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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마음 시련을 극복하는 첫걸음!

1984년 대홍수로 아버지와 개간한 땅 1/3 쓸려가
사과수출 나섰으로 일본 업체 부도로 300억 손실
안정적인 사업 위해 찜닭 시작, 체인 160여개로 확장

  • 입력 2023.02.01 09:00
  • 수정 2023.02.03 13:22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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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동안 어깨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밤마다 독주를 마신 후 잠을 청했고, 나중에는 마약성 진통제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난해 말 지긋지긋하던 통증이 갑작스레 통증이 사라졌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의사 한 분이 문득 생각나 그 병원에 가서 링거 몇 병 맞은 것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한 것이 없었다. 온 가족의 염원과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덕이 아닐까, 하는 것 외에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병이 사라지자 연말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자랑스런 대구 시민상’ 대상을 수상했다. 사람의 노력과 별개로 모든 것이 때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도와 개간 사업에 뛰어든 뒤로 지금껏 산전수전을 겪으며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그 세월 동안 사람에게 늘 좋은 때만 있으리란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갑작스레 찾아오는 병마처럼. 그러나 어렵고 힘든 시기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상황이 호전된다. 이를테면, 롤러코스트를 타듯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인생이다. 잘 될 때 마음 놓지 말고, 힘들 때 절망을 집어삼키지 않으면 어려운 고비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 그런 신념이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던 게 아닐까. 

정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했는데, 시련을 실패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나는 어려울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돌파할 방법을 늘 고안했다. 나에게 시련은 풀기 힘든 숙제였지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 아니었다. 시련을 돌파하며 살아온 지난 삶을 곱씹어보고 내린 나름의 결론이다.

 

홍수에 30만평 유실, 농수산물수입으로 냉동창고 공장 부도

나의 이야기는 아버지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는 1960년에서 70년대 경북 의성에서 낙동강변을 개간해 큰 부를 일구셨다. 1976년 별세 하시기 전까지 사과밭으로 변신시킨 자갈밭이 170만제곱미터(50만평)이었고, 한해 사과 판매량이 5억원에 이르렀다. 

그해 8월31일부터 9월4일까지 집중 폭우가 쏟아져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냈다. 서울은 한강이 역류해 건물 2만 채가 물에 잠겼고, 9만명이 대피를 했다. 전국적으로 사망한 이가 189명, 실종 150명, 부상 103명, 재산피해액이 2,500여억원에 달했고, 이재민은 23만명이었다. 

경상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그때 아버지가 개간한 땅 중 99만제곱미터(30만평)이 홍수에 휩쓸려 내려갔다. 수십 년의 땀과 노력이 며칠만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난관이 자연재해라면 두 번째 난관은 인재였다. 당시 새마을중앙회에서 양파와 고추 등을 수입하는 바람에 전국의 냉동창고 공장들이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자살하는 사람도 나왔다. 당시 나는 의성 안계에 의성에서 제일 큰 저장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다행히 공장은 수해를 피해갔다.) 1,600제곱미터(500평) 부지에 지은 냉동창고로 제빙기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양파 1만 톤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76년에 완공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0억을 투자했다.

악재가 거듭되자 자금 흐름이 막혔고, 땅과 공장이 경매에 넘어갈 상황에 처했다. 부랴부랴 손을 써서 1달 후에 닥칠 경매 일을 3달 뒤로 미루어놓고 대책을 강구했다. 3달 안에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당시 공장에는 처갓집의 돈도 투자되어 있었다. 만약 잘못되면 처갓집까지 길바닥에 나앉을 판이었다. 

“형님, 제가 한번 손을 써볼까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지방지 기자가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는 경북 북부 지역을 출입하던 기자로 평소 막역하게 지냈다. 청송이나 봉화 등 먼길을 가야 할 때면 우리 공장 차를 빌렸다. 답례로 붕어빵을 사오던 살가운 친구였다.

그는 자기 신문에 반 페이지짜리 광고를 내줬다. 본인 집을 담보로 광고 지면을 확보했다. 

광고 효과는 최고였다. 광고 덕에 대구 지역의 자본가들이 움직였다. 붐이 조성되자 두 달 사이에 20만평의 땅을 팔 수 있었다. 그 덕에 20억이라는 자금을 마련했다. 빚을 갚고도 5억여원이 남는 돈이었다. 그렇게 평소의 인맥 덕분에 처가까지 망할 뻔한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가장 혹독한 시간을 잘 헤쳐나가자 솟아날 구멍이 눈앞에 나타났다. 당시 양파를 외국으로 수출하면 바나나를 구매해올 수 있는 수매권을 줬다. 10톤을 팔면 5톤을 구매할 권한을 주는 식이었다. 우리 공장에서는 홍콩 대만 등에 양파를 수출했었다. 그때 얻은 구매권으로 바나나를 수입해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백화점 부도로 200억원 손실로 망연자실

1986년, 농수산부에서 공문서 한 통이 날아왔다. 문서에는 대만으로 사과 수출을 하게 되었으니 빨리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고급 정보였다. 아버지가 27년 간 낙동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한 공로로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5.16 민족상 산업부문 본상’을 수상한 바 있었다. 그 뒤로 정부에서 큰일을 도모할 때는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회사에 정보를 보내줬다. 

