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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공부를 썰어 난 기술을 썰게’ 노릇노릇 누룽지로 구운 꿈

삶숲 3,000
[프리뷰] 김석호 대구한국일보시민기자대학 총동창회 골프회장

  • 입력 2022.05.06 09:00
  • 수정 2022.05.06 11:18
  • 기자명 김윤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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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 대구한국일보시민기자대학 총동창회 골프회장
김석호 대구한국일보시민기자대학 총동창회 골프회장

 

이맘때 그의 고향 마을은 배꽃 천지다. 배꽃은 화려하지 않아도 매혹적이고 무채색 으로도 우아하다. ‘이화에 월백하고’, ‘이화우 흩뿌릴 제’ 절창을 자아낸 꽃잎이 봄날 바람에 흩날린다. ‘배꽃 피면 벚꽃놀이 일 없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달빛 좋은 봄 밤, 은은히 순백으로 눈부신 배꽃 아래를 지나 본 사람은 어리는 꽃빛과 꽃그늘을 평 생 잊지 못한다.

김석호 대구한국일보시민기자대학(대시대) 총동창회 골프회장의 고향, 경북 상주 시 외서면 관동리. 이곳에선 ‘갓골’, ‘깃골’이란 토박이말 이름이 귀에 더 익다. 마을이 처음부터 배밭 단지는 아니었다. 마을은 해발 297.6m 천마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약 간 길쭉한 모양새. 천마산 봉우리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능선이 마을의 북쪽 경계선이 다. 그 너머는 연봉리. 관동리와 연봉리는 천마산을 사이로 남북으로 맞닿아 같은 산 기슭 생활권을 이룬다. 새벽에 눈뜨는 새들처럼 산자락에 둥지를 튼 두 마을은 부지런 함이 일용할 양식인 듯 평지는 적어 산기슭에 걸쳐 있다.

 

1. 땅 한 뙈기 없는 집에 태어나 

얼마 되지 않는 논배미 벼농사가 주민들의 온 생계였다. 논이 귀하다 해도 그의 집 은 더욱 땅 한 뙈기 없었다. 궁벽한 살림에 아버지는 일에 허덕여 자주 지쳤다. 술로 시름을 달래던 아버지는 점점 술에 기대 살았다. 대포 몇 잔을 걸치면 아버지는 가난 따위 없는 세상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어린 그는 아버지가 혼자 도망친 거라고 생 각했다. 그는 골목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슬펐다.  

마을에 백원초등(당시 국민학교)이 있었다. 등굣길은 가까웠지만 발걸음이 무거웠 다. 그는 늘 육성회비가 밀렸다. 보통 4월까지는 선생님도 별 말이 없었다. 6월쯤 되 면 채근이었다. 2학기가 되면 성화였다. 미납자는 천덕꾸러기처럼 교실 밖으로 쫓겨 나기도 했다. 아무리 닦달 한들 그에겐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도지 얻은 종중 논에 서 벼를 거둬 수매에 댄 뒤에야 집에 얼마간 돈이 생겼다. 


지옥을 질러가는 타는 부끄러움

5학년 2학기 어느 날 수업 중인 교실에 교감 선생님이 들어왔다. 미납자들을 불러 세우더니 지금 육성회비를 받아오라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운동장을 걸어나갔다. 지옥을 질러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지옥편, 타는 듯한 부끄러움이었다.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그는 빈손으로 올 게 뻔했 다. 빈손으로 학교로 돌아온 그때가 진짜 문제였다. 아버지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이 번으로 끝이기를 바랐지만 내년에도, 후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이럴 거였다. 가을소풍보다 봄소풍에는 김밥 싸 오는 아이가 더 드물었다. 보리밥으로는 김밥을 쌀 수 없었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아이들은 콩밥을 싸 왔다. 대부분은 너나 없이 보리밥 도시락이었다. 그는 아예 도시락을 싸 가지 못했다. 그의 빈 몸만 소풍을 갔다. 소풍 가는 날의 ‘연례 행사’, 삶은 계란도 톡 쏘는 사이다도 그와는 멀었다. 미술 시간 은 빨리 닥쳤다. 크레용, 켄트지….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 간 적이 없었다. 학교 가는 일이 자꾸 창피를 감당하는 일이었다. 모멸을 삼키는 시간은 그를 빨리 철들게 했다. 6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술을 끊어서라도 중학은 시켜주겠다고 안심시켰지만 믿을 수 없었다. 죄송했다. 아버지가 미웠다. 초등 졸업과 중학 진학을 목전에 두고 그는 어린 속에 꽤나 품었던 말을 끄집어냈다. ‘중학교는 안 갈랍니더.’


