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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를 세계에 알린다 “10년의 기다림, 드디어 끝이 보입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보
6가야 중 대가야는 ‘국가’로 발돋움한 유일한 세력
1500여년의 세월을 기다려 부활할 고대국가 대가야

  • 입력 2022.12.06 09:00
  • 수정 2022.12.06 09:16
  • 기자명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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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

“대가야는 가야 이상의 가야입니다.”

축배를 들기 직전이었다. 고령군을 중심으로 2012년부터 추진해온 가야 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올해 6월에 최종 결정을 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2021년 유네스코에서 실사단을 파견해 현장까지 모두 둘러본 상황이었다. 2019년 산사, 2020년 서원에 이어 2022년 가야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으로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으나 뜻밖의 복병이 발목을 잡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2월에 최종 서류를 제출했는데, 같은 달 전쟁이 터져버렸다. 현재는 전쟁의 추이만 관망하고 있다. 가야 7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해 중추적 역할을 해온 김세기 대구한의대 명예교수는 “처음 시작 할 때는 고령을 비롯해 경북에서 시작을 했는데, 이듬해부터 경남도 합류해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야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함께 애를 썼다”면서 “현재 프로젝트에 참가한 경북과 경남, 전북 등의 광역자치단체 비롯해 고령, 김해, 함안, 창녕, 합천, 고성, 남원으로 구성된 7개 기초자치단체가 애타게 결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국제적인 문물들이 활발하게 들어왔던 창구, 가야

가야는 우리 역사에서 42년부터 562년까지 500여년간 존속했지만,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주류 세력에 의해 가야 500여년의 역사가 잊힌 셈이다. 후대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와 비교해 기울인 관심이 현격하게 적었다. 가야 연구자들에 있어 가야 역사를 알리는 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낙동강 유역과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까맣게 지워버리기에는 그 세월과 공간에 쌓인 삶의 이야기와 역사의 의미가 너무 두텁고 크다.

독립적인 집단인 가야 세력들은 바다를 통해 일본 중국과 물품을 주고받았고 국제적인 문물들도 들어왔다. 당시 국경에 대한 개념이 크게 없었던 즈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야로 유입된 문물은 육로와 강을 통해 곧 한반도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기세도 만만찮았다. 신라에 복속돼 사라졌다고는 하나 존재할 때는 결코 호락호락한 세력이 아니었다. 경북 경산 임당 고분에서는 신라 중앙에서 받은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자치권을 허락받았고, 한때 군대를 앞세워 경주로 진격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에 패해 자치권이 경산시 조영동에 할거하던 세력으로 넘어갔지만 신라에 덤빌 정도로 강성했고 자신감 또한 넘쳤던 이들이었다. 김 교수는 “신라는 이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달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면서 “진흥왕 순수비에 당시의 그러한 정황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가야는 신라, 백제와 다른 세계였습니다. 토기도 왕족이 썼던 금관도 달랐습니다. 출토된 금관, 귀걸이도 독특한 스타일을 나타냈습니다. 가야는 신라에 비해 귀걸이의 두께가 얇았는데, 일본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백제풍도 일본으로 흘러들었지만 가야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우리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신라 이전의 역사가 크게 부각된 시기가 있었다. 영조 임금 시절, 유교적 문화가 사회 밑바닥까지 뿌리를 내리면서 문중별로 조상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김해 김수로왕릉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함창의 함녕 김씨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고령 가야의 왕이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경북 의성 조문국 경덕왕릉도 세워졌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았던 대가야

김 교수는 6가야 중에서 고령의 대가야를 특히 주목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를 나눠 지배하던 시절을 통상 3국시대라고 하면서 가야는 그저 연맹체로 치부하지만, 김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만 포함시켜 일컫는 3국 시대란 말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대가야는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던 가야였다. 그가 특히 고령 대가야에 애정을 쏟는 이유다.

“역사가 60년 남짓으로 너무 짧았지만, 분명 국가의 요건을 고루 갖추었습니다.” 

