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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머슴아와 전남 장흥 가이내가 만나 50년 해로한 비결

‘진심’으로 아내 마음 얻어, 50년 부부로 사랑도 일도 진심으로 본심으로 해야 속이고 꾀부리면 결국은 성공 못 해

  • 입력 2022.10.26 09:00
  • 수정 2022.10.26 09:30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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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야가 뭐를 잘몬 뭇나, 와이카노?”

결혼할 아가씨를 집에 데려갔더니 마뜩잖은 반응이었다. 그보다 동네에서 난리가 났다. 내 고향 경북 의성은 경상북도에서도 정중앙이다. 순도 백 퍼센트의 경상도 청년이 전라도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하나 같이 손사래를 쳤다. - 당시는 정치판의 영향으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서로를 상극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아가씨 집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경상도 청년이라는 것도 그랬지만, 중매쟁이들이 교사나 공무원 청년의 프로필을 들고 집을 들락거리고 있는 판에 ‘농사꾼’ 사위는 썩 내키지 않았을 것이었다. 게다가 아가씨의 고향은 전남 장흥, 1970년대에 의성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하루가 넘게 걸렸다. 시집이 아니라 유배라는 말까지 나왔다.

“사귄 정이 있는디, 운명이라고 생각허요.”

양가의 반대에도 아가씨의 태도는 확고했다. 오 년 전 우연한 첫 만남이 어느새 운명이 되어 있었다. 정이 참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5년 넘게 편지 주고받으며 사랑 키워

만남의 시작은 ‘경운기’였다. 육십년대만 해도 경운기를 구매하면 경운기 회사 본사에 가서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본사는 경남 진주에 있었다. 

“어이쿠, 정 병장님!”

경운기 회사 교육장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군대 선배였다. 일등병 때 만난 선배였는데, 당시 그는 병장이었다. 정 병장은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배려해주었다. 한번은 감기몸살로 열이 많이 올라 누워 있는데 밤새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가면서 간병을 해주었다. 

4박5일 교육이 끝날 즈음 그 선배가 “우리 집에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진주에서 장흥이 멀지 않으니 지금 당장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전 처음 전라도 땅을 밟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 반 호기심 반이었다.

선배의 집을 방문하던 날,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다. 선배의 여동생이었다. 첫인상이 순순하고 착해 보였다. 통성명을 한 후 몰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뒤로 일 년에 한번쯤 선배의 집을 찾았다. 오 년이나 펜팔을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 지금은 처남이 된 정 선배는 말 그대로 펄쩍 뛰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다른 가족들도 당황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일단 기후부터 달랐다. 같은 나라에 무슨 기후 타령이냐 하겠지만, 아내가 나고 자란 전남 장흥은 남쪽 바닷가라서 겨울이 푹하다. 양배추와 대파가 노지에서 월동을 할 정도다. 여름엔 또 바닷바람으로 시원하다. 반면 경북 의성은 겨울은 유별나게 춥고 여름은 종종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할 만큼 덥다. 여기에 형님이 미국에 계셨기 때문에 둘째인 내가 맏이 역할을 해야 했다. 아내는 당연히 맏며느리였다. 칠 남매를 돌보는 일이 아내의 몫이었다. 

농사도 많았다. 일꾼 셋을 데리고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해에는 밥 짓는데 80킬로짜리 스물두 가마니의 쌀이 들어갔다. 아내가 그 밥을 혼자서 다 지은 것이었다.  그래도 농사만 지었으면 편했을 것이다. 남편이 늘상 무슨 위원이다 위원장이다 호출되는 바람에 바깥일이 많았다.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남편의 사회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얼마 전 아내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같이 살고 싶다. 나하고 같이 삽시다”하고 말했더니, 아내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입으로는 “절대로 같이 살고 싶지 않다”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진심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이를 마음에 적용하면 마음이 천 냥이면 그 안에 진실된 마음이 구백 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저런 전략과 꾀는 잠시는 통하지만 두루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다. 연애를 예로 들자면, 당장 귀에 달콤한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똑같은 이치로 설사 지금은 쓴소리라고 할지라도 진심을 담아 건넨 말은 시간이 흐르면 알아주게 된다. 당장의 서먹한 분위기나 차가운 외면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진심은 힘이 세다.