‘중학교는 안 갈랍니더’

집에 도둑이 들었다면 잡거나 쫓아내야 한다. 당장 그렇다. 그에게 지금 그의 집은 도둑이 든 처지였다. 초등 학비도 일곱 식구 끼니도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살림이라 면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창피해서라도 그랬다. 그해 돈은 더 말랐다. 대구에서 제 일 크다는 약국에서 일하던 둘째 형이 돌아와 약국을 차렸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가 먹이던 소도 팔고 벼 수매한 돈까지 들여도 모자랐다. 중학교를 포기하길 잘했다 싶었다.

 

  2. ‘공부 대신 인생서 먼저 성공할게’  

초등 졸업생 동기 70명 중에 진학을 포기한 친구는 다섯이었다. 중학생이 된 친구 들이 부러웠지만 꿀리기는 싫었다. 친구들이 중·고·대학 10년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인생에서 먼저 성공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어린 마음에도 기술을 배워 돈버는 일이 공부보다 중요했다. 당시는 경운기며 농기계가 아직 보급되기 전이라 농번기 일손이 늘 부족했다. 큰형과 셋째 형이 아버지를 도와 종중 논에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렸다. 학교 밖으로 나온 그는 셋째 형의 농사일을 넘겨 받았다. 셋째 형은 대구의 양복점으 로 취직해 나갔다.


돌아온 셋째 형…그의 취직 차례

뜻밖에도 한 달이 안돼 셋째 형이 돌아왔다. 반가웠다. 취직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 는 그의 마음을 셋째 형이 알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예전대로 셋째 형이 다시 농사일을 맡았고 그가 이제 취직 차례였다. 험하고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기름때 묻고 쇳가 루를 마셔도 괜찮았다. 어서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 모으고 싶었다. 양복점에 취직 하라던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그는 철공소를 택했다. 대구 원대오거리에 있는 꽤나 큰 공장이었다. 섬유산업이 기지개를 켜던 시절이었다. 원대오거리 공장들은 밀려드는 섬유기계 주문으로 잔업이 이어졌다.

당시 원대오거리 주변 하숙비는 월 1만 5,000원. 그는 한 달 하숙비 1만 5,000원만 고 대구로 왔다. 철공소 한 달 월급도 1만 5,000원이었다. 한 달 일해 하숙비를 대 고 나면 무일푼, 쓸돈 한푼 없었다. 몇 달은 그리 살았다. 용돈을 벌려면 잔업을 해야 했다. 공장 바로 옆집이 중국집 식당이었다. 시키지 않은 배달이 냄새로 담을 넘어왔 다. 그러다 잔업 때 먹는 자장면은 잠시 정신을 잃을 만큼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였지 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후 다시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첫 번 째 인생 맛집! 잔업이 없는 날은 섭섭했다.


선반보다 작은 열다섯 살 ‘선반사’

그가 철공소에 취직한 것은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전제가 있었다. 당장 큰 돈 을 벌기보다 기술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기술을 배우면 먹고살 수 있었다. 아니다. 기술을 배워야만 먹고살 수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늦게 퇴근해서도 잠들 기 전 그날 배운 기술을 복기했다. 집중력과 눈썰미도 필요했다. 선반 기술은 모든 기 계 작업의 최소 기본. 요즘 기준으로는 기능 수준이지만 당시 공장에서는 선반 기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선반사’(旋盤士. 일본식으로 ‘선반시’라고 불렀다)라고 높여 부 르며 기술자 대접을 했다. 선반사에게는 전용 선반 기계를 한 대씩 배정했다. 철공소에서 자신의 전용 선반 기계를 갖는다는 것은 전세 살다 정원 딸린 자기 집으 로 이사간 것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선반 기술을 다 배우는데 보통 2~3년은 걸리지만 그는 노력한 만큼 1년 만에 다 뗐다. 사실은 6개월만에 다 배웠지만 선반사라 하기엔 아직 어렸고 키도 작았다. 하지만 나무 발판을 놓고 올라서 선반 작업을 해내는 다부 지고 당찬 모습을 보고 공장장은 결국 최단 기간 1년만에 그를 선반사로 승급시켰다. 열다섯 살에 선반사가 된 그는 전용 선반 기계를 선물 받은 듯 기뻤다. 이 공장에서 선 반사에게 배정된 전용 선반 기계는 5대뿐이었다.

