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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코로나19 터널 지나 “냇킹 콜과 노른자 동동 쌍화차가 돌아왔어요”

1978년 대구 중구 덕산동 미도화방 2층에 개업
냇킹 콜 ‘모나리자’ 등 1960년대 인기 팝송 은은하게
어르신들 사랑방 & 방송 덕에 2030 핫 플레이스
“인술로 이끌어온 40년, 예의 갖추니 평생 고객”

  • 입력 2022.12.13 09:00
  • 수정 2022.12.13 09:18
  • 기자명 류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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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 미도다방 대표
정인숙 미도다방 대표

‘요즘도 이런 곳이 있을까’하는 의문은 곧 ‘요즘도 이런 곳이’라는 감탄에 귀결된다. 바로 대구 진골목의 미도다방에서다. 진골목은 ‘길다’의 경상도 방언인 ‘질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규모는 최대 폭 5m, 길이 200m에 불과하다. 대구도시철도 1·2호선의 환승역인 반월당역 15번 출구로 나와 떡집이 즐비한 종로를 따라 150m 남짓 걷다보면 좁은 골목길 입구 바닥에 지름 95㎝로 ‘진골목’이라고 쓰인 그림이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도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절모와 헌팅캡 등으로 맵시를 갖춘 어르신들의 발걸음이 유독 잦은 이유는 대구의 명소인 미도다방이 있기 때문이다.

미도다방은 경북 청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3남4녀의 맏이로 태어난 정인숙(69) 대표가 지난 1978년 대구 중구 덕산동 미도화방 2층에서 처음 문을 연 복고풍 가득한 찻집이다. 정 대표의 할아버지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만큼 집안은 일찍이 개화했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정 대표는 생업 전선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1978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대구의 한 다방에 취직해 2만 원이라는 월급을 받은 커리어가 미도다방의 모태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 도시로 공장으로 가족들은 흩어졌고 당연히 사랑방도 이름으로만 남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정 대표에게는 어르신들의 교유공간인 사랑방의 부재가 산업화의 그늘로 다가왔고 스스로 사랑방 노릇을 한다는 일념으로 미도다방을 차린 것이다. 당시 다방의 손님은 대부분 학자, 유력 문중의 임원, 문인 등 지식인으로 지금과 큰 변화가 없다.

 

복고풍, 약차향 물씬․1960년대로 들어가는 문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휴일도 잊은 채 1년에 2일만 쉬는 미도다방에서는 벤 E 킹의 ‘스탠드 바이 미’, 냇킹 콜의 ‘모나리자’ 등 1960년대 전후의 인기 팝송이 은은하게 흘러나와 복고풍을 물씬 풍긴다. 정 대표는 “80대 어르신들이 젊은 시절이었던 1960년대 전후의 음악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고 싶어 틀고 있다”며 “음악 소리가 크지 않은 이유도 자연스레 분위기에 묻어나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330㎡ 규모의 다방에 테이블은 모두 24개, 140석이 붉은색 노란색 등 오색방석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등나무 파티션 등 과거에 유행했던 소품이 다방 곳곳에 배치됐다. 정 대표는 항상 한복을 차려입고 손님맞이에 나선다.

미도다방의 주력 메뉴는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떠 있는 쌍화차다. 당귀 천궁 감초 등 18가지 약재를 넣고 6시간 동안 끓여낸 약차에 호두 등 견과류와 조청을 넣어 고소한 맛과 단맛을 더했다. 가격은 한 잔 당 5,000원에 불과하지만 부채모양 전병 등 간식이 무제한으로 제공되기에 어르신들의 입에 안성맞춤이다. 커피와 주스 등 모두 16가지 메뉴가 있지만 7,000원짜리 빙설이 최대의 사치고 정 대표가 내리는 원두커피 한잔은 2,500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테이블에 놓인 크림가루와 황설탕이 있어 다양한 맛을 연출할 수 있다. 쌍화탕이 쌍화차가 된 사연 역시 이곳이 다방이고 차처럼 가볍게 마신다는 의미가 컸다.

 

문인들의 집결지, 틈새마다 글씨 그림 즐비

벽면과 바닥을 비롯한 모든 틈새는 모조리 그림과 글씨, 수석 등이 빼곡하다. 대부분 손님들이 기증한 것이다. 정 대표는 기증받은 작품 등을 전시해 모두가 볼 수 있게 인테리어 했다.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쓴 글귀가 있는 한편 잉어, 꿩, 나무 등을 그린한 동양화도 즐비하고 한국전쟁 당시 사진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도 전시돼 있는 등 장르는 동서양 고금을 막론한다. 노서구(85) 씨는 지난해 한국전쟁 당시 촬영된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 이곳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그림은 ‘담배 피우는 양반’으로 그는 “어릴 적 우리 어르신들의 모습을 기억하려고 그렸다”며 “지난해 인근 화실에서 연습 삼아 그린 게 완성돼 들고 다니다가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다방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심도 있는 담론까지…“전통이라면 이만한 곳 없어”

