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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를 말로 꺾은 토론왕 주막 할머니

  • 입력 2022.02.07 09:00
  • 수정 2022.02.23 18:53
  • 기자명 김광원 부편집장, 성시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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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주목받는 부분이 다를 때가 있다. 이를테면,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들보다 더 쫄깃 한 긴장과 재미를 선사하는 조연들 같은 경우다. 김구 철 경기대 교수가 쓴 ‘선비문화를 찾아서’도 그런 측면 이 있다. 제목에선 선비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겠다 고 천명했으나 의외로 간간이 언급되는 여성들의 삶에 더 눈길이 간다. 조선 500년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 지는 선비를 압도한 시골 할머니부터 젊은 나이에 남 편을 잃고 80까지 장수하며 홀로 가문을 일으킨 숙부인까지, ‘한 많은 조선 여성’ 류의 이야기만 듣고 지내온 사람들이 읽으면 의아함과 함께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책 곳곳에 별사탕처럼 박혀있다.

 

조선의 천재를 놀라게 한 할머니의 ‘논리’ 

 1801년 정약용(1762~1836)은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그곳에서 ‘주막집 노파’와 그 유명한 대화를 나누었다. 씨냐 밭이냐의 논쟁. 정약용이 ‘아버지 날 낳고 어머니 날 기 르시니’ 하는 구절을 들어 “아버지 은혜가 중하다”고 하자, 노파는 이렇게 논박했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땅이 받쳐 주지 못하면 씨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이 노파의 정체가 궁금하다. 주막에서 일했던 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 을 즐기던 ‘강진 토론왕’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다산을 만나기 이전에 이런 주제로 몇 차례나 남정네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여인네도 많지 않았을까. 여성들이 교류할 장소와 시간은 풍부하다. 빨래터와 우물가, 혹은 방앗간 에서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들 나름의 결론을 여성을 대표해 서 울에서 내려온 천재 선비에게 검증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산의 뛰어난 점은 이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꽉 막힌 양반이었 다면 그 자리에서 노파에게 면박을 주거나 못 들은 척 전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은 노파의 말이라도 귀담아들었고, 그래서 그런지 ‘열 부론’이라는 글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논박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열 부론’은 기존의 열녀상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소위 열녀로 칭송받 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가져와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그의 이런 저작 활동에는 이름 없는 주막의 노파 가 던진 지적인 충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상상을 보태자면 이 노파는 어쩌면 ‘춘향전’의 골수팬 이었을 지도 모른다. 춘향전은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여인이다. 신분에 얽힌 기존의 여성관에 항거 한 ‘여성 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 여성들과 사뭇 도전적인 사고를 공유하고 있던 이 노파는 양반 사회라는 견고한 철옹성을 직접 들이박지는 못하고, ‘유배지로 온 양반’이라는 연약해진 지반을 만나 뜨거운 목소리 를 분출시킨 게 아닐까. 

 

규방에 갇힌 시어들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주막집 노파는 정약용이라는 조선의 천재에게 인정을 받은 반면 살아서 전혀 주목받지 못한 ‘여성’도 있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의 증손 자인 송요화와 혼인한 안동 김씨(1681~1722)도 그 중의 한 명이다. 호는 호연재(浩 然齋)였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유롭게 시작을 하는 가문에서 성장했다. 심지어 서모(庶母)까 지 자유롭게 시를 쓰고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친정에서 시를 즐기며 살았던 시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게 할 만한 자료가 있다. 바로 그가 남긴 시들이다. 시는 1699년 출 가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가장 큰 특징은 남성적인 시어들이 쓰였다는 점이다. ‘건곤’ ‘초연’ ‘삼척검’ ‘성쇠’ 등이 시어들이 흩뿌려져 있다.

 호연재는 시를 쓰면서 짜릿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았을까. 남성적 시어는 분명 남녀노소가 자유롭게 시로 교유하던 세월의 흔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만 떠올리면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폐쇄적인 노론집 안의 며느리로 살면서 재능을 숨겨야 하는 처지, 활어처럼 펄떡대는 시어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날개가 꺾인 채 안채에 주저앉아야 할 운명이라는 걸 되새길 때마다 얼마나 울컥한 마음이 치밀었을까. 

 호연재는 술을 자주 마셨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특히 담배를 두고 ‘근심스런 창자 를 풀어주는 약’이라고 했다. 마음을 풀고 근심을 달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일까. 호 연재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반면 그의 남편 송요화는 호연재보다 2배 를 살았다. 83세까지 장수했다. 남성 중심의 가풍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성의 목 숨을 갉아먹었던 게 아닐까.

 다행히 호연재의 분신은 후세에 남았다. 증손부 청송 심씨가 그의 시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자신의 시가 결국은 세상에 널리 읽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살아생전에 알았다면 그의 울적한 기분이 조금은 덜해지지 않았을까. 