 

  3. 인생에 정해진 순서란 없다  

철공소 선반사 등으로 7년 가까이 일한 그는 오대금속 경력직 시험에 합격해 핵심 부서인 금형 개발부에서 일하게 됐다. 1978년 설립한 오대금속은 당시에도 종업원 수 백 명의 큰 회사. 그동안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자동차 부품에서 의료, 항공, 방위 산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지역 중견 기업이다. 지난 2월 주식회사 오대 로 법인 명칭을 바꿨다. 그때는 자전거 깔깔이 기어와 크랭크, 자전거 기어 변속기 등 을 생산해 독보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

그는 오대금속의 인사 방식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서울대 출신의 신임 상무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경북공전(지금의 경일대) 기계과 출신 3명을 신입 사원으로 뽑아 3개월 수습 후 계장으로 승진시켰다. 이들은 모두 전문대 2년, 군 대 3년을 막 마친 26세였다. 경력 16년의 50대 현장 책임자는 아직 과장이었고 현장 주임은 46세였다. 그 역시 여기서 16년을 근무해도 주임밖에 더 될까. 스물여섯 전문 대졸 신입 사원을 파격적 승진시킨 것은 전문대 기계과라는 학력의 힘이었다. 그때까 지 그는 사실 의도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부모를 잘 만나 공부할 수 있는 아이들 에 대한 오기 같은 것이었다. 기술 배우고 돈 많이 모으면 성공이고 출세라고 생각했 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현장 관련 전공 공부 없이 현장 경력만으로는 성공하기 어 렵다는 것을 큰 회사에 와서야 알았다. 

결론은 명확했다.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공부를 해야 했고 대학을 나와 야 했다. 마침 성탄절 전야여서 친구들과 모임을 했는데 섬유 공장에서 기사로 일하 는 친구가 늦게 왔다. 학원에서 고시 공부하고 오느라 늦었다는 것이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아닌 검정고시가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성탄절 지나 바로 가까운 동인 동 고시학원에 등록했다. 인생에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순서가 좀 바뀌 었을 뿐 그때 그는 스물셋이었다.


스물셋 나이에 처음 써보는 ABC

그는 23세에 처음 영어 ABC를 써봤다. 영어 단어를 외우며 그때까지 그림으로만 봤던 영어 간판이나 상표의 의미를 알게 됐다. 기뻤다. 수학 공식을 외웠고 방정식도 풀었다. 국어 공부를 다시 하며 소설도 읽었다. 역사 공부는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을 다시 불러냈다. 물리와 화학은 어려웠지만 현장에서도 유익한 게 많았다. 좀 늦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할수록 공부가 뿌듯했다. 머릿속에서 하나 둘 가로등이 켜 지는 것 같았다. 진작에 버려두고 떠났던 곳, 어두운 줄도 몰랐던 골목들이 환해졌다. 오대금속에 일하던 3년 동안 그는 주경야독 중학·고등 검정고시를 마쳤다. 그의 인생 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4. 삶은 저마다의 이유로 힘겹다  

개강 첫날 포니2 새차를 몰고 나타난 형이 있었다. 나이는 여덟 살 위인 31세, 큰형 님 뻘이었다. 당시 가장 ‘핫한’ 차를 몰고온 형은 금세 학원내 톱스타가 됐다. 학원이 동인동 갈비찜 골목에 있었는데 형은 거의 날마다 주변에 갈비찜을 사줬다. 한 반이 20명이었는데 우리 반 전원을 부르고 10여 명인 학원 선생님도 다 불러 ‘거국적’ 갈비 찜 회식도 종종 해줬다. 서로 도우면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좋은 의도였다. 돈이 좀 있어서 쓸 뿐이라고 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반 친구들을 불러내 갈비찜을 사주고 여관방 얻어서 같이 공부하자고 할 정도였다. 아낌없이 돈을 써서 혹시나 학원 생들을 포섭하기 위해 침투한 간첩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돈을 물쓰듯…‘학원 침투 간첩 아냐?’

형은 원래 이복 형님이 경영하는 고물상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알루미늄 전문 고 물상이었다. 알루미늄 고철을 녹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잉고트(ingot, 주괴, 鑄塊) 를 알루미늄 제품 회사에 납품했다. 동갑인 이복 형님의 아들과 같이 일했는데 일은 형이 거의 다 했는데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형은 8년 전 독립해 같은 고물상을 차렸다. 일머리는 다 꿰고 있었으므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때는 냄비, 솥 같은 알루미늄 식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던 시절. 노다지였다. 갈쿠리로 끌어담 듯 돈을 벌었다.

