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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훌륭한 토론을 위한 몇 가지 조언

발행인 칼럼

  • 입력 2022.02.01 09:00
  • 수정 2022.02.25 10:13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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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icature_ 강은주
Caricature_ 강은주

 

과거와 비교해 토론 문화가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말하기의 전형은 ‘웅변’이었다. 멋있는 문구로 청중을 사로잡는 리더를 보면 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멋진 웅변가는 선망의 대상 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30대 청년이 보수 정당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가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도 토론의 힘이었다. 이후의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이어가는 것도 토론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 아닐까. 의욕이 넘치는 바람에 다소의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그만 한 인재가 없다는 데는 누구나 공감한다.

역사에도 숱한 토론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왕과 신하들의 토론은 늘 관심의 대상 이었다. 왕들 중에는 세종처럼 토론을 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교활하게 논점을 피해 가거나 토론하는 분위기를 억제하는 왕들도 있었다. 토론이 왜곡되거나 빈약해지는 것은 곧 국가의 쇠락을 의미한다. 

토론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토론이 아닌 ‘유사 토론’이 가장 위험하다. 아무도 반론 을 제기하지 않는 토론은 ‘집단사고’ 혹은 ‘집단극화’로 치닫는다. 판단 착오, 터무니 없는 자신감, 극단적인 결론 등이 아무도 ‘no’라고 말하지 않는 토론의 결과물이다.

 

◇ ‘토론 따로 실천 따로’ 

토론과 관련해 나쁜 유형의 리더를 꼽자면, 우선 토론과 상관없이 결국 자기 생각대 로 하는 리더를 들 수 있다. 선조 임금이 그런 유형이었던 듯하다. 선조는 지적 호기심 이 많아서 쟁쟁한 학자들을 불러서 토론을 많이 했는데, 토론의 결과는 수용하지 않 았다. 김우옹(1540~1603)이라는 선비는 선조에게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인 병폐 가 있다”고 지적했다. 토론이 무의미하다는 것. 선조는 고집도 셌다. 한번 결정을 내 리면 언관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꺾지 않았다. 호기심만 많고 토론에 대한 기본 마인 드 자체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진짜 문제를 외면하는 리더도 있다. 광해군이 그랬다. 과거 시험에서 최종 과정은 전시다. 임금 앞에서 시험을 본다. 전시에서 광해군이 나라의 당면과제에 대한 문제 를 냈다. 인재 등용, 국론분열, 공납제도 등과 관련된 문제였다. 과거 응시자였던 임숙 영은 답지에 이렇게 썼다. 

‘지금 전하께서는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셨 으니, 신은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애오라지 덮어 두기 만 하고 의논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문제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었다. 임숙영이 생각하는 진짜 문제는 후궁들이 사사로운 청탁을 하는 등 국정에 개입하고, 신하들의 말이 임금에게 잘 전 달되지 못하고, 공정성이 훼손되고, 언로가 막힌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시대에 김개 시라는 유명한 궁녀가 있었다. 매관매직을 일삼은 인물이었다. 임숙영의 지적이 온 당해 보인다.

임숙영의 답지를 받아든 임금은 분노했다. 그는 임숙영의 과거 합격을 취소시켰다. 그러나 신하들이 3년 동안 ‘아니되옵니다’하는 상소를 올려서 결국 회복됐다. 진짜 문 제가 뭔지도 모르고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소통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리 더는 요즘도 많다.

 

◇ 세종이 고약한 신하를 용서한 이유

세종 임금 때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때 ‘사고’를 친 사람은 하위지(1412~1456)였 다. 과거 시험에서 세종 임금의 정치를 비판했다. 영의정 황희는 그를 합격시켰다. 그 러자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왕을 모욕했다는 것. 그러자 세종이 진노했다. 

'과거를 실시하여 대책을 묻는 것은 장차 바른말을 숨기지 않는 인재를 구하기 위 해서다. 설령 내가 노여워하며 하위지에게 죄주려고 해도 그대들이 나서서 보호해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하위지를 탄핵하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세종 20년 4월14일

세종 임금 때 이런 일도 있었다. 회의에서 임금과 의견 일치가 안 되는 신하가 있었 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유감입니다. 전하께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시니 어찌 신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신하의 이름이 고약해(1377~1443)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를 벌주지 않았다. 이유가 이렇다. 

“내가 고약해의 무례함을 벌주려고 한다면 사람들이 내 뜻을 오해하여 과인이 신하 가 간언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까 염려가 된다.” 

세종의 토론 태도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황희 (1363~1452). 그는 24년간 정승의 자리를 지켰다. 조선조 최장수 재상이었다. 그런데 황희는 ‘임금의 원수’로 통했다.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쫓아낼 때 극구 반대한 인 물 중의 한 명이었고, 영의정이 된 후에도 세종의 정책에 자주 반기를 들었다. 세종은 늘 ‘반대자’들을 적극 기용했는데, 이것이 그분의 인재 경영 특징 중의 하나였다. - 조 정에 고약해 같은 사람이 수두룩했다고 봐도 될 듯.

 

◇ 가장 적극적 반대자 ‘허조’ “죽어도 여한이 없다”

독보적인 인물은 허조(1369~1439)였다. 세종도 “허조는 고집불통이다.”라고 말했 다. 사람들은 허조를 ‘송골매 재상’이라고 불렀다. 외모가 등이 조금 굽고 마른 체형이 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고와 언변이 송골매처럼 날카롭고 매서워서 젊은 관원들이 그 를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허조는 세종을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좋은 의견이 나오면 바로 실행해 주는’ 군주라고 평가했다. 또한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버린 것도 아 니었다. 허조는 이렇게 말했다. 

“소신이 반대하였지만 끝내 전하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의견을 수용하여 이만큼 고쳐 주셨으니 이제는 시행해도 문제가 없으 실 것입니다.” - 세종실록 15년 10월24일

죽기 전에 남긴 말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말했다. 

“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을 올리면 실천해 주셨고 의견을 말하면 경청해 주시었으 니 내 이제 죽지만 여한이 없다.”

세종의 ‘토론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토론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하는 것보다 는 그 진정성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때가 때인 만큼 다양한 토론들이 진행 되고 있다. 말보다는 그 말 속의 진정성을 살피는 것이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요 령이 아닐까. 요컨대, 토론은 말재주보다 진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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