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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문화와 나눔의 아트빌리지 되길!”

  • 입력 2022.02.02 09:00
  • 수정 2022.02.23 18:53
  • 기자명 김광원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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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아트빌리지 대표
신홍식 아트빌리지 대표

 차 사고로 아파트 한 채 값이 날아갔다. 직원이 회사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다. 차가 뒤집어졌다. 사장 은 모든 일을 조용히 덮기로 했다. 경찰에 신고를 할 경우 사고를 낸 직원이 구치소에 들어가야 할 상황 이었다. 그는 이전에 특정 사건에 휘말려 기소중지 상태였다. 사장은 직원이자 친구인 그를 위해 사고를 불문에 붙였고, 회사가 2,000만 원에 달하는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80년대 말, A간장 경북 총판에 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산으로 가라.”

 덮는다고 덮일 일이 아니었다. 사장의 부친이 이 사실을 알아버렸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에 돌아와 보니 4.5톤짜리 트럭에 이불 보퉁이 하나가 실려있었다. 가족을 데리고 마산으로 떠나라는 엄명이었다. 

“큰아이가 돌이 지나기 전이었습니다. 아버지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죠. 셋방에 도착해보니 부엌에 방 하나, 그리고 농도 없었어요. 우선 시장으로 가서 급한 대로 연탄집게와 도마, 칼 등 최소한의 살림살 이를 사왔죠. 그렇게 마산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신홍식(67) 아트빌리지 대표는 신혼 시절, 그렇게 느닷없이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마산에서 금성 사에 다니고 있던 자형이 중소기업에 일자리를 알아봐줬다. 월급을 받아서 쌀을 사고 한달 생계를 이어 가기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를 지어도 늘 누구보다 잘 지었던 아버지

 그의 집은 구미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시내 중심가에 230평 적산가옥이었 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경무관이 살던 관사였다. 집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 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해 고전들이 그득했고, 축음기에선 으레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사고를 계기로 극과 극의 삶을 체험하게 된 셈이었다. 

 3년 하고도 여섯 달 동안 셋방살이를 했다. 고생만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보 람도 있었다. 그는 “나 자신을 재발견한 계기였다”고 했다. 보통 2~3년에 한번씩 진급 을 하는데 신 대표는 3년 반 동안 4번이나 진급을 했다. 자형이 신 대표의 아버지에게 “홍식이가 달라졌어요. 이젠 뭘 해도 됩니다” 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 마산 ‘유배’ 덕분에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훌륭한 자질들이 개발된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시간을 돌려 친구가 다시 그런 사고를 치게 된다고 해도 여전히 아파트 한 채 값을 감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휘둘려서 어쩌지 못하는 것과, 내가 중심 을 잡고 베푸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산에서 3년을 보내는 동안 제 마음에 든든 한 기둥이 하나 박혔습니다. 아버지 덕분이죠.”

 아버지에게 쫓겨난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아버지’였다. 신 대표의 조 부는 구미 선산의 이름난 한학자였으나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셋째 아들로 태 어난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성장했다. 금오산에서 나무를 해와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 을 만큼 부지런히 삶을 경영했다. 무엇보다 늘 일찍 일어났다. 나이가 들어 논농사를 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난 뒤에도 포도밭은 직접 일구었는데, 으레 새벽에 일어나 밭 으로 나가서 하루 종일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그 부지런한 성품이 나무꾼에서 사 업가로 일어서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당신이 본격적으로 부를 일군 것은 석(石)공장 을 열고 난 뒤였다. 부지런히 돌을 깎고, 그 위에 글자를 새겼다. 손수 대장간을 만들 어 무뎌진 정을 수시로 담금질해가면서 글자를 새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다재다능하고 손재주가 좋은 데도 부지런하기까지 한 분이었어요. 농 사도 항상 누구보다 잘 지으셨죠. 구미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손꼽히는 분이셨 어요.”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형성된 성정이 마산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왔던 셈이었다. 

 

내실경영으로 IMF도 큰 어려움 없이 극복

 86년, 큰자형이 운영하는 풍국면 공장 안에서 사출공장을 시작했다. 기계 3대가 전 부였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공 장을 경영했다. 대기업에 납품을 하면서 직원이 40명까지 늘었다. 