큰돈을 벌었지만 초등 졸업의 학력은 형의 인생에서 메워야 할 구멍 같았다. 뒤늦 게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한 이유였다. 공부는 시작했지만 용의주도한 일머리와 달리 공부머리가 따라가 주지 않았다. 삶은 저마다의 이유로 힘겹다. 형은 공부머리도 있 고 사람을 잘 챙겨주는 그를 단짝으로 삼았다. 그는 형의 공부를 개인 과외하듯 도 와줬다. 형이 중·고 검정고시를 합격할 때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줬다. 대신 형은 가 난한 그의 처지를 잘 알아서 수시로 용돈을 찔러 줬다. 그가 용돈이 떨어질 때면 형 은 귀신 같이 알았다. 형은 눈치가 빨랐고 상대가 편하게 잘 배려했다. 둘은 서로 가 족처럼 의지했다. 


“이 나이에 재수한다고 명문대 가냐”

공부에는 연속성이 있다. 힘들더라도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 도중에 그만뒀다가 다 시 시작하면 따라가기가 그만큼 어렵다. 10년 가까이 밀쳐둔 공부를 어느 날 다시 시 작해 잘 해내기는 어렵다. 3년 주경야독 끝에 중·고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학력고사 의 벽은 높았다. 그의 학력고사 점수는 1지망 대학(4년제 대학 상위권)을 지원하기에 는 버거웠다. 공교롭게도 1지망 대학 원서 쓰는 날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철없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많이도 원망했던 불효 아들의 슬픔은 더 컸다. 생전에 아버지께 다 사과하고 마음을 풀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어수선했 다. 재수를 해서라도 1지망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이 나이에 재수한다고 좋은 데 간다 는 보장이 없다’는 고물상 형의 말을 따랐다. 둘 다 3지망 대학에 지원했다. 그는 영남 공전(영남이공대)에 합격해 졸업 후 개방대(경일대) 기계과에 편입했다. 형은 신일전 문대(수성대)를 마치고 개방대 경영학과에 편입했다. 둘은 개방대에서 다시 만났다. 형은 대학 졸업 후 사업으로 더 큰 돈을 벌었다. 성서공단이 처음 생겼을 때 부지 

2,000평에 제2공장을 지어 자동차 부품 특수 볼트 공장을 차렸다. 평소 덕행을 쌓았 고 이미지도 좋아 시의원에 첫 출마해 당선됐다. 의정 활동을 위해 1공장은 처남에게, 2공장은 외부 인사에게 맡겼는데 2공장의 경영 등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형은 그에게 2공장을 맡아 상황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 곡히 거절했다. 그 부분은 보다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인재가 맡아야 할 영역이라고 판단했다. 정치와 경영은 양립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부침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와 형 의 관계는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5. 서른 ‘수중엔 대학 졸업장, 단돈 10만원뿐’  

영남공전 야간부에 입학한 그는 등교 가능한 거리에 있는 직장을 찾아야 했다. 이 전에 다녔던 직장이 그 거리 안에 있었다. 그는 옛 직장에 다시 들어갔다. 사장은 일솜씨 좋았던 그를 반겼다. 그는 사장의 아들과 동갑. 사장은 직장 생활하면서 검정고시 로 야간대학까지 들어갔다니 장하다면서 매일 오후 4시 반에 퇴근해 등교할 수 있도 록 배려해 줬다. 1시간 반 먼저 퇴근할 때마다 다른 직원들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2년 을 마치고 개방대에 학사 편입했다. 학교가 너무 멀었다. 개방대는 동구 효목동에 있 었다. 버스 통학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묘책은 오토바이. 급할 때는 잠시 인도로 달렸더니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마라톤을 완주한 피로감과 성취감

1991년 그렇게 대학 4년을 마쳤다. 마라톤을 완주한 기분이었다. 극도의 피로감과 성취감이 함께 몰려 왔다. 23세에 시작한 검정고시 3년을 마치고 26세부터 야간 대학 을 4년을 다녀 졸업하니 서른이었다. 졸업식 날 하숙집에 돌아와 살펴보니 수중에는 대학 졸업장과 단돈 10만원이 전부였다. 7년 동안 월급은 공부하고 먹고사는 데만 썼 는데 남는 게 없었다. 돈을 모으려면 잔업에 연장 근무, 토·일요일 특근을 해야 했다. 7년 동안 그 시간에 그는 검정고시 공부와 대학 학과 공부에 전념했다. 월급 많이 주 는 직장이 아니라 시간 많이 주는 직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졸업장 하나 받기 위해 빈털터리가 됐으니 이제부터 5년 동안은 돈을 모아 결혼을 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대구열처리였다. 친구 소개로 가게 됐는데 사장은 대학(개 방대) 기계과 선배이자 총동창회장 출신이었고, 상무는 대학 전기과 출신으로 둘 다 동문이었다. 인연이었다. 6년을 근무한 이곳에서 그의 최종 직위는 생산차장. 부지런 히 일했고 알뜰히 모아 논공과 경산 진량의 근로자 용 아파트를 각각 분양 받았다. 이 회사 경비원 아저씨가 나중에 집사람이 될 사람의 종고모부였다.


