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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원 들고 상경, 30년만에 구미에서 손꼽히는 제조업체로 우뚝 섰어요”

이재욱 전 노키아티엠씨 사장에게 배운 사업 성공 비결
삼십 대 초반 사업 시작, 구미 최초로 스팀세차기 도입해 대박
대기업 하청 회사로 출발해 구미에서 손꼽히는 제조업체로 우뚝

  • 입력 2023.02.03 09:00
  • 수정 2023.02.03 13:51
  • 기자명 추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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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건만 치워주시면 됩니다.”

2000년대 초반 무렵, 어렵사리 공장 부지를 매입했는데, 뜻밖의 불청객을 맞닥트렸다. 문제는 또 있었다. 그 땅에서 1년 넘게 영업장을 차려놓고 물건을 판 사람이 있었다. 내가 구매한 땅과 붙어 있는 손바닥 크기의 땅을 소유한 사람에게 허락을 받아놓고는 내 땅까지 침범해 영업장을 차린 것이었다. 따지고 들면 재산권 침해였다. 나는 언성 한번 높이지 않고 “그냥 자리만 비켜주시면 됩니다”하고 정중하게 물건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한 마디로 1년에 30억, 14년 동안 420억원의 매출을 더 올리게 될 줄은.

사연은 이랬다. 내 땅에 영업장을 차린 사람이 대기업 1차밴드 사장의 친구였다. 내가 별로 따지지도 않고 “공장 지을 예정이라서 그러니 자리를 비켜달라”고만 부탁하는 걸 보고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친구에게 “잘 봐줘라. 좋은 사람이다”라고 추천을 했던 것이었다. 나는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1차 밴드에 가서 그날로 30억 주문서를 받아왔다.

 

“사람이 제일 중한 거라네”

내가 타고나길 성인군자라서 그랬던가? 아니다. 나는 유난히 성격이 급한 사람 축에 속한다. 그러나 나에게 인연을 소중히 하라고 뼛속 깊이 가르치신 분이 있었다. 바로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으로 계신 이재욱 회장이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군에서 제대한 후 취직한 대우정밀에서였다. 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내 직무는 공장장 운전사였다. - 군대에서 운전병을 했기에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이력을 살렸다. 공장장으로 계시던 그분은 몇 해 후에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영전했다. 나는 이 회장을 따라 노키아로 자리를 옮겼다. 인간적으로 친해졌던 까닭이었다. 나중에는 그분의 가정사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당신은 아버지와 함께 이북에서 넘어본 분이었다. 부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갈치시장 앞바다에서 뗏목에 나무를 싣고 팔러 다니다 뗏목이 뒤집혀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남은 여동생 하나를 그분이 딸처럼 키웠다. 학군장교로 군대를 가서 거기서 나온 월급으로 동생을 부양했다. 피난민이었던 만큼 이북에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었다. 늘 외롭게 살던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연을 금덩이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당신에게 악하게 군 사람에게마저 모질게 대한 적이 없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내게 말했다.

“사람이 제일 중한 거라네. 내가 잘되든 못되든 그건 다 사람이 가져다주는 화이고 복인 거라네.”

온화한 성품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과 조곤조곤 나직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나는 한번도 이 회장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나 같으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을 법한 일에도 “그래요?” 하고 말았다. 늘 아랫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을 낮춰 보거나 험담으로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도 본 일이 없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있다시피 한 분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분의 처신과 세상에 대한 태도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보다 약하다 싶으면 험한 말을 함부로 뱉고 뒤통수쳤던 사람 중에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육십을 전후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좋은 씨앗을 뿌려두지 않으면 결국 모두 외면하는 까닭이다. 쓸쓸하게 무대에서 방출되는 것이다.

“자네가 보기에 저 사장은 어떤 사람 같나?”

재밌는 건 외주업체 사장이나 간부들에 대해 늘 나에게 물어봤다는 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영이나 승진, 심지어 본인이 땅을 사는 일까지 내게 물었다. 나는 심리학, 관상학, 경영학 서적부터 부동산 중개 서적까지 사서 읽었다. 뭔가 실한 대답을 해드려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 회장에게 물었다.

“저는 학벌도 안 좋고 아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물어보십니까? 사장님은 서울대까지 나온 분이시잖아요.”

그러자 빙긋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너는 다른 사람하고 달라.”

뭐가 다른지 말씀해준 적은 없지만, 기대에 부응하려고 아등바등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잡은 인맥이 ‘금맥’이더라

노키아에 있으면서 쌓은 인맥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은 내 사업에서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이를테면, 말 한마디로 400억을 벌게 해 준 그 사건이 있기까지도 인맥이 큰 힘이 되었다. 사실은 땅을 구매하는 것조차 힘들 상황이었다. 

“안 될걸.”

좋은 땅을 발견했는데, 부동산 업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땅 주인이 세 명이었다. 세 명을 동시에 설득하기란 불가능했고 그래서 부동산업자도 난색을 표한 것이었다. 기댈 건 인맥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맥을 총동원했다. 해당 지역에서 마당발로 유명한 분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얼마 안 가 해결책을 가져왔다. 땅을 파는데 가장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땅 주인이 그 마당발 친구의 친형과 둘도 없이 친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땅 구매 건을 해결했다. 부동산 업자는 “이야, 귀신 같네”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인맥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그 바탕에는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절박함은 마음의 습관이었다. 어린시절, 큰아버지가 우리집 땅을 모두 팔아치우는 바람에 삼시 세끼를 고구마로 때우다시피 하게 된 뒤로 나는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열망에 가득했다. 1,600원을 들고 서울에 상경한 이후로 대구, 구미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조금이라도 돈이 더 된다 싶으면 과감하게 일자리를 바꾸었다. 그 시절의 나는 열정, 조급증, 악착같은 부지런함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두 동생을 건사하면서 젊고 가난한 날을 버티고 개척했다. 

