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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보내는 ‘다른 시간’

  • 입력 2022.02.10 18:50
  • 수정 2022.02.24 09:37
  • 기자명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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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멋진 사람과의 만남을 동경한다. 인생을 오래 산 어른과의 만남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형편’과 ‘현실’로 시어머 니는 빠진 채로, 시어머니의 절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청했 다. 매일매일 만나던 사람을 만나 늘 비슷비슷한 시간을 보 낼 것 같은 노인들에게 ‘다른 사람’과 보내는 ‘다른 시간’을 

선사하고 싶었다.   

자그마치 ‘90년’을 살아온 노인들이다. 서로에게 무려 ‘70년, 80년 지기’ 친구들이 라니, 말 다 했다. 구부정한 허리로 지팡이를 짚으면서도 여전히 시내 한복판에서 약 국을 하는 노인에게는 입이 떡 벌어진다. 58년째라고 하니, 그의 꾸준한 성실함과 단단한 의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알면 알수록 놀라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제 차를 타고 내리는 일도 쉽지가 않다. 혼자 의자에 앉고 서는 일 도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걸음걸이는 얼마나 느릿느릿한지! 그런데도 일주일에 서 너 번씩 약국으로 나간다.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웃으려는 거다. 나는 “웃으려면 둘은 있어야죠”라는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르면서, 깊고 단단하고 줄기찬 그들의 우정 에 또 놀란다.

약국집 딸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발이 되어주는데, 주말에는 그들 모두의 발도 되어준다. 카페와 식당으로 안내하며 하루하루 다를 게 없는 일상 속에 새로운 바람을 넣어준다. 일하면서 쉽지 않을 텐데도, 굳이 안 해도 될 텐데도, 그런 일을 자 청해서 한다. 마음을 내서 하는 일에 마음이 보인다. 이제라도 그와 맺어진 인연에 감 사하고,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젊은 친구가 생겨서 좋다.

나이든 어른들이 젊은 나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오래 살줄 몰랐다”, “ 아무 준비도 없이 늙었다”면서,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잘 살았다고 하니 감사하다” 고도 했다. “늘 예쁘게 차려입으시네요” 하니까, “가진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 고 나온다”고도 했다. 

파스타를 먹는데 포크 대신 젓가락을 부탁하는 노인의 당당함이 좋았다. 테이블 위 에 꽂아놓은 노란색 국화꽃에 감탄하는 노인의 시들지 않은 감성이 좋았다. 진한 에스 프레소 커피를 주문하는 노인의 자기만의 취향이 좋았다.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재밌 다”는 노인의 밝고 긍정적인 기운도 좋았다. 

‘최고의 보석은 어두운 벨벳 위에 놓여서 나오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그들의 인생 이 편하고 즐겁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그들의 말과 표정과 태도가 마 치 그들의 지난 삶 전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친구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감사를 아끼지 않는 노인들이라고 했다. 서로를 배려하며 뭐든지 나누는 노인들이라고 했다. 늙어서도 아름답다는 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멋진 풍경을 바라보거나 좋은 글을 읽 으면 기분이 좋듯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도 좋은 기분이 든다. 

‘태도의 말들’에서 엄지혜는 “책속에서 발견하는 문장도 좋지만, 내가 더 관심을 기 울이는 건 한 사람의 입말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다”라고 했다. 좋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나는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겨놓고 싶었다. 배울 것은 배우고 싶었다. 그들의 친절함과 상냥함 덕분에 나는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 다.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에서는 동등함이 느껴져 안락했다. 마치 계급장을 떼고 이 야기하듯 편하게 말문이 열렸다.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고, 본심이 전해져서 좋았 다. 만남 속에 다정함이 있어서 좋았고,  마음속에 진심이 들어있어서 좋았다. 무엇보 다도 사람이 느껴져서 좋았다. 

핵심은 소통이다.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고, 희망과 바람을 주고받고, 서로의 행복 을 도와주고 응원하는 관계이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시어머니와의 소통이었고, 오래 도록 염원하던 시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시어머니가 함께하지 못해서 못내 안타까웠 지만, 함께할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이대로도 좋았다. 그들에게 선사하 고 싶었던 ‘다른 사람’과 보내는 ‘다른 시간’을 도리어 내가 받은 것 같은 것은 참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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