퇴짜, 퇴짜 끝 ‘반전 있는 맞선’

1996년 서른다섯이던 그는 위 종고모부의 소개로 전직 은행원 아가씨와 결혼했다. 부인은 국민은행을 다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 후 복직을 미루고 있었는데 당시 김 영삼 정부 청와대 부속실장의 동생이었다. 그는 선을 많이 봤는데 대부분 퇴짜를 맞았 다. 당시만 해도 체중이 47~48kg로 바싹 마른 왜소한 체구였는데 이게 주로 퇴짜의 이유. 부인과의 첫 만남에서도 그는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같은 직장에서 5년 동안 그 를 지켜보았고 나름 뒷조사까지 마친 종고모부가 오빠(처남)를 설득했다. 사람이 아주 성실하고 착하고 믿을 만하며 생활력이 강하다는 내용이었다. 오빠로부터 이런 말 을 전해 들은 동생(부인) 은 한 번만 더 만나 보고 결정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반전의 계기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 사람이 달리 보여 호감을 갖게 됐고 이것이 인연이 돼 결 혼으로 이어졌다.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인 그는 지금도 ‘처남들이 전부 키가 180cm 가 넘는 데다 미남들이어서 처음엔 내가 눈에도 안 찼을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 부 부는 서로가 참 편하다. 누구도 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6. 반대 무릅쓴 창업…5년만에 흑자  

대구열처리는 한국중공업과 거래를 많이 했다. 1996년부터는 새로운 생산품인 롤 러 소재의 열처리 공정을 맡았다. 롤러는 포스코 등 제철소의 철판 생산 과정에서 철 판의 아래 위에서 맞물려 철판을 일정한 두께로 압착하고 밀어내는 소모품. 롤러 1개 의 무게는 10t으로 무척 크다. 롤러가 25mm 이상 닳으면 폐기하고 새로 설치한다. 뜨거운 철판을 누르고 밀어내는 롤러이므로 아주 강하고 단단해야 한다. 그동안 포 스코, 동부제강, 인천제철 등 국내 업체는 롤러를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서 썼다. 이에 포스코와 한국중공업이 합작해 롤러 국산화에 나섰다. 한국중공업에서 소재를 만들 면 이를 1차 가공 절삭, 열처리, 연마 등의 정밀 과정을 거치는데 대구열처리는 열처 리 등 과정 협력사다.

1996년 한국중공업은 협력사를 대상으로 롤러 제작 공정 설명회를 열었다. 그는 대 구열처리 직원들과 함께 설명회에 참석했는데 설명을 듣는 그의 머릿속에 거의 완벽 할 정도의 사업 구상이 떠올랐다. 오랜 실무 경험이 바탕이 돼 설계도까지 그려졌다. ‘ 아, 이것다.’ 그는 독립해 롤러 제작 협력사를 차리려고 바로 사표를 냈다.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회사에서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 없었다. 그는 내보내기에는 아까운 실력 을 갖춘 직원이었고 권력 핵심에 가까운 사람의 매부였다.


첫 번째 도전 ‘제철 용 롤러 제작 협력사’

문제는 부속실장인 처남이 그의 사업을 극력 반대했다는 점이다. 처남은 그에게 사 업을 할 스타일이 아니라며 만류했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혹시나 권력 주변 의 친인척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고를 칠까봐 왠만한 사업들은 뜯어 말렸다. 처남 이 한사코 반대하자 그는 처남이 모르게 공장 설립을 진행해 1997년 6월 1일 한도기 계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내 11월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모든 사업이 중단됐다.  

1998년에는 일이 전혀 없었다. 전에 일했던 대금을 모두 어음으로 받았는데 전부 부도났다. 임가공으로 받은 어음 1억도 부도였다. 10월에는 한도기계도 부도 직전이 었다. 직원들 급여 석 달치를 주지 못했다. 경기는 최악이었고 방법이 없었다. 직원들 앞에서 회사를 청산하고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회생안을 내주었다. ‘한 달치 월급은 아예 없는 것으로 하고, 또 한 달치 월급은 정상화되면 지급해 달 라. 나머지 한 달 월급만 달라.’ 직원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한 달치 월급을 어떻게 융 통해서 지급하고 회사의 숨통은 살렸다. 