미도다방 손님의 그 계층은 유림부터 일반인까지 그 폭이 일반 찻집보다 넓은 반면 손님들의 이야기 거리는 동양철학, 유교사상 등 고전이 주를 이루는 등 유림대회를 연상케 한다. 대부분 유림단체의 임원이거나 문중의 유사, 문인 등이 인근에서 모임을 끝내고 미도다방으로 오기에 이곳에서 이들의 일상은 세의(다른 집안과 자자손손 사귀는 것)다. 미도다방에서는 “퇴계의 몇 대 후손입니다” 등이 전형적인 자기소개다. 김시황(85·경북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성균관석전교육원장은 “대구를 비롯한 의성 안동 경주 등 일대에서 유가의 후손, 문중 임원부터 학자 등 지식인 중 미도다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미도다방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느 조상의 몇 대손인지 바로 읊을 수 있어야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국의 많은 찻집과 다방에 다녔지만 이곳만큼 전통의 냄새와 인정이 풍기는 곳은 없다” 고 덧붙였다. 조병기(66) 횡성조씨대종회장도 “미도다방은 온갖 문중과 유림이 교류하는 장소”라며 “처신에 각별히 신경쓰고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이 바탕에 있어야 진정한 손님이 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복고풍’ 각광 젊은 층도 발걸음, 드라마 소품협찬도

쌍화차와 약차 생강차 등 전통차와 복고풍 음악과 수십년 된 가구 등이 즐비한 미도다방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으로 일약 이슈의 중심에 섰다. 그동안 어르신들의 입소문에 그쳤던 곳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져나가면서 신문과 방송 등 매체에 등장하면서부터다. 정 대표는 “어르신들이 사랑방처럼 왔다 가시는 곳이었고 다방의 이미지도 옛날 분위기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 손님들, 특히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찾기 시작한다”며 “쌍화차라는 것을 이런 분위기에서 맛 볼 수 있는 곳이 없는 것도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미도다방 구석진 자리의 화이트보드에는 온갖 낙서가 이제는 방명록으로써 미도다방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낙서 가운데에는 ‘향로 여러분 100세까지 건강하시길!’이라는 말 아래 ‘곽동언 퇴직기념 친구들 방문’이라는 글귀와 ‘공주사대19(공주대 사범대학 19학번) 왔다가유(왔다 가요)’까지 각기 다른 세대의 방문기가 적혀있다.

몇 달 전 한 신혼부부는 결혼사진을 이곳에서 찍었고 드라마에 필요한 소품을 확보하려는 방송국의 전화도 걸려왔다. 신혼부부의 결혼사진에는 큰 연출이 필요 없었다. 단지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부부가 준비한 것은 꽃 몇 송이가 고작, 사진사는 다방의 분위기를 가득 담아 셔터를 누르면 됐던 것이다. 경기 고양에서 걸려온 방송국의 전화는 이곳에 있는 파티션을 찾고 있었다. 1987년 배경의 드라마 촬영에 필요한 파티션인데 도저히 구할 데가 없다는 연락이었다. 정 대표는 파티션을 무료로 빌려주는데 흔쾌히 승낙했다. 얼마 뒤 방송국은 소품차량을 보내 가로세로 각 150·60㎝인 등 나무 파티션 10개 중 8개를 실어가며 협찬에 ‘대구 미도다방’을 넣겠다고 약속했다.

 

인술로 이끌어온 40년, 예의 갖추니 평생 고객

정 대표는 20세 때 향교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는 등 유학의 조예를 닦았고 31살 때는 당대 유림계의 거장 이수락 선생에게서 혜정(暳晶)이라는 호까지 받았다. 어릴적 할아버지의 영향과 향교의 교육에서 비롯된 예의와 존중은 정 대표가 한복을 입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손님들의 혼사와 장례에 참석하는 등 지인으로써 밀접한 관계 가 되는 것으로 확산했다. 이를 두고 정 대표는 “어르신들께서 주인을 하대하지 않고 ‘정 여사’라고 부르는 등 존중하고 예대하기에 돈독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며 “당대의 학자, 변호사, 의사 등 지식인이 은퇴한 이후에도 다방을 찾아 늘 처신에 신경 쓰시는 게 핵심”이라고 파악했다.

시련도 있었지만 모두 인술로 극복했다. 지난 2020년 급속히 확산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손님의 발걸음도 끊어졌다. 항상 오전 9시면 가게의 문을 열던 정 대표가 하루는 1시간 정도 늦게 출근하던 와중 받은 전화 한 통에서 인술의 중요성을 재확인한 것이다. 정 대표는 “여유롭게 출근하는 중에 단골손님이 전화로 ‘문이 아직 닫혀 있는데 무슨 일이 있는가’라며 걱정했다”며 “한분의 손님이라도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코로나19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가게를 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인격과 인품을 강조했다. 장사를 떠나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인품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정 대표는 “며칠 전에 손님 12명이 와서 차를 4잔만 주문해서 따끔하게 지적했지만 추가 주문은 2잔에 불과했다”며 “다방은 자리값인데 이런 점을 간과하는 손님들에게는 반드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다방을 시작한지 45년, 미도다방의 역사는 50년을 내다보고 있다. 정 대표도 별 일이 없는 한 영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은 집에 있어봤자 의미가 없다”며 “다방이 곧 일터이자 쉼터고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생각해서라도 힘이 닿는 한 9시에 문을 열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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