나는 어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에 30대 초반에 그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와 독립을 했다. 퇴사를 말리는 이 회장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그러나 좋은 자리, 안락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고향에서 늙어가는 어머니와 두 동생을 생각하면 밤잠을 아예 포기하고서라도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동차 정비 자격증을 따서 구미에 세차장 겸 정비공장을 세웠다. 세차장은 대박을 쳤다. 어떻게 하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였다.

세차장이 성공한 요인을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이렇다.

첫 번째 대박 요인은 신기술이었다. 그즈음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스팀세차기를 처음 봤다. 저거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미시에서 처음으로 스팀세차를 도입했다. 그 덕에 90년대 초반 하루 평균 매출이 300만원을 기록했다. 

서비스에도 신경을 썼다. 폐차장을 돌면서 좋은 부속을 수거해온 후 재생해서 저렴하게 교체하거나 흔한 부품은 공짜로 바꿔줬다. 공무원과 경찰은 수공비를 받지 않고 수리를 해줬다.

전 고객 무료 서비스 품목도 있었다. 부동액이었다. 군(軍)에서 부동액을 드럼통에 모아뒀다가 불순물을 침전시킨 뒤 다시 쓰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차에서 버린 부동액을 드럼통에 모아뒀다가 무료로 부동액을 넣어줬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용해 서비스를 하니 손님이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찾아오는 ‘인맥’은 없다

절박한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동아줄 같은 인맥도 손에 잡힌 게 아닌가 싶다. 데면 데면한 사람에게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까. 인맥은 내게 늘 지지부진한 상황에 마침표를 찍고,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 되어주었다. 

사람은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사금을 채취하듯 ‘금 덩어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이를테면 이런 방식이었다. 나는 목욕탕을 한 군데만 다니지 않는다. 일부러 이 동네 저 동네 목욕탕을 옮겨 다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다. 골프연습장도 마찬가지다. 회비가 들더라도 서너 군데에 등록을 해서 돌아가면서 연습을 한다. 이 역시 금 줄기 같은 인맥을 잡기 위해서다.

금오전자의 모태가 되는 사업체를 시작한 것도 목욕탕에서 만난 옛 동료 덕분이었다. 노키아에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를 마주쳤다. 그는 당시 대기업의 1차 밴드 업체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노키아에 있던 시절 사장님에게 “좋은 친구”라고 추켜세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위해 힘을 써줬다. 그 덕분에 대기업 1차 밴드에 납품할 기회를 잡았다. 사곡동(구미)에 공장을 인수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직원은 모두 11명, 휴대폰 케이스 조립을 했다.

제조업을 시작한 뒤로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무실 바닥에 박스를 깔아놓고 잠을 잤다. 1차 밴드 사장들이 늦은 밤에 하청기업을 순회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공장에 남아서 일하고 있는 나와 마주쳤다. 얼마 안 가 업계에서 “열심히 하는 친구”라는 소문이 났다. 

주변에서 응원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공장을 설립한 2004년 이듬해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지금까지 거래한 대기업 1차밴드 회사가 13개사에 이른다. 회사가 바쁘게 돌아갈 때는 대기업에서 주재한 회의에 참가하느라 한달에도 몇 번씩 베트남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아침 점심 저녁 밥 약속 잡혀도 행복한 이유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키는 것은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믿음이다. 오랜만에 전화를 해도 “잘 지내십니까”하고 묻지 않는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보고 싶습니다”고 말한다. 최대한 고향에서 쓰던 말로 대화를 한다. 그것이 내 진심을 보여주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분 한분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다.

가장 경계한 것은 잔머리다. 고심하고 궁리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내야지 사람 관계든 일이든 얕은수는 결국 얼마 안 가 바닥이 드러난다. 흔히 하는 말로 “잔머리 굴리면 선수한테 당한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일이든 진심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야 ‘선’을 넘을 수 있다. 선(한계) 아래에 있어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남들만큼 해서는 힘들다. 선을 넘어야 한다.

다양한 업종에 인맥을 갖추고 있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사람 만나기 바쁘다. 누군가는 “바빠서 힘들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 만나는 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일이 아니라 삶을 즐기고 향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약속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런 날일수록 오히려 더 즐겁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소식, 나를 자극하고 깨우치는 아이디어의 보고와 마주하는 일이 힘들 수가 있을까.

세상 모두가 나보다 상수고 선생이라고 생각하면 바쁘다는 생각도, 힘들다는 생각도 마음에 스며들 틈이 없다. 1,600원 들고 서울에 상경해 번듯한 강소 기업의 대표가 되기까지 나를 이끈 건 8할이 이재욱 키아티엠씨 사장을 비롯해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오늘도 내 행운과 축복의 보증수표를 만나고 다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즐거운 인생이 또 있을까 싶다. 모두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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