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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수업 확대로 대학가 방구하기 전쟁... 그 1,000년의 역사

발행인 칼럼

  • 입력 2022.04.11 09:00
  • 수정 2022.04.12 10:26
  • 기자명 유명상 대구한국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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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대면수업을 확대하면서 방값을 걱정하는 청년들이 늘었다. 봄은 아직 느긋한데 대학생들이 봄 준비로 더 바쁜 모 양새다. 선진국에서 코로나19 방역을 해제하거나 느슨하게 푸는 상황에서 대면 교육 확대는 적절한 조치겠지만, 방값에 걱 정하는 청년들의 사정 역시 외면하지 말아야 할 사회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 구하기 전쟁은 대학이 생겨난 이래로 늘 있어왔던 ‘전쟁’이다. 대학의 역사, 그중에서도 서양 대학의 역사를 보면 확연 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서구에서 대학은 11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탄생했다. 그때 대학이 성립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 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대학이 설립되려면 우선 가르칠 게 있어야 한다. 1100년 이전에는 대학에서 가르칠 만큼 지식이 풍부하지 못했다. 1100 년 이후에 ‘대학 교재’가 나왔다. 암흑기를 겪으면서 잃어버렸던 지식들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스페인의 아랍계 학자들 의 손을 거쳐 유럽으로 되돌아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같은 이들의 책들을 비롯해 그리스의 의학, 새로운 산술, 로 마의 법전들이 재등장했다.

◇ 주민들의 횡포로부터 대학생들을 지켜라!

대학이라는 단어의 유래도 재밌다. 영어로 university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그냥 집단이었다. 노동자 집단 일 수도 상인 집단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 집단이 이 단어를 독점했다고 봐야 한다. 가장 강력한 집단이 바로 대학생 들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대학생들도 길드를 형성했다. 단체를 만든 이유는 지금과 상통한다. 대면 수업으로 방세가 많이 대폭 오른 상황에서 학생 들은 누가 나서서 건물주들과 교섭을 좀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최초의 대학생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건물주 들에게 “방세를 안 깎아주면 단체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겠다”는 경고까지 날렸다. 당시는 대학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실 제로 그렇게 실행에 옮긴 사례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학생들은 먼저 도시 주민들의 횡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단 체를 결성했다.

◇ “교수님, 수강생 미달입니다. 벌금 내세요!”

초기 대학생들이 단체로 맞섰던 또 다른 세력은 ‘교수’들이었다. 지금과 분위기가 다르다. 그때는 교수에게 수업료를 주는 만큼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교수들에게 행동 강령을 적어서 전달하기도 했다. 1,000년 전, 1세대 대학생들은 교수들에 게 이런 요구를 했다.

첫째, 교수는 단 하루도 결석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도시 밖으로 나갈 때는 다시 돌아온다는 서약서를 써야 한다. (수업료 다 받아놓고 도망갈 수도 있다는 의심이 깔려 있죠.) 서약서뿐 아니고 예치금도 내야 했습니다.

교수가 벌금을 내야 할 때도 있었다. 수강 신청 인원이 다섯 명 이하일 경우였다. 학생 대표는 “수업이 얼마나 부실했으면 수강생이 없냐”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종소리가 나면 수업을 시작해서 종이 울린 후 1분 내로 수업을 끝내야 했습니다. 강제 규정이었습니다.

또한 교재에서 가르치지 않고 넘어가거나 어려운 내용을 뒤로 미루면 안 된다는 조항도 있었다. 여기에 매년 학기마다 정 해진 분량을 계획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이 규정을 보다 강력하게 압박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출신 지역별로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집단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를 뽑았는데, 그 명칭이 ‘총장’이었다. - 교수들의 대표가 아니라 학 생 대표가 총장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대학의 주체는 명백하게 학생이었다.

◇ 칼리지의 원래 의미는 ‘기숙사’

칼리지(college)의 원래 의미도 흥미롭다. 현재 칼리지는 단과대학을 지칭한다. 미국에서는 종합대학과 구별해 4년제 단 과대학을 부르는 명칭이다. 칼리지의 원래 의미는 기숙사였다. “초기 칼리지 설립자들의 목적은 오갈 데 없는 가난한 학생들 의 거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칼리지는 대학 교육 및 사회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칼리지의 위세가 당당하던 때에는 대학은 그저 시험을 주관하고 학 위를 수여하는 조직에 불과했다는 말도 있었다. 칼리지가 대학 문화와 생활의 핵심이었던 것. 파리의 경우 1180년부터 칼리 지가 세워졌고, 1500년에는 그 숫자가 68개까지 늘어났다. 

대학은 ‘지식’만큼이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의 피 해를 가장 많이 받은 곳 중의 하나가 대학이 아닐까.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어서 청춘들이 ‘진짜 대학’에서 공부할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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