직원들이 내민 ‘회사 회생안’…거리에 나앉기는 모면

1999년쯤 되니까 일거리가 조금씩 생겼다. 그런데 그 전 해에 정권이 바뀌면서 한 국중공업이 두산중공업으로 넘어가게 됐다. 반대 시위가 격렬했다. 노조는 초강성이 었다. 회사를 봉쇄하고 차량 출입을 막혔다. 회사에서 나오는 차는 더욱 철저히 막았 다. 가공할 소재를 실어나올 수 없는 임가공 협력사들은 손발이 묶였다. 배달호 노동 자 분신으로 상황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아파트 2채가 경매에서 헐값으로 날아갔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살집 은 지켜야 했다. 논공 아파트를 경매 1주일 안에 1,500만원을 급히 융통해 경매 취소 시키고 되찾았다. 경매 취소 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몇년 동안 생활비 는 한푼도 주지 못했다. 처가에서 쌀과 야채 등을 갖다 줬다. 생활비는 집사람이 은행 에 근무할 때 사놓은 주식을 팔아 충당했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5년 뒤인 2002년부 터 흑자가 났다. 이후로 10만원씩, 20만원씩 생활비를 늘려갈 수 있었다. 그동안의 갖 은 어려움에도 버티고 참아 준 아내와 자녀들이 그는 고마울 뿐이다. 

 

  7.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  

롤러 제작은 임가공업이어서 주문자가 일을 주지 않으면 손 놓고 있어야 하고 일을 주면 무조건 해야 한다. 이 분야는 특히 롤러 하나의 무게가 10t에 이를 만큼 장대·둔 중 부품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부품들이 워낙 크고 무거워서 CNC(컴퓨터에 의한 공 작기계 수치 제어)나 자동화가 불가능해서 이를 모두 수작업으로 다룰 수 있는 기능 공 양성이 무척 어렵다. 이렇다 보니 기능공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제품 소 재 하나 값만도 몇 천만원이다. 불량 나면 물어줘야 한다. 한 달에 불량이 하나만 나와 도 한 달 일한 게 헛수고가 된다. 위험 부담이 매우 크다.


반값 지른 승부사 기질

한국중공업의 롤러 최대 생산 능력은 1,500개. 포스코 등 국내 최대 소비량은 1,000 개 미만이어서 500개 이상은 수출해야 한다. 풀가동해서 1,500개를 생산할 경우 연 간 임가공 협력업체에 지급되는 임가공비 예정가는 12억원 정도. 등록된 협력업체는 한도기계가 새로 들어가 8개 업체. 연간 12억원을 똑같이 나눌 경우 업체당 연 1억 5,000만원, 월 1,250만원이다. 한국중공업은 업체간 다자 경쟁 구도가 형성되자 경쟁 입찰을 도입했다. 최저가 입찰 1위 업체에 전체 물량의 70%을 주고, 2위 업체에 30%를 주며, 나머지 업체는 탈락시킨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의 노련한 승부사 기질이 발휘됐다. 그는 전체 임가공비 예정가 연 12억원 에 대해 입찰 가격 6억원을 써넣었다. 반값을 지른 것이다. 다른 업체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반값 덤핑으로 다른 업체들까지 다 죽인다는 것이었다. 6개 업체 는 아예 수주를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 하지만 그의 계산법은 분명했다. 연 6억원이 최저가 1위로 낙찰된다면 70%인 4억 2,000만원의 어치 물량을 받는다. 지금까지 가 장 좋은 조건이다. 그럼에도 한국중공업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반 값으로 내려가면 품질은 유지될 수 있는지, 그 물량을 단일 업체가 감당할 수 있는지 등 담당자들도 크게 우려했다.


보란 듯 품질·물량·납기 다 충족 납품

최저가 1위로 낙찰 받은 한도기계는 그간에 쌓은 노하우와 기술력으로 품질과 물량, 납기 등을 모두 충족시켜 납품하자 분위기는 일변했다. 최저가 1, 2위의 2개 협력사만 관리하게 된 한국중공업 담당자는 업무를 크게 단순화했고 12억에서 6억으로 비용을 절감한 공로로 표창까지 받았다. 위기의 순간에는 생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냉혹 한 비즈니스의 세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경쟁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두산중공업으로 넘어간 뒤에도 여진은 계속됐고 시위는 이어졌다. 계속되는 시위로 철강 업체들이 롤러를 공급을 받지 못하면서 철강 생산 차질까지 빚어질 지경이었다. 포스코는 시위가 심하지 않을 때는 필요 물량 롤러 1,000개 중 한국중공업에서 700 개를 구입하고 300개는 일본에서 수입해서 써왔다. 시위가 심해져서 물량 공급이 중 단될 상황이 되면 일본 업체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일본 업체들도 알게 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 시위로 문제가 생기면 우리에게 물량을 많이 주 고, 문제 없으면 국내에서 다 하거나 우리에게 조금만 주나. 우리와 50% 물량 구입 계 약을 해 주지 않으면 일절 거래하지 않겠겠다’고 나왔다.


