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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최고의 리더

  • 입력 2022.09.19 09:00
  • 수정 2022.09.19 09:42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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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때로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관과 주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비유인 듯하다. 

‘물’이 ‘배’를 뒤집는 가장 강렬한 계기는 선거다. ‘물’이 발 아래에 믿고 있다가 뒤집히는 ‘배’도 있었고 ‘물’길을 타고 순항하는 ‘배’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지방 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2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역의 ‘물’과 ‘배’ 모두 정치적 훈련을 거쳤다. 함께 잘사는 지역을 위해 진정으로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지, 또 주민들은 어떤 리더를 뽑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판단하는 시간이었다.  

현직​군수가 ​낙선하는 ​파란 ​“책임지고​ 물러나시오!”

돌이켜보면 나는 민선1기 선거부터 지역에서 열린 거의 모든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시작은 1993년 8월이었다. 그해 면장직에서 물러난 후 민주자유당 의성지구당 사무국장직을 맡았다. 2년 뒤인 1995년에 민선1기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당시 군수로 있던 김복규(1940-2022) 군수가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았다. 김 군수는 의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나 의성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관선으로 고령 군수를 지낸 적이 있었다. 고향도 의성이고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고령 군수를 거치는 등 경험도 풍부했고, 여기에 현직 군수와 제1당 공천이라는 이점까지 얻었다. 

결과는 현직 군수의 낙선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김 군수 측 인사들이 지구당에 찾아왔다. 그들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당으로서도 황망한 결과였지만, 당사자와 측근은 오죽했을까. 열심히 하지 않은 당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책임을 추궁한 것이었다. 

당시 유권자는 6만여명이었고, 김 군수는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다. 간발의 차이이기도 했지만, 낙선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목이 있었다. 투표 용지가 문제였다. 투표 용지가 이전에는 세로였으나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가로 표기로 바뀌었다. 선거 운동원들이 “맨 위에 1번을 찍으라”고 홍보를 하고 다녔는데, 무조건 맨 위에만 찍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당참관인이 날인을 하는 자리에 표기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그 바람에 무효표가 쏟아졌다. 김 군수 측은 “당에서 제대로 홍보하지 못한 탓”이라고 했고, 결국 내가 책임을 지고 사무국장에서 물러났다.

국무총리​ 앞에​ 넙죽 ​절하며 ​“저수지​ 지어주시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김 군수는 여러 호재를 등에 업고도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던 정해걸(1939-2021) 군수는 말 그대로 바닥 민심을 얻었던 사람이었다. 의성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했고, 일찍부터 다양한 부분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분이었다. 솔선수범의 전형이었다. 여기에 사람을 두루 품는 포용력과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인드까지, 지역에서 일찌감치 ‘큰 인물’로 평가받았다. 무엇보다 열정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발로 뛰며 밑바닥 민심을 얻은 덕에 여러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군수직에 오른 뒤에도 그 열정은 그대로였다. 1995년 전국 최초로 군청사 담장을 허물었고, 관사를 장애인복지관으로 내놓았다. 재임 기간 내내 새벽시장에 나가 농산물가격을 점검하고 시장통에서 거둔 쓴소리를 군정에 반영했다. 2000년 ‘마늘파동’ 이 일어났을 때는 농민들이 마늘밭을 갈아엎으려 하자 트랙터 앞에 누워가며 말렸고, 농민들이 정부의 농업 정책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면 머리띠를 두르고 참석해 앞장 서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여기에 평소 늘 주민들의 화합을 강조했고, 실제로도 그 부분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한 장학제도를 만들어 농촌에서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 마디로 지방자치제에 가장 부합하는 행정을 펼친 리더였다. 

가장 큰 사업은 의성 사곡저수지 축조였다. 의성은 타지역에 비해 연평균강수량이 적어서 늘 물 부족에 시달렸다. 정 군수가 강력하게 저수지 축조를 추진해 2000년에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사곡저수지 건설이 결정되기 전, 의성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국무총리가 의성을 방문하자 정 군수는 대로에 나가 맞이하면서 그 앞에 넙죽 엎드린 뒤 이렇게 말했다.

“의성에 저수지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 여기서 못 일어납니다.” 

이런 군수를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저수지는 2014년에 완성되었고 의성 동부 지역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런 저런 노력과 성취의 결과로 정 군수는 무난하게 3선 연임에 성공했다. 또한 군수직에서 물러난 2년 뒤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복규​ 군수,​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 ​이어가

2006년에는 김복규 군수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각오가 남달랐다. 당시 나도 주변의 권유에 힘입어 군수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 군수를 찾아가 만났다. 그는 내게 비장하면서도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가 마지막으로 내게 건넨 말이 ‘꼭 군수 소원 풀고 올라오라’였네. ‘되든 안 되든 선거에 나서라’고 당부를 했다네.”

그는 얼마 전 아내를 잃었다. 나와 같은 면(금성면) 출신이어서 둘이 동시에 나가면 표가 분열돼 둘 다 떨어질 게 뻔했다. 결국 내가 물러나기로 했다. 그는 이후 두 번 연임에 성공했다. 연임을 결정짓는 선거전에서는 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던 정해걸 의원에게 공천을 받았다.

2번에 걸쳐 군수직을 수행하면서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나갔다. 농산물 공판장 유치, 고령 친화 전국 시범 모델로 선정, 조문국 발굴과 박물관 건설 및 유물 보존 등의 업적을 남겼다.

리더의​ 자질, ​민의 ​목소리에​ 겸손하게​ 귀​ 기울여야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통해 리더의 자질과 책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소상하게 밝혔다. 책으로 엮지는 못했지만 나 역시 백성들의 염원을 등에 업고 리더의 자리에 오른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지역을 이끄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내 나름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민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 지역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간혹 주민들을 설득하는데 온 공을 들이는 이들이 있다. 관료의식 때문이다. 주민들을 이끈다는 생각 보다는 주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받들어 이를 군정에 반영해야 한다. 그런 정책들이 어김없이 성과로 이어졌다. 

둘째도 비슷하다. 민간 전문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다양한 경험과 자질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요컨대, 관료주의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민간에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군수든, 조합장이든, 군의원이든 주민을 이끈다는 생각보다는 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배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요컨대, 주변의 지혜를 두루 얻는 것이 정치의 요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당태종(599-649)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폭군’의 대명사인 수양제(569-618)의 저작을 읽다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이토록 훌륭한 사람이 왜 폭군으로 전락했는가?” 그때 곁에 섰던 신하가 이렇게 대답했다. 

“양제는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면서 자기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아무도 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머리로 천하의 정무를 처리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리더의 자질과 관련해 시대를 초월하는 가장 원론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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