공문서를 읽으면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부채도 모두 정리되었고 여유 자금도 있었다. 당장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구미에 창업한 ‘진흥무역’이 그것이었다. 

판을 크게 벌였다. 충정도에 있는 99만제곱미터(30만평) 규모의 농장을 구매하려고 시도했다. 경합이 워낙 치열해 구매를 포기하고 인근에 있는 33만제곱미터(10만평)이 조금 넘는 농장을 샀다. 당시는 기후온난화가 본격화하기 이전이어서 충남 지역에서 지금의 경북 사과 이상으로 상품이 많이 나오던 시기였다. 과수 유통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사고가 터진 것은 1992년이었다. 당시 서울의 K백화점에서 부도가 났다. 그 바람에 바람에 연쇄 부도 사태가 터졌다. 우리 회사는 보증도 서고 있었던 까닭에 200여억원의 손해를 봤다. 회사가 휘청댈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돌파구를 모색했다. 당시 일본에서 한국 과일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1993년 일본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일본인 A씨가 주고객이었다. 그는 일본에 180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5년 정도 거래를 잘했다. 매출이 제일 좋았을 때는 300억원을 찍었다. 

국내 유통도 활기를 띠었다. 양제동 하나로 마트와 거래했는데 농협에서 마트를 하나 직접 운영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시유지 땅을 임대받아서 건물을 짓고 장사를 해보라는 말이었다. 마트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찰나 일본 수출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직원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내게 말했다. 

“A씨가 도무지 연락을 안 받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A씨가 갑자기 잠적을 해버렸다. A씨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A씨를 다시 만난 것은 교도소에서였다. 그는 부도를 맞아 경제사범으로 철장 신세를 지고 있었다. 빚만 잔뜩 지고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돈을 받아낼 방법은 없었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300억이 거짓말처럼 증발해버렸다. 1996년의 일이었다. 

 

“부도 안 나는 안정적인 사업 없을까?” 고심 끝 선택한 찜닭

그렇게 수십억, 수백억씩 떼이고 휘청거리다 보니 사업에 신물이 났다. 아내도 “하루 하루가 두렵다”고 말했다. 이참에 뭔가 다른 길을 찾아보자 싶었다. 구미 회사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문득 음식 사업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업을 하면서 전국을 다니다 보니 곳곳에 숨어 있는 맛집을 방문할 때가 많았다. 혹시나 자금이 막힐까, 부도 사태가 터지지나 않을까, 불안했던 나로서는 작지만 알차게 운영되는 식당을 보면서 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정말 맛집은 몇 대째 이어가면서 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게 뭡니까?”

통계청의 문의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메뉴를 알아봤다. 1위가 쌀이었고 그 다음이 닭고기였다. 닭고기로 만들 수 있는 메뉴 중 가장 보편적인 메뉴를 곰곰하게 생각해봤다. 통닭도 있지만 그건 경쟁이 너무 치열했고, 이미 과열화된 상황이었다. 찜닭이 틈새 시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50만원을 투자해 안동찜닭 레시피를 구해와 음식 실험을 했다. 1999년, 대구 황금동에 100만원짜리 포장마차를 하나 얻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레시피를 실험했다. 그때 우리집에서 공짜로 찜닭을 먹은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손님들의 피드백을 충실하게 맛에 반영해 지금의 ‘달인의 찜닭’을 완성했다. 2003년 구미 사업체를 그만둘 즈음 포장마차 옆의 3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찜닭을 팔아 번 돈으로 종잣돈을 만들어 건물까지 산 것이었다. - 달인의 찜닭 체인 사업을 시작한 뒤로 찜닭을 팔아 건물을 올린 점주들이 종종 있는데, 1호 찜닭 건물주가 바로 나인 셈이다. 

‘달인의 찜닭’은 현재 전국에 168개의 체인을 가지고 있고, 자활센터에서 설립한 사회적 기업과 MOU를 체결해 250여개의 가게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국중소기업 중소상공인협회’ 중앙회와 손을 잡았다. 2년 후에 2,000여개의 달인의 찜닭 체인을 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앙회 관계자는 “코로나다 불경기다 해서 폐업하는 소상공인이 많은데, ‘달인의 찜닭’은 문 닫을 일 없는 체인으로 소문이 났다”고 이야기했다. 부도 위험 없는 사업이라는 것인데, 농수산물 유통에서 요식업으로 넘어올 때 세운 목표가 성취된 셈이다. 

사업은 아무리 잘돼도 불안하다. 요식업은 확실히 다르다. 사람의 입맛을 사로잡으면 그보다 안정적인 사업이 없다. 대를 이어 운영하는 식당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년 전 세운 목표를 달성하고도 남았다는 생각이다.

시련은 도전을 멈출 때 실패가 된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길이 보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무리 막막해도 온 마음을 다하고 열정을 짜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렇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절망을 거절하고 희망과 용기를 부여잡는다면 세상 그 어떤 시련도 결국 성공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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