‘IMF 외환 위기도 견뎠지만…’

결국 일본 업체들에게 50% 구매 계약을 해줬다. 국내 업체들로선 70%를 공급하 다가 20% 물량을 뺏긴 것이다. 여기에 리만 브러다스 사태로 수출이 중단됐다. 연간 1,500개의 생산 능력으로 1,000개도 못 만든다. 전체 물량은 줄고 거래처는 늘었다. 결국 그의 공장도 4,000개에서 2,000개로 절반이 줄었다. 이 정도로는 인건비 등 제 하면 남는 게 없다. 더구나 공장을 창원으로 옮겼는데 대구에 비해 인건비가 세서 이 들 수준에 맞춰 올려주다 보니 인건비는 크게 올랐고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어 그가 직접 기계 한 대 돌리면 밥은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다. IMF 외환 위기 도 견뎠지만 결국 4~5년 전 정리했다. 

 

  8. 누룽지 전문 기업, 업계를 선도하다  

2006년 한도식품이 문을 열었다. 영천에 새로 지은 공장을 경매 낙찰 받았다. 새 건 물, 새 기계였다. 그는 이 공장의 물리적 가치만이 아니라 사업적 가치를 높게 보았다. 누룽지 전문 식품 기업의 가능성 때문이다. 아쉽게 정리한 한도기계를 만회할 재도전 이었다. 한도식품은 누룽지 업계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도식품이 처음부터 흑자를 낸 것은 아니다. 흑자 전환에는 5년 정도가 걸렸다. 무 슨 일이든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없었다. 계산 상으로는 남는데 늘 돈은 쪼달렸다. 외상이 쌓이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외상이 누적돼 수억 원 정도 된다. 예상 수익이 외 상으로 깔린 셈이다. 

한도식품은 자동화·기계화에 많은 투자를 했다. 쌀 공급, 쌀 세척 등 상당 부분을 자동화했다. 맛있고도 저렴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맛을 유지 하기 위해 둥굴레, 옥수수 가루도 일부 넣고 천연 재료 첨가제를 넣는다. 7~8년 전 HACCP(위해 요소 중점 관리 기준) 인증을 받았다. HACCP 인증은 누룽지 업계 의무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도 선도적으로 맨 먼저 인증받았다. 지금은 다른 업계에서도 받 는다. ISO, 할랄 인증 등 수출에 필요한 인증은 다 받았다. 벤처 기업 등록도 했다. 누 룽지 자체와 누룽지 기계에 관한 특허도 갖고 있다.


누룽지 맛의 비결 ‘노르스름 굽기’

누룽지 맛을 유지하는 비결은 조리 구간 별 온도(불의 세기) 설정과 유지, 진행 속도, 지속 시간 관리 등이다. 간단히 말하면 얼마나 노릇노릇하게 잘 굽느냐다. 노릇노릇해 야 고소하다. 많이 태우면 탄내와 쓴맛이 나고 밥처럼 허여면 고소한 맛이 덜하다. 자동화는 이러한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고 취합해 구조화하는 것이다. 

한도식품은 매일 5t의 쌀을 누룽지로 만든다. 누룽지 조리 과정은 크게 두 코스로 나 뉜다. 먼저 ▲밥을 지어 누룽지를 만드는 코스. 세척 – 통에 담김 – 불림 – 기계에 공 급 – 가열 - 밥을 지음 - 살짝 눋게 함(아래 위를 함께 가열해서 양쪽 다 노르스름 눋 게 함) - 일부 건조 – 포장 - 출하 단계다. 다음은 ▲쌀을 불려 바로 누룽지를 만드는 코스. 쌀 세척 - 길게 불림 - 기계에 공급 - 둥근 판 위에 쌀을 펼침 - 뚜껑 덮임 – 가 열 - 뜸 들임(불을 낮춤) - 눋게 함(불을 높임) - 식힘 – 포장 - 출하 단계다. 밥을 해 서 누룽지로 만들면 아래 위를 다 눋게 하기 때문에 좀 더 연하다. 부숴먹기 좋다. 쌀 로 바로 누룽지를 만들면 아래쪽만 눋게 하고 윗부분은 밥 상태에서 건조시켜서 좀 더 여물다. 숭늉으로 끓여 먹기 좋다.


