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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 치는 시대 ‘서예’는 가장 훌륭한 심적 수양법이죠”

10대에 서예 시작해 40여년 동안 붓 놓지 않은 서예가
“그냥 쓰면 붓글씨, 서예는 붓과 몸의 혼연일체 경지”

  • 입력 2022.08.12 09:00
  • 수정 2022.08.12 12:00
  • 기자명 류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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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송현수씨
서예가 송현수씨

 

“그냥 쓰면 붓글씨죠. 서예는 붓과 몸이 혼연일체가 될 때 가능한 경지입니다.”

대구 서구 평리동의 한 상가 4층, 문을 열자 진한 먹 향이 와락 달려들었다. 대형 테이블 위로 짙은 녹색의 헝겊이 깔려있고 그 위에는 손가락 굵기로 다듬다 만 돌조각이 여럿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크기와 길이가 제각각인 붓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이곳은 서예가 송현수(60)씨의 서실. 돋보기 안경을 3개나 쓴 송 씨는 45년 넘도록 서예를 해왔다. 인장을 팔 때는 돋보기 안경 한두 개로는 턱도 없다고 했다.

 

1986년 동인동부터 평리동까지 벽면에 유명인 작품도

송씨는 1986년 대구 중구 동인동에 서실을 처음 열었다. 사실은 스승에게 물려받았다. 평소 같은 차림으로 서실에 출근해 스승의 먹을 갈고 붓을 정리하는 등 일상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스승이 “내일은 복장을 갖춰서 오게”라고 말했다. 다음날 양복을 빼입고 갔더니 스승이 서실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자네가 이 서실을 운영하게. 여기 와서 학생들 지도도 하고 서실도 관리하고. 이 서실은 자네 것일세.” 

그로부터 얼마 뒤 스승이 작고했다. 송씨의 서실은 동인동 서실을 거쳐 현재 평리동으로 옮겼다. 현재 이곳에는 대형 행서체가 있는데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이 쓴 것이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穿潭底水無痕 (월천담저수무흔)

대나무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고, 밝은 달 연못을 투과해도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서울대 교수 시절부터 틈나는 대로 서예를 해온 정 원장은 송씨와 단연 막역한 사이다. 수시로 필체나 글귀 등 서예를 두고 담론을 펼치기도 한다.

 

“치는 문화에서 필요한 것은 쓰는 정성”

4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상이 변했다. 붓글씨도 더더욱 옛문화가 되었다. 송씨는 “오히려 서예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짚었다. “쓰는 문화에서 (자판을) 치는 문화로 넘어가는 현시대에 정말 필요한 심적 수양법”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선 붓글씨와 서예는 달라요. 단순히 글만 따라 적는 것은 붓글씨입니다. 서예라는 것은 많은 고전을 탐독하고 다양한 서체를 익힌 뒤 마음이 일어나 붓을 쥐어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송씨의 지론이다.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서양의 붓은 붓 전체를 쓰지요. 하지만 동양의 붓은 다릅니다. 붓도 부위별로 명칭이 있어요. 먹을 묻히는 이 부분을 호라고 하는데 이것도 호와 부호로 나뉩니다. 실제로는 붓의 ⅓정도인 호만 사용하죠. 붓이 잘 휘기 때문에 손이 아니라 온 정신을 집중해 획을 그려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일어야 획이 나간다”

송씨가 쓴 글자는 대부분 논어와 불경 등 고전에서 가져온 글귀다. 어느 글귀 하나를 보더라도 그 뜻이 와 닿아 붓을 잡겠다는 마음이 일어야 한다는 것. 시구를 하나 쓰더라도 시를 지을 당시 화자의 심정이나 배경 환경 등을 자신과 동화해야 자신의 획이 나온다는 것이다.

전서체부터 인쇄체까지 송씨의 경력에서 일반적인 글씨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글씨체이기 때문이다. “인쇄체를 베껴 쓰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오히려 프린터가 훨씬 뛰어납니다. 그럼에도 왜 사람이 쓰느냐는 것은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고유의 획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송씨는 엄격한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붓글씨를 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도 단순히 베껴 쓰는 데 그친다면 서예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서예는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이 가지고 있는 심상적 태도가 중요한데 이걸 간과하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아쉽습니다. 99를 이뤘다고 해도 마지막 1을 남겨둔 채 잠시 잘못 생각하면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 있는데 이 말을 참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한 가지 덧붙였다.  “경지에 이르면 손놀림이 아니라 붓놀림이고 붓에 몸을 맡기게 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글자가 나옵니다.”

 

글자마다 낙관 달라 인장도 가지가지

그의 전매특허는 인장에도 있었다. 죽은 것, 버려진 것 등 하찮은 것에 새숨을 불어 넣어 의미를 새로 입힌다는 것이다. 그는 전남 해남의 한 채석장에서 손바닥만한 돌을 여럿 주워왔다. 상품으로 가공될 돌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했으나 그 누구도 희생은 생각지 않는다는 점 등에서 영감을 얻은 것. “예술이라는 것은 작가의 의미부여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작가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특히 버려진 돌처럼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존재에 새로운 의미와 쓰임새를 부여하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요.”

송씨는 15㎝가량 길이인 칼을 들어 먹물을 살짝 묻힌 돌에 글귀를 새긴다. 한 획 한 획 쓰는 게 아니라 영어 알파벳 필기체 쓰듯 쓱쓱 그어나가는 것이다. 하얀 돌가루가 먹과 대조를 이루고 옆에서 아무리 지켜봐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이 들 때 쯤, 송씨는 ‘후’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돌가루를 날린다. 그러면 선명한 획이 드러난다. 사실 개인전 14회 등 여태까지 수많은 글자를 쓰고 작품을 남겼지만 개인전의 준비는 인장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이라는 송씨. 그의 인장은 종류도 다양한데 낙관을 찍을 때도 인장이 제각각 다르다. 이유는 명백했다. 작품마다 잘 어울리는 인장이 있다는 것. 1년 365일 뇌리를 수놓은 것은 글귀와 글자, 서체와 서법 등 서예의 요소이지만 언제나 획을 그리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영감이 와야 붓을 들고 획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예는 어려운 정신수양, 대중화 필요한 이유”

10살 전후부터 서예를 시작한 송 씨이지만 여전히 서예는 어려운 정신수양이다. 하지만 송씨는 서예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서예의 대중은 서예인이고 서예를 모르는 사람들은 서예를 알려고 해도 모릅니다. 서예인이 스스로 폭을 넓혀서 대중들에게서 사랑받아야 합니다. 서예는 5000년이 넘은 손글씨 문화이고 몰입문화입니다. 자판으로 두드려서 편하게 입력하는데 익숙해져서 손으로 쓰는 만큼 정성은 덜한 게 사실입니다. 서예는 우리 고유의 문화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의 철학은 명확하다. 역량 있는 서예가를 발굴하고 과거의 금기시했던, 소위 불문율을 과감히 탈피해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예가 스스로가 본연의 정신인 자아성찰을 거듭해 선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문 화예술인이 되도록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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