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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부정에 경주읍성 해체 일본은 왜 그토록 신라를 짓밟았을까?

  • 입력 2022.03.25 09:00
  • 수정 2022.03.31 09:09
  • 기자명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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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읍성
경주 읍성

 

일본은 우익의 망언과 한류가 공존하는 나라다. 소위 독도나 위안부와 관련된 태도를 확인할 때마다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국 가수들과 드라마가 흥행 신기록을 세 우는 현상을 보고 있자면 이건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우 찾은 대답은 “대중은 윗 분들의 행태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정도다. 무관심도 관심 이상의 적극적인 의사표명이 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 없는 구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일본은 그럴 수도 있겠단 생 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여러 모로 신기한 나라다.


‘병합’? 사실은 ‘폐멸’시키려 했던 일제

한반도와 관련해 일본 지배층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식민지’ 시기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같은 제국이지만 영국 의 식민지 정책과 일본의 정책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많다. 

1937년 영국령 인도의 바갈푸르(Bhagalpur)에서 태어난 정치심리학자 아시스 난디 는 인도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인도의 풍속과 종교 관행을 따르며 인도인 처럼 살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영국 총독은 인도적인 것들을 무척 존 중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영국군인들은 때로 인도의 신과 여신을 경배했고, 법정의 판 결은 인도 법률에 의거했다. 교육체제도 당연히 인도 방식을 따랐다. 

‘폐멸(廢滅).’

1910년 8월29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병합이라는 단어는 대외 용 용어일 뿐, 실제 이들이 그 전에 썼던 단어는 폐멸이었다.(요시노 마코토, 한철호 역,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2005) 

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조선뿐 아니라 조선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도 왜곡했다. 특히 신라 시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역사는 철저한 폐멸 대상이었다.  5세기 이전의 신라 역사를 부정했다. 소부락에 불과했던 집단의 허황된 신화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 이 신라를 왜소한 나라로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였다. 신라가 5세기 이전 이미 강성한 나라였다면 논리적으로 그 시기에 일본의 권력 자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화를 성립하기 힘들다. 그들은 임나일본부 하나를 건지기 위해 신라사의 5분의 2를 잘라낸 것이었다.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경주 읍성 남문을 헐어버린 이유

학자들이 역사를 난도질하는 사이, 권력자들은 다양한 역사적 유물을 함부로 가져 가거나 파괴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역시 유물이 많았다. 고려 시대, 특히 몽골의 침입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화폐화되거나 사라졌지만 옛 도읍의 분위기를 지 니고 있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조선 초만 하더라도 경주에 경상도 감영이 있었다. 세 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5세기 중반 경주부의 인구는 5,894명이었고 성안에는 80 개의 우물이 있었고, 1789년 자료에 따르면 경주부 인구는 7만 1,956명이었다. 인구 로만 따지면 경상도에서 1위였고, 전국으로 확대하면 서울, 평양, 의주, 충주, 전주에 이어 여섯 번째였다.

1912년, 경주에 권력자 하나가 방문했다. 그는 차를 타고 경주읍성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남문이 너무 좁았다. 이 권력자는 성문 때문 에 차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성문을 헐 것을 명 령했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읍성은 고려 시대에 건축되었고, 조선초에 개축했으나 임진왜 란 때 불타고 허물어졌다. 이후 인조10년(1632)에 중수하고 성문을 다시 세웠다. 기 록에 남은 성곽의 높이는 5~6미터, 둘레는 2.3km 규모였다.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 치 마사다케(1852-1919)가 남문을 헐어내고 차에 탄 채 안으로 들어간 이후 읍성은 조금씩 해체되었다. 1916년 경주 시가지 지도를 보면 읍성 안팎의 도로들이 확장되었 고, 특히 남문 동쪽의 성벽을 허문 자리에 경주와 대구를 잇는 신작로와 바로 연결되 는 넓은 도로가 새로 닦여 있다. 1932년에 이르자 동쪽의 일부 구간만 살아남고 나머 지 성벽은 모두 사라졌다. 

대구읍성이 무너진 것은 1907년이었다. 대구는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 이주민들이 성안 상관을 무너뜨리려고 성벽을 헐었다고 하지만, 경주 읍성의 남문 해체 과정은 너 무도 치욕적이다. 폐멸을 작정한 이들의 행보다웠다.


식민지 일본인 소녀가 바라본 일본

그 시절에도 한국 혹은 한국의 정서에 우호적인 이들이 있었다. 모리사키 가즈에 라는 일본인의 회상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확인된다. 그는 192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을 모두 조선에서 보낸 까닭에 그의 인격에는 조선 의 자연과 문화가 스며들었다. 그에게 식민지 조선은 고향이었고, 그 고향을 누구보 다 그리워했다. 