 

‘여성 가사 노동 줄이기’ 분야의 모범 집안 

 명재 윤증(1629~1714)의 집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며느리의 재 능을 살려서 대시인으로 성장시켰다는 말이 아니다. - 책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다만, 육아와 가사 분담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데 꼭 필요한 일이라면 명재 윤증가는 모범 집안으로 손꼽힐 만하다.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 많은 유밀과 기름 든 전도 올리지 말라.’

 윤증의 유언이다. 지금도 명절이면 ‘며느리 증후 군’이 있다지만 과거 양반 명문가의 제사는 차원이 달랐다.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의 수준과 빈도가 훨씬 높고 많았 다. 윤증은 횟수와 규모를 모두 줄 였다. 제사를 묶어 지내게 하는가 하면 음식 가짓수도 줄이게 했다. 탕, 갱, 송편, 전을 뺐다. 평소 밥상 보다 조금 더 풍성한 정도의 제상 을 완성시켰다. 

 그 과정에서 가장 덕을 본 것은 집안의  며느리들이었을  것이다. 시아버지의 배려 덕분에 징벌 같 은 노동에서 풀려났을 며느리들은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을까. 요즘 으로 치면 가사와 육아를 기꺼이 분담하는 분위기를 가진 집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집안에서의 노동 분담이 원활한 사 회활동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윤증의 조치들은 상당히 선구적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윤증이 여성을 배려했다기보다 제사에만 유독 특별한 철학을 가졌 던 게 아닐까. 접빈객 부분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봉제사 접빈객’이라고 사랑방 손님 을 대접하는 일은 제사를 모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였다. 윤증의 고택에는 이와 관련해 조금 특별한 요소가 있다. 윤증 가는 안채를 가려주는 내외벽 아래 한 자(尺) 남짓한 틈이 나 있 다. 그 틈으로 사랑 손님의 신발을 볼 수 있다. 사랑채 뒷간으로 가는 손님을 파악하는 것도 가 능하다. 그 시절 여성들에게는 사랑방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그 정보에 따라 식사와 간식 따위를 준비하지 않았을까. 이 외에도 안채 기단이 낮았다. 기단을 오르내리 는 여인네들을 배려한 설계였을 것이다.

 

여걸 숙부인,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비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우뚝한 삶의 흔적을 남긴 이는 숙부인이다. 숙부인은 북인의 영 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1539~1609)의 손자며느리였다. 출발은 순탄했다. 숙부인의 남 편 이구는 스무살에 대과에 합격한 준재였으나 스물넷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숙 부인의 고난이 시작됐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후 예산 갈막마을에 터를 잡았다. 시조부의 묘 소가 가까운 곳이었다. 이후 교육에 매진했다. 남편이 남기고 간 4살짜리 아들을 잘 가르쳐 진 사로 만들었다.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진짜 고생은 지금부터였다. 아들은 영민한 머리와 함께 단명의 운명까지 빼닮았다. 아버지보다 겨우 여덟 해 남짓 더 산 후 어머니 곁을 떠나버렸다. 5 살짜리 손자 운근이 유일한 혈육이었다. 수당 이남규(1855~1907)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늙은이와 어린이가 떠돌아다니는 형편’이라고 묘사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당시는 시댁이 주 도하던 북인의 시대가 저문 뒤였고, 집안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떠나버린 상 황, 집안에 남은 자산이라고는 숙부인의 강렬한 의지와 긴 수명뿐이었다. 숙부인은 5살짜리 손 자를 현감으로 키웠고, 여든 살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집안 살림을 주관했다. 

 숙부인의 삶의 흔적이 가장 또렷하게 남은 곳은 바로 살던 집이다(수당고택). 보통 사랑채가 안채를 뒤에 숨기고 있기 마련이지만 숙부인의 집은 사뭇 달랐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앞으로 나와 있었다. 문간채 축대도 특이한 구석이 있다. 계단을 여섯 개나 밟고 올라가야 할 만큼 높 다. 아마 숙부인은 키가 작았을 것이다. 축대 위에 올라서서 위엄있게 노복들을 호령하면서 큰 살림을 지휘하지 않았을까. 수당은 이 키 작은 여장부의 한평생을 이렇게 평가했다.

 ‘기울어 가는 위태로운 가세를 부지하여 다시 가문을 일으켜서 자손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변함없이 의관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모두 부인의 힘이었다. 이런 일은 대장부 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여자의 몸으로서 해냈으니, 그 공이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 ‘수당집’

 숙부인이 이 시대에 다시 살아온다면 우리 사회 어디쯤 자기 자리를 잡을까. 남편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절망을 굳건히 극복하고 안채를 ‘감히’ 사랑채 앞으로 내밀고 가문을 경영한 배 포와 적극성이라면 대기업을 맡겨도 어렵지 않게 통솔할 수 있을 듯. 

 

이 기사는 대구한국일보 지역청년인재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으며, 취재부터 기 사 쓰기까지 모든 과정에 지역 대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 대구한국일보 지역청년인재육성 프로그램 후원 기업 – ▷ 현우정밀(주)(배영일 대표) ▷브릴리언트(노두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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