 신 대표의 경영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IMF 때였다. 당시 성서공단에 부도 폭풍이 몰 아쳤다. 보여주기식으로 공장을 크게 넓혔다가 은행 빚에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 이른 바 차입경영이 부른 화였다. 신 대표는 은행 빚이 없었다. 게다가 대금을 원화가 아니 라 달러로 받았다. 그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IMF를 지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늘 내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돈을 빌리는 걸 싫어하셨죠. 아버지 에게 보고 배운 경영법이 IMF를 건너는 다리가 되어준 셈이죠.”

 그의 실리경영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빛을 발했다. 최근의 일이다. 2019년 대구포 크페스티벌 이사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모르는 분야라서 거절했다.

 주변의 거듭된 권유로 결국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운영비 와 무대비 등에서 거품을 걷어내고 지역 뮤지션들에게 적정한 출연료를 지급하도록 했다. 코로나19의 영향도 있었지만 나름의 구조조정을 거쳐 2020년에는 예산이 절반 으로 삭감되었고, 2021년에는 인적쇄신과 운영비 절감으로 예산 50%로 행사를 마쳤 다. 지역 가수로는 최재관·한효종·이문구 외 10명이 출연했고, 서울에서는 김세환·윤 형주·김희진 외 4명이 참가했다. 코로나로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어느 해보다 알차고 감동적인 무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구상도 하고 있다. 봄에 지역 예선을 펼쳐서 가을 페스티벌 무대에 설 사람을 선발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1년 내내 축제가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는 복안이다.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과 기부는 ‘가풍’

 대구포크페스티벌도 그렇거니와 신 대표의 삶에 있어서 문화와 예술은 사업 이상 으로 공을 들인 분야다. 20여년 동안 판화를 비롯해 1,000여점의 미술품을 수집했 다. 직접 판화 작업도 한다. 아버지의 영향이다. 어린 시절 정으로 돌을 다듬는 아버 지를 도운 덕에 현재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99년에 계간지 ‘동시발전소’ 를 창간하고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동시집 ‘서로가 꽃’ ‘우리 선생님’을 상재했다. 아 동문학가로 활동하면서 동시집 2권을 냈다. 이런 활동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 역 시 가문의 내력이다. 

 “할아버지가 유명한 한학자셨어요. 탁청 신덕균 선생이라고 하면 다 알았죠. 구한 말 유학자인 간재 전우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탁청이라는 호를 받으셨죠. 할아버지 밑 에서 배운 이만 200여명이 넘어요. 사랑방에 드나드는 손님이 많았죠. 학문과 문화, 예술의 기운이 집안에 넘실댔다고 봐야죠. 지금까지 후학들의 자손들이 ‘청선계’를 조 직하여 매년 4월19일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집안의 분위기가 아버지에 이어 저 에게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네요.”

 예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2005 년부터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 오피스텔을 사들여 (사)아트빌리지를 만들어 지역작가 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작업실을 거쳐간 작가로는 계명대 미대 학장을 역임 한 장이규 화백을 필두로, 김윤종, 김영배, 정창기, 박종경 등 50여명에 이른다. 현재 는 김주영, 김진영, 방복희 등 5명이 작업하고 있다. 

 예술가들뿐 아니라 어려운 이웃도 외면하지 않았다. IMF 때부터 이웃돕기 나눔을 시작해 24년 넘게 매월 80가정 이상에 직접 쌀을 배달하고 있다. ‘쌀 배달 아저씨’라 는 별칭까지 얻었다. 2017년에 쌀 기부 활동으로 대한민국 자원봉사상 대상 국민훈 장 석류장을 받았다. 

 “집 위로 시장이 있었어요. 5일장이 열리면 각처에서 사람이 몰렸어요. 그때는 식당 도 없던 시절이라 마땅히 식사를 할 데가 없었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당에 큰 솥을 걸어놓고 먼 데서 오는 친척들이나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했어요. 장날은 작은 잔치 나 다름없었죠. 늘 이웃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지난해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드렸다. 아버지(신현철)와 어 머니(김옥순)의 이름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여원을 기부했다. 두 분 모두 아 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등록됐다. 고인 부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는 2번째다. 

“사업가로 그리고 따뜻한 이웃으로 살다 가신 부모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선비정신, 아버지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을 열심히 실천하고 후대에도 전하고 싶습니다. 2022년에도 지금까지 해오던 것 그대로, 할 수 있다면 더 열심히 헌신하고 나누는 삶을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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