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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며 사는 게 인생이란다’

다시 쓰는 서향의 살아가는 이야기

  • 입력 2015.05.26 00:00
  • 수정 2015.06.10 15:08
  • 기자명 대구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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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를 얘기하는 요즘 겨우(?) 80세를 장수(長壽)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70세를 의미하는 고희(古稀)라는 말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사람이 일흔 살을 사는 것은 예로부터 드물다)’에서 나온 걸 생각하면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팔순을 맞으신 아버님의 생신은 그저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떨리는 손으로 써주신 보물 같은 편지들


시아버님의 팔순연(八旬宴)을 열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회갑도 칠순도 여느 해처럼 지낸 자식들 입장에서는 늘 아쉬움이 남아있던 터라 팔순연은 기쁜 마음으로 조금 특별한 자리로 마련하였다.친가, 외가 등 일가친지들도 모두 초대하고 잔치를 위해 오래전 사진들을 편집하여플래카드를 만들고 기념영상도 준비했다. 아버님의 오래된 앨범 속에서 찾은 사진들로 우리가 직접 만든 영상 속에는 아버님의 할아버지와 부모님 사진, 젊은 시절의 아버님 모습과 결혼사진, 어린 자녀들이 커가는 모습, 그리고 4남매의 결혼사진이 담겼다. 아버님 몰래 준비하느라 약간의 작전이 필요한 일이었다.영상에 담긴 내용 중 가장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아버님께서 때마다 우리 가족에게 써주신 편지들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직접 써주신 새해 덕담과 축하쪽지들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손녀 채원아, 할아버지를 늘 기쁘게 해주어 고맙다.”, “며늘아, 생일을 축하한다. 이돈으로 옷이나 하나 사입으라. 그리고 건강을 항상 우선으로 생각해라.”, “간절한 꿈은 이루어진단다.”몇 해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계신 아버님은 손의 근육도 점점 마비되어 가고 있으시다. 그런데도 떨리는 손으로 직접 써주신 최근의 편지들은 힘겨운 필체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내 며느리로 살아온 세월이 어떠했냐 물으시면


남편과 혼담이 오갈 때 아버님은 맛있는 잡탕밥을 사주시겠다고 예비며느리인 나를중앙공원 앞의 허름한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후에 내가 그 날 기억나시냐고 여쭈었더니 아버님은 기억을 못하셨지만 나는 생전 처음 잡탕밥이란 걸 먹어 본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아버님은 집안 내력들을 이야기하시며 ‘우리 집안은 형편이 이러이러하다. 이래도내 며느리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 물으셨다. 그때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분명히는기억나지 않지만 남편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스물두 해를 살고 있는 걸 보면 ‘예’라고했던 모양이다.만약 지금 다시 ‘내 며느리가 되어 살아온 세월이 어떠했느냐’ 물으시면 분명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이 들으면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아버님 아들의 아내로 산 것보다 아버님의 며느리로 산 것이 조금 더 행복했노라고.며느리의 직장 앞까지 찾아오셔서 퇴근을 기다려 술 한 잔 권해주시는 시아버지는흔치 않을 것이다. 시어른과 마주 앉아 아버님 한 병, 나 한 병 소주잔 기울이는 모습은 막장드라마라고 흉볼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추억들이 지금도 새록새록 새롭고 그립기만 하다.종갓집에 시집와 딸만 둘 낳고 단산(斷産)한 내게 ‘예쁜 손녀딸 낳아줘서 고맙다’ 진심으로 한결같이 말씀해 주신 아버님!

순간순간이 쌓여 세월이 되고 삶이 되고


아버님 곁으로 참 긴 세월이 흘러갔다. 아니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라 많은 흔적들을남기고 갔다. 하얗게 센 머리와 주름살, 불편해지신 손과 발, 4남매와 8명의 손주들,42년 교직생활 속에 거쳐 간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따뜻한 배려와 사랑, 함께 만들어주신 아름다운 추억들.인생은 함부로 허비하며 살 일이 아닌 것 같다. 왜냐 하면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눈으로, 마음으로보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이 차곡차곡 겹겹이 쌓여 세월이 되고 삶이 된다.남편과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 때 아버님이 제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다.“아가야! 속으며 사는 게 인생이란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좋아질 거다 생각하며 속고 사는 게 인생이야.”“네, 아버님. 아버님이 그렇다 하시면 그런 겁니다. 열심히속으며 하루하루 부지런히 살겠습니다. 그러니 오래오래큰 산으로 제 곁에 든든하게 있어주세요.”

 

 

조남선/<문학세계> 신인문
학상으로 등단 (2004년)
대구수필문학회 회원
성광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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