젊은 시절 나는 내 스스로를 농사꾼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늘 주변에서 장으로 추대를 했다. 어떤 자리를 욕심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맡은 일을 성심성의껏 진심을 다한 것뿐이었다. 그것은 구세군 대장으로 활약했던 내 아버지의 평소 모습이자 가훈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진심으로 다가가고 솔선수범한 것이 다였다. - 내 아내에게처럼.

예비군에서 소대장을 하다가 중대장을 맡은 것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위원 선거에 후보로 추대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금성면장 자리를 그만두고 난 뒤 맡게 된 당 사무국장 역시 여기저기 청탁을 넣거나 전략을 통해 쟁취한 자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나를 지목한 결과였다. 사무국장을 마치고 나서는 의성군 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를 맡았다. 가식 없이 만나고 교유한 덕분이라고 믿는다.

 

◇ 언제든 부르면 달려갔던 예비군 소대장

첫걸음은 향토 예비군에서 소대장이었다. 당시 예비군은 지금과 개념이 사뭇 달랐다. 그저 훈련할 때나 소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평시에도 지역에서 청년 리더 역할을 감당했다. 물론 안 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책임감이 강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평소에도 소대원들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주고 내 깜냥껏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해결하든 못하든 내가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느끼고 또 경험했다. 특히 아픈 사람은 잊지 않고 챙겼다. 병문안을 우선 순위로 잡았다. 술자리나 밥 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이 구성원간의 유대감을 높이고 청년들의 모임이 지역에서 하나의 번듯한 공동체로 인정받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떤 소대장은 매사를 귀찮아했지만, 나는 내 활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구세군 사역자로 일하면서 체득한 지역과 공동체, 나아가 국가관이 가정 교육을 통해 내 마음에 스며든 것이었으리라.

 

◇ 선거로 맞선 고 정해걸 의원 “내 다 이해한다” 화해

장의 위치에서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진심으로 정말 성심껏 하는 사람도 있고 늘 바깥으로 도는 이들도 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처럼 열심히 달릴 수는 없다. 늘 20% 정도는 관심이 없거나 자리만 지키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답답한 마음에 “이런 사람도 있습디다”하고 어느 선배에게 토로했더니 이렇게 조언해주었다.

“콩나물 시루에도 누워서 크는 놈이 있다고 하잖아. 그런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체 분위기를 좋게 끌게 가는 게 중요해.”

포용도 필요하다. 이 부분은 고(故) 정해걸(1939-2021) 의원에게 배운 바가 크다. 정당에서 사무국장을 하던 시절 무소속으로 군수직에 도전한 그와 상대를 했다. 사무국장 자리에 있으면 무소속을 편들 수는 없었으나, 오직 승리에 혈안이 되어서 비난이나 험담을 뱉은 적은 없었다. 결국 무소속의 승리였다. 선거가 끝난 후 정 ‘군수’를 만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를 태산같이 믿었는데, 너무 서운했다.”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 군수는 허허, 웃으면서 내 어깨를 잡았다. “내 다 이해한다.”

이후 정 군수와 선거 전처럼 살가운 선후배 관계를 이어갔다. 그와 맞서서 선거운동을 할 때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존경하는 선배로 여기고 있었다. 그 본심을 정의원도 알아준 것이리라 생각한다.

 

◇ 말보다 마음을 다해 일하는 직원이 ‘진국’

다양한 단체의 장을 맡으면서 나름대로 리더십도 체득했다. 목표를 정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되 의사가 결정된 뒤에는 일사불란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성과를 낼 수 있다. 방향이 정해진 뒤에도 좌고우면하면 결코 목적한 바를 얻을 수 없다. 따르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역동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다. 이런 공동체의 속성 혹은 사람이 함께 모여서 일하는 조직의 원리와 방식을 잘 아는 이들이 결국은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는 것을 무수히 보고 또 느껴왔다. 때로 태산 같이 믿었던 직원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잘하리라 예상되는 사람이 성과를 내기 마련이었다. 자기 말과 고집만 앞세우는 사람치고 도드라진 성적으로 나를 놀라게 한 경우는 없었다. 요컨대, 말이 아니라 성심을 다해 일하고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모두 훌륭한 직원으로 성장했다. 

‘진심’ - 경상도 머슴아와 전라도 가이내가 50년 해로한 비결이자 크고 작은 단체를 이끌면서 체득한 리더십의 요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조금씩 변하고 유행도 새로워지겠지만, 근본은 결코 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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