1977년 고령 고분에서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은 순장자의 인골이 발굴됐다. 대가야가 보통의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였다. 김 교수는 대가야가 국가였다는 점을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소위 ‘대가야고대국가론’의 근거는 명백하다. 우선 고령 고분군을 통해 대가야가 합천, 거창, 함양, 남원, 광양, 순천까지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해당 지역에서는 큰 제사를 지낼 때 썼던 원통형 기대와 뱀머리 기대(器臺, 그릇받침)를 썼는데 이는 모두 대가야에서 하사한 것들이었다. 제사의 형식도 똑같은 데다, 기대를 비롯해 출토된 장신구, 토기 등의 유물도 모두 대가야에서 내려간 것이었다. 이는 대가야의 영향력과 권위를 증명하는 유물들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인정도 중요하다. 중국의 역사서 ‘남제서’에 따르면 대가야는 479년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대가야는 남조 제나라로부터 ‘가라왕 하지가 바다 밖에서 관문을 두드리며 동쪽 먼 곳에서 폐백을 바쳤으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할 만하다’는 내용의 조서를 받았다. 가라왕을 왕으로 대가야가 국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5세기의 중국은 아시아에서 UN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국의 인정은 곧 국제사회의 공인이나 다름없었다.

 

건국신화에 이어 우륵 12곡 ‘나라의 음악’으로

대가야가 성장하자 신라는 강력하게 견제했다. 낙동강을 장악하고 대가야의 배가 다니지 못하게 막았다. 대가야는 하는 수 없이 합천, 거창,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 지역으로 내려가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띄웠다.

가야가 수로를 적극 활용했다는 흔적은 많다. 유물에 배 모양의 토기가 많다. 백제가 관할한 부안 죽막동에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대가야 토기와 물품이 많이 나왔다. 가야가 바닷길을 자주 왕래했다는 증거였다.

고대에서 국가로 인정되는 또 다른 조건은 왕권 세습이다. 대가야도 왕권을 세습했다. 또한 신라의 6촌장이 중앙 귀족 관료가 되었듯이 대가야 역시 부족장들이 관직을 받고 왕을 옹위했다.

건국 신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3국처럼 대가야 역시 그들만의 신회가 있었다. ‘정견모주’ 설화다. 천신 ‘이비가’와 가야산신 ‘정견모주’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이 각각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479년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을 받은 후 나름의 건국신화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해 음악을 정비했다. 가실왕이 중국의 쟁을 본떠 가야금을 만들었다. 우륵은 12곡의 나라의 음악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가 만든 곡들은 조선의 종묘제례학 같은 역할을 했다.

우륵이 만든 곡들은 훗날 신라에 흡수되었다. 우륵이 진흥왕에게 찾아가 신라로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왕은 그에게 제자 3명을 붙여 연주와 음악이론을 가르치게 했다. 이들은 우륵의 음악을 배워 12곡을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은 이 음악을 들어보고 “음악이 즐거우면서도 퇴폐적이지 않고, 애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고, 진흥왕은 이 5곡을 국가의 악으로 삼았다.

불교 수용과 공인은 백제(5세기), 신라(6세기)와 비교해 늦지 않았다. 도입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벽화에 연꽃 무늬가 쓰였고, 건국신화를 만들 때도 이미 불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비록 수명이 60년을 넘기지 못했으나 분명 그 강성함과 규모, 시스템, 문화 등에서 국가의 체모를 모두 갖추었다.

 

멸망 그리고 1500년을 기다린 부활

대가야의 몰락은 외교적 판단 착오에서 비롯되었다. 대가야에는 친백제와 친신라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신라와 손을 잡았다. 529년 신라에서는 왕족의 일원을 가야 왕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이때 100여명의 시종이 함께 왔다. 이들은 대가야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신라의 정보원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결혼동맹을 파탄이 났다.

신라와 등을 진 후 백제 세력과 끈끈하게 연대해 554년 충청도 옥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1만명의 군사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이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의 부장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이후 대가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의 선봉에 섰고, 결국 대가야를 무릎 꿇렸다. 562년의 일이었다.

“신라는 전투력도 강하고 정치도 잘했습니다. 대가야는 거기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로 존재한 고대 왕국이었습니다. 역사에서 이 사실까지 지울 수는 없습니다.”

대가야는 지금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망각의 무덤에서 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당당한 국가로 돌아오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포성이 멈추면 드디어 대가야의 귀환을 알리는 축포가 터질 것이다. 이제는 가야 왕들의 무덤 사이를 오가며 풀을 뜯고 있을 노루의 꼬리만큼만 더 견디면 된다. 1500여년을 기다린 귀환 축제가 열리기 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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