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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도 “행복하다” 했던 아내에게 바치는 사부곡(思婦曲)

  • 입력 2022.03.11 09:30
  • 수정 2022.03.16 09:34
  • 기자명 김광원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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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에 아내를 떠나보낸 임욱강 전 고령군청 기획감사실장. 그가 쓴 제문은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김민규 기자
2018년 2월에 아내를 떠나보낸 임욱강 전 고령군청 기획감사실장. 그가 쓴 제문은 뭇 남성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김민규 기자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와 가슴은 겨우 한뼘 거리지만, 때로 화성과 금성처럼 거리가 멀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가슴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데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죽은 아내를 위해 쓴 제문에도 간혹 그런 구절이 발견된다. 제문이라면 그저 형식적인 글로 생각하기 쉽 지만, 남편들이 쓴 제문은 연서와 전기를 합쳐놓은 느낌이다. 시집온 후 죽음에 이르 기까지 다사다난한 삶의 기록과 함께 죽은 이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남 편의 비애는 으레 논리와 이치를 덮었다. 이를테면,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아버 지인 민유중(1630-1687)은 아내가 죽자 ‘장수하건 요절하건 간에 누구나 죽는단 것 은 고금의 통상적인 이치이니, 달관한 자가 본다면 뭐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오’라고 썼다가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을 여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 다오’라며 비통해했다. 성리학이라는 고매한 철학으로도 억누르기 어려운, 혹은 인간 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뜻일 것이다.

 

18개월 동안 하루 한 시간씩 전신 마시지해주며 간호

제문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호국보훈의 고장 고령에서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 다가 몇해 전 은퇴한 임욱강(62)씨는 최근 아내의 영전에 제문을 지어 올렸다. 3년째 기일에 올린 제문에는 아내의 마지막 나날들의 행적과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 게 담겼다. 옛 선비의 제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문을 썼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사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고령 지역에서는 ‘남자의 눈물’을 자극 하는 명문으로 통하고 있다. 

제문에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대목은 병원에서 지낸 18개월의 기간이다. 2014 년 6월에 위암으로 큰 수술을 한 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2년 후인 2016년에 대장암 이 재발했다. 그로부터 18개월 후인 2018년 2월25일에 영면했다. 병상에서 그의 아내 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세상에서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임씨의 지극한 간호가 한몫했다. 서울에서 암이 재발했다는 선고를 받은 후 대구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임씨는 1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으로 향했 다. 일과가 정해져 있었다. 6시에 퇴근해 대구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면 1시간 남짓 전신 마사지를 했다. 마사지를 하면 면역력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하루도 빠 트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엄지손가락 연골이 닳아서 지금은 골프채도 제대로 잡지 못 한다. 요령 없이 엄지에 힘을 줘서 꾹꾹 눌러댄 영향이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꼭 챙겼다. 고구마말랭이를 집에서 삶고 말려서 언제든 먹 을 수 있게 병상 옆에 뒀다. 또한 비단풀, 쇠비름, 냉이 등 직접 채취한 야생초와 약재 상에서 구한 약재를 넣어 달인 물도 이틀에 한번 꼴로 들고 갔다. 같은 병실을 쓰는 사 람들이 “저런 신랑이 어딨나”면서 부러워했다. 하나같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었 지만, 임씨만 나타나면 세상 다 잊고 부부의 로맨스에 취했다. 

“병상에서 늘 그랬어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또 ‘나 죽는 건 괜찮은데, 당신하고 아들이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하고 말입니다. 슬픈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때의 행 복해하는 표정과 말을 떠올리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바보 같은 당신이 너무 고맙구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1582-1650)은 제문에서 아내를 ‘집안의 좋은 친구로 여 겼다’고 썼다.

‘내가 잘못을 할 때면 자네가 충고해주었고, 일만 생기는 나는 자네와 의논했으니, ‘ 지기’라 하는 친구들도 자네보다 낫지 않았네.’ 

임씨의 제문에 담긴 고백도 크게 다르지 않다. ’32년 세월 동안 당신에게 잘했다고 생각되는 기억은 하나도 없고 모두 못해준, 잘못한 기억만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다‘ 고 적었다. 임씨는 “아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행복하다고 고백했다면, 나는 살아오 는 내내 아내 덕분에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1986년 선을 본 지 보름 만에 결혼했다. 임씨는 “첫인상이 너무 좋아 결 혼을 결심했는데, 살아보니 첫인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제가 애를 많이 먹였습니다. 나쁜 남편이었죠. 친구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어려 운 친구를 보면 그냥 넘어가질 못했죠. ‘부모 팔아 친구 사는 팔불출’이 바로 저였습 니다.” 

친구들 일에 집안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90년대 중반 무렵 친구가 무면허 운전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를 냈다. 친구를 대신해 합의를 해주고, 주머니를 털어 합의금까지 보탰다. 10년 넘게 붓고 있던 행정공제회 예탁을 해지하고 그 돈으로 합의금을 마련 했다. 아내에겐 비밀로 했지만 얼마 안 가 들키고 말았다. 행정공제회에서 집으로 해 약 공문을 보냈는데, 이를 아내가 먼저 본 것이었다. 저녁에 돌아와 있는 있는 그대로 고백하자 아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려운 사람이네요. 잘했어요.”

임씨에게 찾아온 가장 큰 난관은 IMF 외환위기였다. 이번에도 친구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 보증을 서 준 것이 화근이 되어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빚을 떠안았다. 어렵 사리 아내에게 이실직고했다. 가만히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아내는 또 차분한 목 소리로 말했다.

“갚을 방법을 연구해 봅시다.”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 때문에 결국 탄로가 났다. 빚을 청산한 후 어머니가 읍사무소를 찾아가서 직원에게 말했다.

“앞으로 임욱강이가 인감 떼러 오거든 무조건 나한테 허락부터 받으소.”

아내는 일자리를 구했다. 암을 얻기 전까지 20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면서 살림을 꾸 렸다. 암이 발병했을 때도 가장 쾌유를 기원한 이들이 바로 직장 동료들이었다. 그만 큼 신망이 두터웠다. 남편의 씀씀이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주변에 인색하지 않 았다. 어려움을 겪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건네곤 했다. 임씨는 “천성이 그랬기 때문에 나를 지지하고 또 보살펴줄 수 있었던 것”이라면서 “ 나와 정반대로 알뜰하기만 했다면 천생연분은 못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를 가장 잘 알고, 또 이해해준 사람이었습니다. 병상에서도 ‘내가 떠난 뒤에도 평 소에 보여주었던 그 모습, 그 신념 그대로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 마지막 당부가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임씨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고 그 마음이 손에 닿듯 느껴진다면 죽었 지만 죽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나중에 아내를 만나면 잘 살다오셨네요,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훌륭한 삶을 완성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보 봉숙씨! 고맙고 미안하오. 고통스런 병마와 싸우면서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늘 미소띤 얼굴로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던 바보 같은 당신이 너무 고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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