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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두 개의 대한민국’으로 구성된 나라다

  • 입력 2022.05.31 09:00
  • 수정 2022.06.27 15:31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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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Caricature_ 강은주)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Caricature_ 강은주)

 

봄과 여름 사이, 나들이하기 딱 좋은 즈음이다. 지난달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되면서 가족 단위의 나들이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제일 반기는 분들이 식당 사장님들이 아닐까. 어느 사장님은 “조치가 해제된 바로 그날 매출이 50% 상승했다”고도 했다.

2년 남짓 자영업자들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규모의 국민 모두 골고루 혜택을 입으려면 내수가 살아나야 하는데, 성장의 심장이 얼마나 힘차게 돌아가느냐와 상관없이 혈관이 콱 막힌 형국이었다. 

 

경제 성장은 곧 국가 성장? NO!

경제는 간단하게 성장과 분배의 합이다. 경제 성장의 모델은 산업혁명기의 영국이 제일 좋다. 말 그대로 무섭도록 성장했고, 산업혁명이라는 무시무시한 혁신을 이루어 냈다. 산업혁명하면 증기기관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연료가 나무에서 석탄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나무와 비교해 석탄은 캐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당시로 봤을 때는 거의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멈추지 않고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 제조업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수출 덕분이었다. 산업혁명은 1760년에서 1840년 사이에 일어난 거대한 변화이지만, 수출은 이전부터 꾸준히 늘었다. 1700년에서 한 세기에 걸쳐 일어난 무역 변화를 보면, 수입이 523%, 수출이 568% 증가했다. 비슷하게 늘었다. 그러나 재수출 증가율은 906%였다. 식민지에서 들여온 상품을 유럽에 되파는 식이었다. 

 

수출 때문에 제조업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다. 18세기 전반을 놓고 보면 내수용 제조업은 7% 성장하는데 그쳤지만, 수출 위주의 제조업 분야는 70%나 성장했다. 1750년부터 30년 뒤까지 다시 80% 성장했다. 경제 성장은 수출의 결과물이었다. 산업혁명도 수출로 부가 축적되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국가의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양극화가 커지면 다양한 문제가 일어난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설명하는 용어 중에 ‘two n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들은 영국, 독일, 미국 같은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영국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부자 영국과 가난한 영국이 극렬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그 해결책으로 ‘공산주의 영국’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만능주의자라고?

영국은 왜 공산화가 되지 않았을까. 영국은 성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나 분배에도 신경을 썼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혜와 독점을 감시할 정부의 의무를 강조하기도 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애덤 스미스의 사상에는 성장과 분배에 관련된 두 흐름이 공존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 것 자체보다 국민 모두, 특히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생산의 결실을 충분히 누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영국인들의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분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영업자일 것이다. 미국은 비중이 다소 떨어지는 제조업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여서 분배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우리는 자영업의 비중이 크다. 특히 식당 같은 자영업 업종은 근본적으로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하다. 고용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실학자 박제가는 신라의 경제적 번영을 이야기하면서 배와 수레를 언급했다. 배는 밖으로 나가는 상품이었을 것이고, 수레는 국내 유통을 담당했다고 봐야 한다. 수출과 분배를 다 잘한 것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자영업자가 거의 없었다.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던 까닭입니다. 농업에 집중한답시고 고려 시대에 있던 시장도 없앴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물품은 거의 물물로 교환되었을 것이다. 양반 계층을 예로 들면 생필품을 선물로 충당했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서 물품이 들어왔다. 미암일기를 쓴 유희춘은 한 달 평균 42차례나 선물을 받았다. 목록을 보면 집 빼고 거의 다 들어 있었다. 

 

살아나라, 저녁의 대한민국!

그런데, 시장이 허락되는 시기가 있었다. 바로 흉년이 들 때였다. 서로 가진 것을 바꾸기 위해 자연스럽게 장이 섰고, 나라에서도 이를 허용했다. 전쟁도 시장의 발달을 자극했다. 조선시대를 보면 임진왜란 이후에 상설시장(5일장)이 들어섰다. 

 

6.25를 대표하는 노래도 ‘굳세어라 금순아’다. 당시에는 ‘전선야곡’ 등 전쟁과 관련된 노래가 많았지만 결국 ‘굳세어라 금순아’가 최고의 히트곡으로 남았다. 노래의 화자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다. 시장의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요컨대, 시장은 평시든 위기의 시기든 분배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투네이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양극화가 심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낮의 대한민국과 저녁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교통체증을 분석하면 첫 번째 이유가 ‘모임이 많아서’이다. 러시아워에 퇴근하는 사람만큼 모임이 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모임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활동이다.

 

유럽 등 외국에 나가면 저녁만 되면 길거리에 불이 다 꺼진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거의 24시간 돌아간다. 그걸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해가 진 뒤 분배 경제가 돌아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넓게 보자면 다양한 일자리를 위해 리쇼어링도 필요하겠지만, 우선 자영업이 되살아나는 것이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 회복을 이루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일 것이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이제 막 벗어나고 있다. 두 개의 대한민국이 힘차게 돌아가서 경제가 코로나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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