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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니 타락했네, 사나이가 와 그래 사노?”

[경상도 촌기자 앞치마 두르다] 9

  • 입력 2015.06.24 00:00
  • 수정 2015.06.24 15:55
  • 기자명 전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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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와 카톡에 올리고 그카노?” “니 타락했네, 타락했어. 와 그래 사노?” “그래, 머 나중에 마누라한테 안 쫓겨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요리수업이 있는 매주 월수금 저녁이면 모든 모임 약속을 거절하다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학원 가야 된다. 다른 요일로 약속 잡자.” “뭔 학원?” “요리학원.” “머~~~어, 요리학원.” 대화가 이 정도 진전되면 잠시 말이 끊긴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여섯 쌍의 부부가 같이 하는 모임이 있다. 이곳에는 지난달 기사 연재를 시작하면서 남성들에게만 먼저 요리수업 수강 사실을 알렸다. 기사 주소를 복사해 카톡으로 날리면서 ‘신고합니다’ 했더니 ‘뭘 이런 걸 신고하냐’라는 댓글이 가장 먼저 올라왔다.

경상도 남자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가뜩이나 TV만 틀면 온갖 남성 요리프로그램이 도배를 하는 판국에 ‘너마저’하는 반응이다. TV에 등장하는 남성 요리사들은 호텔 주방장급이거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들이니 그저 재미로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항상 만나는 동료, 선ㆍ후배가, 그것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남성이 요리한답시고 온 동네 소문 내고, 글까지 쓴다고 난리를 피워대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일 게다. 한 선배는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요리 배워도 할 줄 아는 음식은 몇 개 없고, 주방만 어지럽힐 뿐이다. 아내한테 배우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친절하게 조언한다.

경상도 남자들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요리에 관심이 많다. 23일 경북 영천의 한 식당에서 파전에 비빔밥을 먹으면서도 요리 얘기로 꽃을 피웠다.

예상했던 반응이니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 주변의 누군가가 몇 년 전에 요리하겠다고 선언했다면 나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오히려 오기가 솟아올랐다. ‘반드시 정복하고 말 테다, 요리.’

하지만 경상도 남자들이 요리를 삐딱하게만 보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리하는 경상도 사나이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자취생활을 5년 해 봤다는 한 선배는 “집에서도 애들이 내가 한 찌개가 맛있다고 난리”라며 요리실력을 뽐낸다. 다른 선배는 “양념장에 식초 넣을 때 뭘 추가해야 하지?”라며 초짜 요리실습생에게 마구 질문 공세를 해댄다. 머리를 쥐어짜서 “설탕”이라고 대답하면, 이제는 육수 맛있게 내는 법을 묻는다. 오랜만에 대화상대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선배는 주말이면 으레 자신이 요리를 한단다. 요리가 생활화된데다 음식 만들 때가 즐겁다고 말한다.

사실 요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음식 만드는 즐거움을 잘 모른다. 원재료가 열과 배합, 양념에 따라 하나의 요리로 완성되는 과정은 예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창작의 기쁨과 비슷하다. 어느 정도 교육과 훈련을 거친 후에는 엿장수 맘이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된다. 두부와 된장, 양파, 파, 마늘 등으로 된장찌개를 만드는 초간단 레시피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딴 나라 얘기다. 된장찌개 하나 만들 때도 어떤 때는 소고기를 조금 넣어보고, 어떤 때는 오뎅도 넣어보며 변화를 준다. 이 국물에 고추장을 넣으면 또 맛이 달라진다. 우리 집은 맑은 된장찌개 고집하는 아내와 잡탕식 된장찌개만 만드는 내가 항상 주방에서 격돌한다. 먼저 앞치마 두른 사람이 결정권을 갖는다.

내 요리 실력이 한껏 부풀려져서 알려지자 주변에서 “날 잡자”는 사람이 많아졌다. 주방과 요리 재료를 제공할 테니 음식 솜씨 한번 보자는 이웃들이다. 새로 이사 가면 집들이할 때 ‘숙수’ 노릇을 해 달라는 분도 있고, 친목모임 날 잡아서 음식 맛을 보여달라는 동료들도 있다. “얼마든지”, 대답은 시원하지만 막상 닥치면 시험치는 아이 기분이 들 것 같다. 밥상에서 받아 드는 성적표가 어떻게 나올지.

이렇게 요리에 대한 호응이 크면서도 여전히 불편한 시각이 남아있는 이유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요리가 힘들기 때문에 경상도 남자들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문제다. 전통적으로 가정에서는 요리가 여성의 영역이라고 배워온 대한민국 남성, 그것도 보수적인 경상도 남성은 어릴 때부터 ‘남자는 부엌 드나들면 안 된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갖게 되는 것이다. 공교육도 역할을 했다.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기술 과목을 배울 때 여학생들은 가정 과목을 배웠다. 여학생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요리실습실 문앞에 줄 서서 손 내밀고 있던 남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성들은 사회로부터 요리와는 담 쌓도록 학습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후천개벽을 한 것인지 이제 젊은 남성들에게는 요리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다가오는 것 같다. 맞벌이에 자녀양육, 요리까지 성평등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젊은 세대들은 그렇다 치고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하나? 요리 배운 적도 없고, 요리를 배워서도, 해서도 안 된다고 배워 온 기성세대 말이다. 그런 이웃들에게 같은 세대의 남성이 요리를 배운다는 사실은 상당히 위협적이다. 젊은 세대가 요리 배운다면 “잘 배우라”고 덕담할 사람도 같은 세대가 요리 배운다면 삐딱한 시선을 보인다. 바로 현재의 생활방식을 침해 받기 때문이다. “다들 요리한다고 난린데 당신은 뭐 하능교?” 가뜩이나 호랑이로 변해가는 아내의 잔소리가 무서운 것이다. 요리하는 이웃집 남자는 공공의 적이다.

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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