1984년 그는 조선에서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책을 펴냈다. 2021년 ‘경주는 어머 니가 부르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우선 제목에 눈길이 간다. 대구에서 

태어나 경주와 김천 등지에서 유소녀 시절을 보냈지만, 책의 제목에는 경주를 담았 다. 그만큼 경주가 인상 깊었다는 뜻일 것이다. 일제가 가장 절멸시키고 싶어했던 역 사인 신라의 숨결이 그대로 담긴 그곳이 가장 조선적인 공간으로 기억되었다는 뜻인 지도 모르겠다.

1984년에 나온 책이지만 전혀 낡은 느낌이 없다. 2021년에 쓰여졌다고 해도 될 만 큼 싱싱한 느낌을 준다. 일본과 일본 문화를 평가하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1984년 과 거의 한국을 바라보며 2020년대 BTS와 ‘오징어 게임’의 미래를 내다보는 듯하다. 마 치 예언서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일본인으로 태어났고, 일본어를 쓰며 살았지만 그에게 일본은 먼 나라였다. 일본 특 유의 집단적인 분위기는 조선까지 장악하지는 못했다. 본토에서는 설탕과 성냥이 제 한적으로 판매되었고, 학교에서 군대 조직처럼 행진하기도 했으나 절박한 느낌은 없 었다. ‘죽창’ 운운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소녀들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본토를 여행했던 한 상급생이 기차 안에서 일본 중년 신사에게 “조선인도 일본인 이야”하는 말을 들었다. 상급생이 대구에 있는 학교로 돌아와 들려준 이 이야기는 소 녀들 사이에 개그 프로의 유행어처럼 회자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이 비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들에겐 일본 문화도 꺼림칙했다. 학생들은 본토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합의(?) 를 도출하기도 했다. 고부간의 갈등도 심하고 “굉장히 봉건적인 곳”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모두 부모들에게 들은 정보가 바탕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본토에서 전 학온 상급생의 경험담이었다. 그 상급생은 일본에서 지내던 시절 다섯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사서 허드렛일을 시키며 키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가난한 사람이 여자 아이를 파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몹쓸 곳이네.”

이들의 결론이었다. 한 소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지(일본)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학교에서도 젊은 국어 선생님이 전쟁터로 끌려가자 마음이 아프다고 썼다. 지금도 일본 우익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군국주의 일본’의 로망은 이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들은 조선의 풍습과 문화에 물든 ‘무늬만 일본인인 소녀들’이었다. 한 국 아이돌과 드라마에 푹 빠진 일본인들을 바라보는 우익의 시각이 바로 그렇지 않을 까. 한류의 시작점은 90년대 ‘겨울연가’가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가장 뜨겁게 경험한 일제강점기였을 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인들은 일본에 그닥 매료되지 않았다. 1947년 한국으로 와서 의료 선교사 로 활동했던 폴 크레인(1919-2005)은 일본이 한국인들을 일본문화에 동화시키는데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일본의 관료조직 체제를 활용하면서도 조직의 운영방식은 일 본과 다르고, 일본 음식도 그다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무릎을 꿇는 일본식보다 마 루에 편하게 앉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45년 조선 통치 기간 중) 15년 동안 한국인들을 일본화시키려고 했지 만 한국인들은 그냥 한국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적합한 외 형적인 것들만 일본에서 받아들였고, 일본식으로 보이는 관습과 태도는 거부하였다.’ 해방 후 쏟아져 들어온 미국 문화에 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 한국인들이었다. 폴 크레인은 이런 한국인의 모습이 히브리인을 닮았다고 감탄했다. 일본 혈통을 가지 고 일본어를 쓰는 ‘소녀들’마저 일본이 어색해서 일본으로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 하는 마당에 정통 한국인들에겐 일본풍이 얼마나 시시하게 느껴졌을까. 


신라는 아직도 건재하다

2018년 경주읍성의 동문인 향일문이 복원됐다. 2009년 복원 계획을 세우고 2014 년 작업을 시작했다. 복원 계획은 2030년까지 예정되어 있다. 복원이 예상되는 성벽 의 길이는 1100m에 이른다. 폐멸의 위협을 견디고 우리 앞에 다시 다가온 신라를 상 징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신라는 아직도 왜(倭)의 침노를 받고 있다. 아직도 임나일본부를 정사로 착각하는 우익이 존재하고, 신라의 장군(이사부)가 병합한 독도는 그들이 가장 탐내는 ‘우리 땅’이다. 문무왕이 용이 되어 지키길 소망했던 ‘동해’는 ‘일본해’와 문패 전쟁 중이다. 그 와중에도 한류는 거세다. 지금도 일본의 인기 드라마 순위에는 한국 드라마가 두 각을 드러내고, 한국의 문화를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들이 적지 않다. 식민 지 조선에서 태어나 한국 문화를 깊이 체험했던 일본 소녀들의 태도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랑의 땅 신라는 아직도 건재하다. 무엇보다, 다시 태어난 경주 읍성이 BTS와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의 시대에 어떤 이야기를 품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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