했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 씨의 생선가게는 손님이 찾는 게 아니라 손님이 이끄는 곳이다. 8년 전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침 추석 대목 직전이었다. 어릴 때 어른들의 실수로 허리에 장애를 얻은 까닭에 남편 없이 혼자 냉장고에서 생선을 끄집어내 좌판에 진열하는 것부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을 닫았는데도 손님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굳이 문을 두드려 “생산 팔아달라”고 요청을 했다. 이웃에서 생선 진열하는 것도 도와줬다. 손님들 때문에 끌려나와 어쩔 수 없이 장 

사를 시작했다. “내가 잘못 살진 않았나 싶었죠. 내가 진짜 군위 사람 다됐구나, 뭉클한 마음이 들더군요.”

“병원에 더 일찍 오셨어야죠” 결국 하반신 마비

 이 씨는 거창 사람이다. 먹고 살길을 찾으러 80년대 중반 즈음이 군위로 왔다. 스물여섯에 결혼해 농사를 지으려고 군위군 소보면으로 왔다. 4년 동안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보니 수중에 남는 게 없었다. 첫 아이가 태어났고 “비료 값 벌겠다”면서 군위읍으로 나와 일을 했다. 닭집에 취직해서 닭 잡는 일을 했다. 피가 튀기는 작업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처지가 아니었다. 이 씨는 “궁하니까 겁나는 것도 없더라”면서 “처음부터 곧잘 닭을 잡았다”고 말했다.  90년 즈음에 자기 가게를 가질 수 있었다. 5평 남짓한 가게에 세를 얻어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장사를 할 때는 남편이 운전을 못 해서 이 씨가 트럭 운전대를 잡았다. 하루 팔아서 번 돈으로 다음 장에 팔 물건을 사야 할 만큼 빠듯한 시절도 있었고, 중개인에게 선불로 지급한 2,000여만 원을 떼인 적도 있었지만 무사히 남매 모두 대학에 보내고 취직을 시켰다. 딸은 서울에서 쇼핑몰을 하면서 원룸을 3채에 아파트를 샀다. 건물주가 됐다. 아들은 공기업에 다닌다. 이 씨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모두 착하게 자라줘서 행복한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2004년 겨울에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됐다. 2003년부터 다리가 얇아지고 자꾸 힘이 없어지는 것 같아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이 바빠서 병원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2004년 12월, 1년여 만에 방문했더니 의사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하고 말했다. 수술은 했지만 결국 하반신이 마비가 됐다.

 “여섯 살 무렵부터 등이 굽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영양실조인줄 알고 미군부대에서 영양제를 얻어와 먹였어요. 살만 찌고 등은 계속 구부정해졌지요. 평생 그렇게 굽은 등으로 살다가 그제는 아예 걷는 것조차 못하게 된 거죠.”

 두 자녀가 만들어준 ‘감사패’는 인생의 훈장

 이 씨의 고생을 가장 알아준 이들은 자식들이다.  몇해 전 ‘감사패’를 만들어 가져왔다. ‘어머니 이미자 씨의 사랑과 정성으로 우리가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하는 문구가 박혀 있다. 열심히 살고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모습이 두 자녀 모두 어머니를 닮았다. “아들이 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장날에 엄마 좀 도우러 오라고 해도 안 오더라고요. 그런데 어느날 여덟 조각으로 나누어진 피자를 들고 와서는 이웃들과 나눠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 나 취직했어’하고 말하더군요. 제 엄마가 늘 이웃들과 나누고 사니까 먹는 선물도 나눠먹기 편한 피자로 가져온 거지요. 그 엄마의 그 아들입니다.” 농사지은 걸 들고와서 이 씨의 부엌에 던져놓고 가는 단골이 한둘이 아니다. 이씨는 “가만히 들어앉아 있어도 가을이 되면 방안에 군위 들판이 다 들어찬다”면서 “인심 좋기로 군위만한 곳이 없다”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불세출의 가수로 성공한 이미자 선생님보다 시장 상인 이미자에게 더 즐거운 일이 많을 거예요. 남편도 떠나고 몸도 성치 않지만 살가운 이웃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 씨는 “딸이 30대인데 빨리 결혼하는 것, 그리고 아들이 더 자주 집에 오는 게 새해 소망”이라면서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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