누룽지 ‘한국인의 미각에 간직된 맛’

누룽지 조리의 기본은 끓여 먹는 것이다. 땅콩을 갈아 넣는 경우도 있다. 참기름을 넣기도 하고 야채를 넣기도 한다. 순수하게 누룽지만 먹는 경우도 많다. 백숙에도 많 이 들어간다. 탕수육에도 누룽지가 들어간다. 가장 대중적인 것은 누룽지탕이다. 누 룽지도 라면처럼 취향에 따라 꼬들꼬들하게 먹기도 하고 푹 퍼지게 해서 먹기도 한 다.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누룽지를 물에 담가 놓고 세수한 다음 끓이면 불리는 시 간이 맞다. 약간 꼬들꼬들한 맛이다. 현미, 보리, 잡곡 등 소포장도 있고 덕용(벌크) 포장도 있다.  

누룽지 업계도 코로나19 확산으로 매출이 감소했다. 식당 등에서 판매하는 누룽지 탕 등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최근 쌀 작황의 변동이 극심해 쌀값이 급등락하는 경우도 많다. 누룽지 업계에 공급되던 정부의 가격 조절용 비축미 물량도 크게 줄었 다. 이래저래 쌀값이 많이 올랐지만 누룽지 가격을 같이 올리지 못하고 있다. 쌀 수급 도 불안하다. 그럼에도 간편식, 건강식, 대용식, 별식으로 누룽지에 대한 선호도는 높 다. ‘밥보다 고소한 밥’, ‘밥보다 그리운 밥’ 누룽지는 한국인의 미뢰, 미각 DNA에 깊 이 간직된 맛이다.  

 

  9. 태풍의 발원지는 ‘나비의 날갯짓’  

산지가 많은 그의 고향 마을이 배 명산지로 널리 알려진 것은 한 사람의 헌신과 열 정 덕분이다. 김용해 전 외서면농협조합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농촌 계몽 운동의 선 각자였다. 선대부터 학덕을 갖춘 학자 집안 출신인 그는 1970년대 서울에서 명문 대 학을 졸업하고 ROTC 임관 후 은행에서 근무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농촌 계몽 운동을 평생 해나갔다. 농촌 계몽과 농민 운동의 선각자였다. 그는 집 주변과 논밭에 다양한 특수작물을 재배했고  복숭아나무와 사과나무 등 유실수를 품종을 바꿔가며 계속 심 었다. 저녁에는 국졸이 대부분인 주민들 위해 교회를 빌려 야학을 열었다. 김석호 회 장의 셋째 형을 비롯 동네 선배들과 이웃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 젊은 사람들과 4H운동도 시작했다. 당장의 이해 타산을 넘어 멀리 보 고 마을을 계몽시킨 선각자였다. 

지금 관동리와 연봉리가 연봉배 산지로 유명한 것도 그가 다양한 유실수 재배를 통 해 배가 지역에서 재배하기에 최적이라는 것을 찾아냈기에 가능했다. 이런 선각자적 인 헌신을 인정받아 그는 26년 동안 외서면농협조합장을 연임했는데, 재임 기간 연봉 배를 지역의 대표 농산품으로 업그레이드시켰고 면 단위 농협으로는 전국 최초로 배 를 미국에 수출했다. 지금도 연봉배는 미국 수출 물량이 많다. 이 마을에는 해마다 미 국 바이어가 방문한다. 2020년에는 미국 내 한인 경영 마트로는 최대 규모인 H마트 에 연봉배를 전량 납품했다. 먼저 눈뜬 한 사람의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나비의 날갯 짓이 된다. 태풍의 발원지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다. 


꾸밈없이 소박한 꿈이 일굴 세상

김석호 회장은 매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초등 육성회비조차 낼 수 없는 어려 운 환경에서도 의지와 열정을 잃지 않고 기술을 배우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마쳤 다. 어려서부터 체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제철 용 롤러 생산 공장을 경영하다 IMF를 맞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재도전해 누룽지 전문 식품 기업을 설립했다. 그의 기업 은 업계의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말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삶 역시 그대 로다. 한 선각자가 그의 고향 마을을 명산지 배밭으로 바꿨듯이 그는 조용히 한 집안 을 일으켰다. 그가 바닥에서부터 구운 누룽지 같은 소박한 꿈이 좀 더 큰 세상을 ‘배 밭’으로 일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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