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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갔더니 연탄배달 전통시장서 장사해 자식 넷 키웠죠”

2002년 군위에 정착, 2016년 전통시장에 밥집 시작
“집밥 같다” 소문, 마음의 허기 달래는 식당으로 유명
“밥집 하면서 딸 둘 시집 보내고, 아들도 대학 보냈죠”

  • 입력 2022.10.14 09:00
  • 수정 2022.10.19 15:23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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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옥 군위전통시장 상인
최순옥 군위전통시장 상인

 

“태어난 곳은 김천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군위입니다.”

장터해장국은 경북 군위 전통시장에서 가장 먼저 불을 켜는 집이다. 3일과 8일, 장이 들어서는 날도 마찬가지다.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시장에 반짝 불이 켜지면 드디어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최순옥 장터해장국(53) 사장은 “2016년에 장터에 식당을 연 뒤 딸 둘 시집보내고, 막내아들 등록금까지 모두 냈다”면서 “군위는 끝없이 이어질 줄 알았던 고생이 끝난 곳이고 전통시장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맙고 소중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벌건 대낮에도 눈앞이 깜깜하던 시절이었죠”

시집오면서 고생길이 열렸다. 20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시댁이 워낙 가난했다. 연탄배달, 노점상, 농사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시댁 근처에 있던 대구 금 호강에서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친정에 기댈 수도 없었다. 친정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맏이였던 오빠에게 장애가 있었던 까닭에 최 씨가 맏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고 시집을 갔는데, 그 정도 힘들 줄은 몰랐어요. 대낮에 눈을 뜨고 다녀 도 눈앞이 깜깜했어요.” 

남편이 93년부터 덤프트럭을 몰았다. 트럭 덕분에 조금씩 일어섰다. 팔공산에서 생산 되는 사과를 실어나르며 돈을 모아 트럭을 한 대 샀다. 얼마 후 부부가 함께 지하철 공사 판에 뛰어들었다. 대구 지하철 1호선 터파기 작업할 때 남편이 트럭을 몰고 그는 이런 저런 잡일에 뛰어들었다. 일꾼들을 지휘해 발파작업에 쓰이는 모래주머니를 만들고, 근로자 숙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복을 세탁하고 새참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렇게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돈이 좀 모이는가 싶더니 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대구에서 나름 대기업 소리를 듣던 건설업체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덤프트럭 세 대로 이제 막 사업을 일으키는 즈음이었던 최 씨의 남편도 빚더미에 앉았다. 남편은 대구에 남아 계속 일을 하고 최 씨는 딸 셋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김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 년을 살았다.

 

“고령화 지역이어서 사업하기 너무 힘들었어요”

“군위로 와라. 셋방 알아봤다.”

남편이 군위에서 일거리를 구했고, 그곳으로 가족을 불렀다. 처음에는 한번씩 남편을 보러 군위로 내려갔지만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군위행을 결행했다. 가족이 흩어져서 사는 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2002년 군위로 왔다. 월세 6만원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얼마 안 가 막내를 임신했다. 하는 수 없이 읍내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곳에 집을 얻었다. 산 밑에 버려진 집이었다. 집 바로 뒤에 돼지우리가 있어서 한겨울에도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2010년 장욱 군수가 취임한 얼마 후 남편은 운전을 그만두고 공무직으로 군청에 출근했다. 

지역 자활센터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청소일을 했다. 2007년에 자활센터에서 독립해 사업체를 꾸렸다. 회사 이름이 ‘자루비’, 직원은 8명이었다. 워낙 꼼꼼하게 일을 잘해서 일거리가 늘었다. 월 6,000만원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다. 문제는 인력이었다. 고령화 지역의 특성상 젊은 직원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2013년에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나처럼 힘든 사람이 이 식당을 물려받았으면...”

2016년 군위 시장으로 들어왔다. 식당 일이 겁나지는 않았다. 2007년에 완공된 삼국유사문화회관을 지을 때 이 년 남짓 막내아들을 업고 공사 현장에서 밥을 했다. “밥 맛있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식당을 연 뒤도 마찬가지였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밑반찬까지 거개 직접 만든 까닭에 “고향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같다”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손님도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식당에서 번 돈으로 딸 둘을 출가시키고 읍내에서 전셋집도 하나 얻었다. “사람 사는 꼴을 갖추어 간 시간”이었다.

한숨 돌린 뒤부터 기부를 시작했다. 지역 자선단체들에 자동이체를 통해 몇 년째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몇 달 전에는 큰일을 앞두고 힘들어하는 자선단체에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한꺼번에 쾌척하기도 했다. 최 씨는 “액수가 크지 않아서 큰 도움이야 되겠는가마는 어려운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응원과 격려는 될 것 같아 한 달도 빠트리지 않고 기부를 해왔다”고 밝혔다.

최 씨의 다음 목표는 “식당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는 “신랑이 조금 더 잘 벌면, 혹은 아들이 번듯하게 자리 잡으면 또 다른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제가 애 넷 데리고 아등바등하던 시절을 겪었잖아요. 그래서 식당은 그때의 나처럼 너무 너무 힘든 이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꼭 저 같은 사람한테요. 여긴 자리가 좋아서 열심히만 하면 거뜬히 일어설 수 있어요. 저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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