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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앞두고 “자네가 적격” 물러난 경쟁자,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승부

1997년부터 3년 동안 의성군의료보험조합 대표 이사
선거전 치를 예정이었던 선배 “자네가 더 잘할 것” 사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되려고 늘 조심하고 애쓴 시간
전국 150개 의료보험 지역조합 중 보험료 징수율 1위 기록

  • 입력 2022.11.22 09:00
  • 수정 2022.11.22 09:28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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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1997년 의성군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 선거에 두 ‘명예 면장’이 나섰다. 나와 권상수 전(前) 면장이었다. 내가 후발주자였다. 게다가 권 선배는 전임 대표이사의 추천을 받았다. 선거는 간선제였다. 읍면 대표 20여명이 선거인단으로 나섰다. 선거인단 중 누군가가 “아무개를 대표이사 후보로 추천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면 후보로 나설 자격을 얻게 되는 형식이었다. 회의가 있던 날,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회의가 시작되자 권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상문 전 사무국장을 대표이사 후보로 추천합니다.”

그 한마디로 선거가 싱겁게 끝나버렸다. 나는 단독후보로 대표이사에 당선됐다. 

“선배님, 언질이라도 주시던가요. 너무 황망스럽습니다.”

내 말에 권 선배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선배가 되어서 후배하고 다퉈서야 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배로서의 도리가 이것이라 생각해서 그리했네.”

 

선배에게 배운 출처의리(出處義理)

지금 곱씹어봐도 승리보다 더 아름다운 퇴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명 조식은 “사군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 한 가지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벼슬에 나갈 때 본인이 이를 맡아서 잘 수행할 수 있을지 판단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능력에 걸맞지 않은 자리를 덥석 받아들면 나라의 세금을 축내는 ‘도둑’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권력과 명예가 함께 주어지는 자리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남명은 출처와 관련된 처신을 잘하는 사람을 큰 절개를 가졌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권 선배는 대표 이사로서의 자질이 충분했다. 대표이사가 되었다면 나보다 훨씬 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은 ‘자리’에 대한 욕심을 깨끗하게 비우고 처신을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러기는 쉽지 않다.

선배의 처신은 이후 두고두고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대표이사로서 잘했던 일은 대부분 선배가 보여준 아량과 선비다운 처신에 자극을 받은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내가 이 자리에 적합한 사람인가’ ‘내가 물러날 때 대표이사로서 정말 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마음이 맴돌았다. 늘 조심하고 또 신중하게 상황을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어찌 되었든 치료 잘 받고 퇴원하이소”

지금은 건강보험이 당연한 일이지만 도입 초기만 하더라도 어려움이 많았다. 직원은 직원대로 가입 대상자인 주민은 또 그들 나름대로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제도와 기관 모두 처음 시작하는 단계여서 보수 체계를 비롯해 제도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들은 정부를 대상으로 연일 시위를 벌였다. 복지와 처우 개선이 주요 화두였다.

가입자 확보도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주민들 중에 “정부가 돈을 내서 제도를 시행해야지, 왜 건강한 사람에게 돈을 걷느냐”는 반응을 보인 이들이 적지 않았다. 퍼포먼스 시위를 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조합을 찾아와서 바닥에 와르르 쏟으면서 “보험료 가져웠다”고 소리쳤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97년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말 그대로 하루라도 바람 잘 날 없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다행히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당시 중앙에서는 지부별로 보험료 징수율을 조사해서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대표이사에 취임한 지 1년여 만에 의성이 150개 지역조합 중 의성이 1위를 차지했다. 98년 여름에 낸 성과였다.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랐을 만큼 엄청난 결과였다.

계기가 있었다. 97년 겨울 아무개 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꽤 무거운 병이었다. 병실에 들어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병상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는데 아무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표를 확인한 직후에 아무개 씨와 눈에 마주쳤다. 겸연쩍어하는 표정이 뚜렷했다. 나는 이름표를 못 본 척하고 손을 잡고 말했다.

“어찌 되었든 치료 잘 받고 퇴원하이소.”

아무개 씨는 한 달 뒤에 조합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밀린 보험료를 일시불로 지급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건강 보험이 얼마나 요긴한지 몸소 체험했던 터라 주변에 입이 마르고 닳도록 건강 보험을 홍보해주었다. 우리 직원 다 합쳐도 그 한 사람만큼 홍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진심이 지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결과 보험료 납입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지역보험조합과 공무원보험조합, 교육공무원보험조합이 통합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되었다. 이중 지역보험조합과 교육공무원보험조합이 99년 1차 통합해 정식 출범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교육공무원보험조합이 있는 시군 지역은 지사로 인정되었고, 없는 지역은 민원실로 지사 아래 들어갔는데, 의성은 지사가 생긴 반면 안동은 의성 민원실로 출발했다. 공무원보험조합은 몇 해 뒤에 통합됐다.

 

배려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성공하더라

내 마음에서 대표이사는 내 자리가 아니었다. 매일 매 순간 그 자리에 걸맞은가를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봤다. 이를테면, 선배가 몸소 보여준 ‘출처의리’를 실천하는 자리였고, “대표 이사 직에 안 어울린다” “대표 이사로서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기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 시간들이었다. 조심 또 조심했고 그 결과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선배와 나를 따르고 지지해준 후배들, 결론적으로 나는 인덕이 많은 사람이다.

‘자리’를 ‘벼슬’로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어진다는 말도 있듯이 누구든 ‘자리’에 앉고 보면 목에 힘을 주고 싶어진다. 자기가 가진 권한을 그리고 그 자리에 주어진 위용을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크고 작은 다툼이 일기 마련이고 서서히 인심을 잃어간다.

여러 단체를 거치면서 ‘벼슬’에 취한 사람을 다수 만났다. 단체의 대표나 장(長)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하 직원이 둘셋 있는 자리도 ‘벼슬’이 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괜찮던 사람이 ‘벼슬’에 도취되어서 그 자리를 타고난 것처럼 위세를 부리고, 자기가 나서야 할 일에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빠져나가고 권위와 지위를 앞세워 제 몫이 아닌 것을 탐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보아왔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거기가 끝이다. 더 나아가지도 못 할 뿐더러 더 나빠질 일만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변함없이 주변을 배려하고 자기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늘 다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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