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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주인공은 원래 여성들이었다

  • 입력 2022.09.22 09:00
  • 수정 2022.09.22 09:23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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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Caricature_ 강은주)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Caricature_ 강은주)

 

‘명절 증후군’. 명절만 되면 언론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명절 후 편안하게 쉬기 좋은 곳, 맛집 등을 소개하는 것이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어찌보면 명절 발 여성 운동을 보는 느낌이 든다.

여성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노력이 과거부터 많이 있었다. 여성의 존재감은 아동과 함께 높아졌다. 서로를 자극한 것이다.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어린이가 먼저일 것이다. 첫번째 계기는 크리스마스였다. 어떤 면에서 크리스마스는 최초의 ‘어린이 날’ 이었다. 

서구에서는 13세기 즈음부터 크리스마스 성극을 시작했다. 성극에는 어린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어린이가 단순히 ‘덜 자란 인간’이 아니라 ‘어린이’라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었다.  

덩달아서 여성에 관한 대우도 개선되었다. 중세 시대 농민들의 아내들은 아기를 낳을 때까지 일을 계속했다. 그런 혹독한 처우가 조금씩 나아졌다. 어린이가 존중받으면서 산모에 대한 인식도 개선된 것. 그러나 단시간에 모든 것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어린이만 보더라도 산업혁명기에 아동 노동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여성의 존재감 역시 이후로도 많이 약했다. 예를 들어 거울이 한창 보급될 때 여자들이 거울을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푹 빠진다는 것. 그래서 거울을 ‘악마의 엉덩이’라고 부를 때도 있었다. 여성이 유혹에 약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는 술집 간판이 악마의 엉덩이겠지만, 그런 속담은 없다. 여성에 대한 폄훼가 담겨 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우리나라의 추석은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여성의 날’이다. 우선 추석의 시작을 보면 한중일에서 우리가 제일 앞선다.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 794-864)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렇다. 이 승려는 신라를 거쳐 당나라에 갔는데, 당나라에서 추석과 비슷한 절기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신라에서만 8월 보름에 명절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의 추석이 ‘여성의 날’을 연상하게 하는 이유는 즐기는 방식 때문이다. 가배놀이라고 했다. 신라 3대 유리왕 3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매년 한번씩 7월 중순부터 8월 보름까지 6부의 촌을 두 편으로 나누어 베짜는 경기를 벌인 뒤 왕이 직접 심사를 하여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내렸다.

우선 여성들이 주인공이 되어서 축제를 즐겼다. 위력을 과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베를 짰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선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공식적인 참여가 거부됐다. 대왕대비나 중전 같은 위치가 아닌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생각보다 낮지 않았다. 여성들이 참여한 분야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금융업(안방마님이 주변에 돈을 빌려주고 약간의 이자를 받았다), 부동산업, 상업에 관여했다. 사회적 분위기가 남존여비로 흘러갔음에도 여성이 여전히 큰소리를 냈다. 무엇보다 경제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다. 조선 시대에 이런 말이 있었다. 

“길쌈하는 부녀 한 명이 농부 세 명보다 낫구나!” 

조선시대에도 베는 돈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이 입을 옷이 되기도 했지만, 세금 대신 내기도 했고, 시장에 가면 바로 돈이었다. 이를테면, 신라의 가배는 돈 만드는 축제였다. 베짜기 능력이 정말 중요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신에도 도전한 여성이 두 명 나온다. 니오베는 “어떤 여신보다 내가 자식이 많다”고 자랑했고, 아라크네는 자기가 여신보다 베를 잘 짠다고 자랑했다. 아라크네는 거미가 됐다. 왜 하필 베 짜기가 신에게 도전할 만큼 오만을 키웠을까. 서양에서도 베짜기 기술이 그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산업혁명도 면직물과 연관이 가장 크다. 기계화하기 이전에는 베를 짜는 기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베 짜는 능력은 곧 경제력이이었다. 이것이 여성의 목소리를 크게 만들지 않았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려면 ‘자기만의 방’과 연수입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뜻. 이는 지금도 여전한 이야기입니다. 

유독 신라에 여왕이 탄생했고, 가장 작았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이유가 베 짜기 축제를 연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능력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실학자 박제가는 신라의 해상무역을 높게 쳤다. 삼국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신라에는 고대 로마의 특산품이었던 유리잔까지 들어왔다. 지금은 모든 품목을 다 주고받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향신료나 커피, 차, 설탕 등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품목이 교역품이었다. 이 나라에서 베 짜기 기술이 왜 그토록 중요했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한 달이나 축제를 벌였는지 암시하는 펙트일 것이다.

정리 하자면, 베 짜기는 고구려 백제, 그리고 조선에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 기술을 테마로 가장 큰 축제를 열었다. 이는 여성의 능력과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던 나라였단 뜻일 것이다. 지금은 ‘타락’해서 여자들의 괴롭히는 명절로 인식되기 일쑤지만 시작은 오히려 여성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여성이 주인공인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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